황광해 음식평론가
제갈공명이 만두를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출처인 ‘삼국지연의’는 말 그대로 ‘연의(演義)’ 즉 ‘소설’이다. 작가 나관중은 오랫동안 구전된 이야기를 소설로 정리하면서 14세기의 중국 만두를 제갈공명의 이야기에 슬쩍 끼워 넣었다. 남만정벌 자체가 과장이다. 정사(正史)에는 만두를 빚었다는 ‘노수대제(瀘水大祭)’는 없다. 만두도 없다.
고려 가요 ‘쌍화점’의 첫머리에는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쌍화’는 만두다. ‘상화’라고도 한다. ‘쌍화점’은 만두전문점이다. 곡물가루를 찜통에 넣어서 찌면 하얀 김이 서리처럼 피어오르거나 맺힌다. 하얀 김이 서리는 모습이 서리꽃, ‘상화(霜花)’다. ‘회회아비’는 위구르족, 투르크족 등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다. 만두는 고려 후기,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에 의해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옛 이름)에는 몽골족을 비롯해 위구르, 아랍계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다.
만두는 ‘유목민족의 휴대음식’에서 시작되었다. 곡물가루를 날것으로 반죽하거나 혹은 발효, 숙성시킨 다음 작은 덩어리로 보관하다가 물에 넣고 끓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유목민족의 편리한 휴대용 인스턴트 음식이다. 곡물의 피에 고기나 채소 등의 속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춥고 건조한 지방이니 보관은 어렵지 않다. 어디에서든 끓는 물에 넣고 한소끔 끓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곡물을 통째로 익히는 것보다 한결 편리하다. 중국 남방의 송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거란족 요나라의 벽화에도 만두는 등장한다. 만두 찜통을 묘사한 그림들도 있다. 우리의 만두는 거란의 요나라, 몽골의 원나라 등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나 조선 모두 밀가루는 귀했다. 중국 화베이 지방에서 수입한 밀가루는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밀을 소량 재배했으나 대부분 술을 만드는 누룩으로 썼다. 밀가루가 흔해진 것은 6·25전쟁 이후다. 1955년 미국 공법 480조에 따라 잉여농산물이 한반도로 들어왔다. 그 이전에는 무엇으로 만두를 빚었을까? 메밀가루다. 교맥(蕎麥), 즉 메밀가루를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한반도의 만두 문화는 꾸준히 진화했다. 궁중, 고위 관리, 반가, 상민들로 퍼졌다. 고려 충혜왕 때는 ‘궁궐에서 만두를 훔쳐 먹었다가 사형당한 도둑’이 등장한다. “단순한 음식물 도둑이 아니라 ‘만두 도둑’이라고 적시한 점, 사형이라는 중형을 내린 점” 등을 두고 만두가 그만큼 귀한 음식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궁궐에서 귀하게 여긴 만두를 손댄 중죄인 셈이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관악산 신방사 스님으로부터 만두를 접대받는다. “승려가 속인에게 눈처럼 하얗게 쪄낸 만두를 접대하다니 놀라 자빠질 일”이라고 적었다. 승려, 고위 문관 사이의 접대용이니 귀한 음식이었던 셈이다.
‘독극물 만두 살인사건’도 있었다. 조선 중종 때 일이다. 창덕궁에 근무하던 가위장(假衛將) 이곤이 만두를 먹고 죽었다. 같이 만두를 먹었던 사람들도 토하거나 정신을 잃었다. ‘가위장’은 국왕이 거처하지 않는 빈 궁궐을 지키는 책임자로, 고위직 관리다. 한성부에서 독극물 투입 여부를 확인한다. 범인은 이곤 집안에서 부리던 종이었다. 만두는 귀하지만 민간으로도 널리 퍼졌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우리나라 의주 사람들이 중국의 대만두(大饅頭)를 잘 만든다”고 했다. 대만두는 큰 만두 피에 작은 만두를 여러 개 넣은 것이다. ‘해동역사’에서는 고려, 조선 초의 풍속을 전하며 대만두로 추정되는 만두 이야기를 실었다. “큰 만두의 껍질을 갈랐더니 그 안에는 작은 만두가 가득 들어 있었다. 크기가 호도(胡桃·호두)만 하여 먹기에 아주 좋았다”고 했다. 허균의 대만두와 비슷하다. 대만두는 이제는 사라진 음식이다.
동아일보 -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