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閑談]/<단상, 한담>

도서관 가는 길

Bawoo 2013. 12. 14. 16:24

1.

도서관에 책 반납해야 되는 날이다.

근데 날씨가 너무 춥다. 항상 가던 저녁 시간엔 엄청 추울 것 같다. 

 

그렇다고 반납을 미루는건  내 성격에 안맞고

그래서 햇볕이 좋은 한낮에 다녀오기로 했다

일주일 내내 전혀 못 한 운동도 할 겸 해서..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한창 듣고 있던 베토벤 현악 4중주 전곡을 중간에 중단해야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반납을 연체하거나 추운 저녁 시간에 가는 것 보다는

낮에 가는 것이 나을 것으로 판단되어 아쉬움을 접었다.

 

꽁꽁 싸매고 집 밖을  나서니 햇볕이 좋아 그런지 생각보단 덜 추웠다.

그래도 햇볕이 잘 드는 곳, 눈이 얼어있지 않은 곳을 찾아서 조심조심 걷는다.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20여 분 거리 ,

이번 주 내내 운동을 전혀 못 한 탓에 운동으로도 꼭 필요하기에 열심히 걷는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왕복으로 1시간은 맞춰 걸을 것이다'라고 계획을 하고서.

 

핸드폰 시계를 보니 열두 시 반,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서울에서 학교 동기들 점심 모임이 있는 날이어서  다들 모여있을 시간이다.

올테냐고 연락을 받았었지만 많이 망설이다 안 가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으나 잘들 모였는지 궁금은 했다.

그래서 모임 끝나고 인천으로 내려와 따로 만나기로 한 동기에게 전화를 해봤다.

'날씨가 매우 추워 도서관도 지금 가는 중이고 집사람이 모임이 있어 밤에 데리러 가야되니 날씨 풀리는 다음 주에 만나자'는 연락 핑계를 대고...

 

모임에 안 가기로 한 이유는 뭐 별것은 아니다.

나를 좀 불편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한 명있 고 나도 그 친구가 편치 않다 보니 나 때문에 괜히

모임  분위기 자체가 어색해지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대인 관계에 대한 평소 내 생각은 어느 쪽인가 하면 

사회 생활에서의 피할 수 없는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서로가 불편할 수도 있는 만남을 굳이 사적인 자리에서 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쪽이다.

 

지금은 좀 빛이 바랬지만 대학 입학 동기들은

내 삶에서 제일 기뻤던 시절에 인연이 맺어진 내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하게 생각되는 친구들이다.

나이가 많아 1학년 때 군대에 간 탓에 같이 지낸 기간은 고작 1년에 지나지 않지만

동기들을 생각하면 그래서 항상 마음이 기쁘고 좋다.

이 동기들이 사회 진출을 해서는 진로 선택에 따라  명암이 많이 엇갈린 삶들을 살고 있고

개중에는 이미 세상에 없는 친구도 있으나 다들 명문대를 다녔다는 긍지만큼은 대단들 하다.

 

명문대를 다녔다는 것이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상

어느 대학을 다녔다는 것이 평생 훈장처럼 꼬리가 달려 영향을 주게 마련인 터이니

어찌 보면 대단한 훈장이긴 하다.

그래서 적성과 관계없이 대학 이름만 보고 지원을 하는 경우가 우리 젊은 시절엔 비일비재했다.

나도 표시는 안 내지만 이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내가 들인 노력이  사회적 지명도를 우선으로 생각한

때문이니 이 정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된다.

 

그렇지만 내가 20년을 힘들게 다닌 직장인 은행의 내 또래들이 비록 대학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거의 모두가 상경계 출신들이고,  적성에 안 맞아 힘들어 했던 나와는 달리 잘 적응들 하고 다닌 걸 생각하면

동기중 인문계보단 상경계열이 맞을 것으로 생각되는 친구들도 꽤 있으니 대학 명성보단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적성에 맞는 학과를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게 사회생활을 해 온 경험을 통해 내린 나의 결론이다.

대학 생활은 고작 4년이고 사회생활은 한평생이니 직장에 들어가 얼마나 잘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학벌을 갖고 있으면서 잘 적응해낸다면 그것이 더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동기들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은

'나는 내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으니 너희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부러운 친구들도 있다.

누구냐 하면 내가 가고자 했던 학문을 하는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인데

그들은 일단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학식을 갖고 있다는 객관적 인증을 받고 있는 것이 그렇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가 가고자 했던 방식으로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외형적인 조건이 부러운 것일 뿐 내 삶의 방식은 아닌 것에서 다소나마 위안을 찾기는 한다.

 

만약 내가, 내가 원했던 길을 가고 있다면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 전부 진실이고 숨겨진 거짓이 없다면  나는 단편 소설 '소나기'를 쓰신 고 황순원 선생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세속적인 욕심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올곧게 하는 그런 삶.

 

대학에 몸담고 있는 동기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학문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학 사회도 일반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이 경쟁, 알력이 극심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을지언정  다 그렇고 그렇구나' 싶어 전에 부러워했던 마음이 많이 사그러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금의 나의 삶의 방식이 너무 좋다.

