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야기
1.
우리 아들은 늦동이 외아들이다.
내가 서른 아홉, 집사람이 서른 넷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금지옥엽같은 소중한 아들이다.
이 금쪽같은 아들이 어느덧 장성하여
이제는 취업을 눈 앞에 두어 홀로서기가 가능한 성인이 되어 있다.
2.
아들은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아들이 힘들었다는 것은
부모인 나나 집사람 역시 힘들었다는 얘기인데
우리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탓에
갓난 아기 시절에는 포대기에 쌓여
돌봐주는 아주머니네 집으로 가야했고
아주머니가 일이 있어 봐 줄 수 없는 날에는
임시로 봐 줄 아주머니를 구하느라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애를 먹어야 했고
아들은 그래서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3.
걷기가 가능해지면서 부터는
어느 가정집을 정해 놓고 맡길 수 있어 마음이 좀 편했으나
이때는 내가 힘이 많이 들었었다.
직장과 반대되는 곳에 있는 그 집에 아들을 데려다 주느라고
본부장 보다 늦게 출근하는 날이 잦아지면서
본부장 눈에 나서 한참 애를 먹었었다.
내가 본부장 같으면 '늦은 나이에 결혼해 자식 키우느라고 고생한다고'오히려 격려를 해줬을 것 같은데
이 양반은 내가 정해진 출근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닌데 자기보다 늦게 출근한다는 이유로 날 미워했으니 상사라 어쩔 수 없어 모시긴 했지만 인간적으론 상종하기 싫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희안하게 이런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잘하고 출세하니
인간세상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4.
이 시절 가슴 아픈 기억이 두가지가 있는데
모두 아들을 봐주던 아주머니에게 불가피한 집안 일이 생겨
아들을 돌봐줄 수 없게 되면서 겪은 일이다.
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다른 동에 있는 놀이방에 아들을 맡겼을 때 일인데
하루는 아들이 내 손을 잡고 안떨어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엔 아이니까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 으례히 그런 것이려니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아니라 이놈의 놀이방 인간들이 아이를 제대로 돌봐주지는 않고
오히려 눈치밥 비슷한 것을 준 모양이었다.
가정집에 맡겨 놓고 있을 때는 그 집 아이들이 친동생처럼 잘 데리고 놀아주고 그래서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느라고 내 몸이 좀 고단하기는 했어도 참 좋았었는데
놀이방 인간들은 아이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놀이방을 차린
한마디로 직원들 임금 안주고 부려먹는 악덕 기업주 비슷한 인간들인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어린 아들이 내 손을 잡고 안떨어지면서 안가겠다고 했었을까?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난 지금도 아장아장 걷는 어린 아이들은 보기만 해도 예쁜데 어떻게 아이를 봐주면서 그 댓가로 돈을 벌겠다는 인간들이 그 대상인 아이들을 그리 학대 비슷하게 할 수 있는건지 이해가 안간다.
다른 하나는
아들을 맡길데를 구하지 못해서 직장으로 데리고 출근했다가 다행이 직장 근처에 놀이방이 있어 퇴근때 까지 맡겨 둔 적 이야기인데 이때는 학대받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단지 점심때 잠깐 들러보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데리러 갔을 때 그 비좁은 공간에서 아이들과 뒤섞여 놀다가
나를 보고는 애비라고 반색을 하며 달려 나오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던지......
5.
그 뒤로도 유치원을 마치고 자기 엄마따라 초등학교를 들어가기전 까지
아들이 겪은 어려움,집사람과 내가 좌불안석 편치 않았던 일은 수없이 많으나
가장 큰 사건은 무엇보다도 아들을 잃어버렸다 찿은 일일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들이 몇살때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으나
아장아장 걸을 때이니 아마 서너살때 쯤이 아닐까 싶다.
그날은 우리 세식구가 동네 전통 시장에 마을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마을버스에서 내려 시장 쪽으로 앞서 가다가 뒤를 돌아다 보니 아들이 없어진 것이었다.나보다 한걸음 뒤쳐져 걷던 집사람도 아들 손을 안잡고 놔두고 있었던 모양인데 아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아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찿으러 다니는 동안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떠올랐었는데 그것을 글로 다 표현하자면 밤을 새워 써도 모자랄 것 같고 아무튼 마을버스 종점을 찿아가고 파출소에 신고하는등 난리를 쳐서 간신히 찿기는 했는데 웃기는 것이 아들이 시장 근처 동사무소에 맡겨져 있는 것이었다.
아들을 잃어 버린 장소하고 아들이 맡겨진 동사무소와는 거리가 네다섯살 된 아들이 제발로 걸어가기엔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일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아들이 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누군가가 아들을 납치해 놓고서 우리 부부 동향을 관찰하고 있다가 도저히 안되겠으니까 포기하고 동사무소에 데려다 놓은 것 아닐까 하는 것'이 25년은 지난 지금도 똑같은 생각이다.
6.
자식이란 존재는 부부 사이를 이어주는 끈과 같은 것이어서 부부 사이가 원만치 못헤도 자식을 위해 서로 양보하며 살아가게 마