 

객관적인 인증, 자격과는 거리가 먼 삶이지만 그렇기에 세상 모든 일과는 무관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있어서 좋다. 얼마 전에 객관적인 스팩을 다시 만들려고 제도권에 진입을 다시 해볼까 하고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친한 동기하고 잠시 상의를 해 본 적도 있지만 그 생각을 머리에 담아두는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지기 시작해서 아예 생각도 안 하기로 해버렸다.

 

객관적인 스펙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면 15년 전인 98년 봄 은행을 자발적으로 나올 때 제일 먼저 그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을 하기엔 내일 모레  50이 되는 나이인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었고 딱히 전공하고 싶은 분야도 없었다. 문학 쪽은 손 뗀 지 근 30년이 다 되었고 한문 실력이 필요한 고전 분야도 내가 좋아하는 역사의 일부분이란 생각에 별로 애착이 안 갔다.

물론 젊은 시절 학문을 할 여건이 되어 있었다면  적성에 전혀 안 맞는 어학 분야를  뺀 나머지 분야는 다 소화할 수 있었으니 어느 분야든 결정해, 열정을 가지고 도전해 볼 수 있었겠지만 이미 너무 많이도 보내버린 세월은 그런 도전이 무의미 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었다. 그림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도 강하기도 했고.

 

그래도 한문을 좋아했던 것을 살려서 비교적 시간 제약을 안 받을 방통대 중국어과나 다녀 볼까 생각하고 원서를 넣어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이도 제도권이라 내 마음대로의 삶에 제약을 받을 것 같아 등록을 안 해버렸다. 무엇보다도 그토록 하고 싶었던 그림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제일 컸었다.

 

이러한 나의 제도권에 대한 기피증세는 지금 하고 있는 그림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퇴직 처리도 되기 전 나가기 시작한 화실에서 지도 선생은 공모전 위주로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과정을 보니 문하생들 실력이 아닌 선생이 그려주다시피 하는 그런 과정을 거쳐 출품하여 입상을 하고 그것이 누적되어 추천작가니 초대작가니 하는 타이틀을 달게 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입상을 하게되면 선생한테 감사 사례비가 오가고....

무엇보다도 싫었던 건 자신의 실력이 아닌 선생이 손을 대준 그림으로 입상을 하여 경력을 쌓는 그런 풍토였다. 

그래서 거길 그만두고 혼자 공부하면서 모 지역 공모전에 한번 출품해 본 적이 있다.

여기도 계속 7년을 입상하면 추천작가가 되는 시스템이었는데 한번 입상한 이후론 출품을 안 해버렸다.

매년 어김없이 날아드는 출품 의뢰서를 보고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위 대상을 받는 작품이 내눈에 봐선 '아무래도 아니올씨다' 수준인데 대상을 받고 있으니 세간에 떠도는 미술계의 썩은 풍토를 절로 알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자기와의 싸움인데 이 과정이 반복되어 좋은 작품은 안 만들고 무슨 작가입네 하고 내세우면서 작품은 보잘것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싶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무명이라도 작품만 좋다면 결국 실력을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고 난 그것으로 되었다'는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도서관 있는 곳에  거의 가까워진 마지막 건널목에 다다랐다.

길 건너편엔 초등학교가 있는데 하교하는 꼬마들인지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진 곳 빙판이 된 곳에서

신나게 미끄럼질을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에구!저놈들 다칠라'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나도 저 꼬마들만 하던 어린 시절 시골 동네 눈 쌓인 뒷산에서 미군 부대에서 나온 종이상자 쪼가리 위에 앉아 신나게 미끄럼  탔던 기억이 절로 살아난다.

참! 나라 자체가 가난하고 우리 집도 그러했던 시절, 그래도 아직 험한 세상을 살아내야 할 나이가 아닌 어린 시절인 탓에 마냥  즐겁게 뛰놀았었다. 그러다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운 좋게도  좋은 지도자를 만나 반만 년을 이어 내려온 가난의 고리가 끊긴 나라가 되는 과정을 같이 살아온 덕에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저 꼬마들 - 세상은 상전이 벽해가 되듯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달라져 내 어린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를 미래 시대에 저 아이들이 자기 몫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야 할 세상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저 해맑은 표정으로 빙판 위를 마냥 즐겁게 미끄럼질 타는 아이들이 한세상 살아내는 과정엔 제발 바라건대 지금보다는 더 풍요롭고 잘 사는 나라가 되어 있으면 싶다.

무엇보다 전쟁같은,  한 개인의 삶을 한순간에 망가뜨리는 외생적 변수가 없이 열심히 노력하면, 한 만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는 더욱 더 깨끗하고 정직한 나라로  발전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 한 세상 살다간 이 나라가 세계에서 지금보다 더 우뚝 선 나라가 되어있어 저세상에서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꼬마들은 자기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있다.

나는 그 옆을 미끄러져 다칠까 봐 조심조심 엉금엉금 한 걸음씩 걷고 있는데....

 

             

  2013.12. 13. 토요일 온 종일 걸려 쓰다.

              (2014.1.3 글 끝부분 ' 미끄럼질 하며 노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하는 부분'을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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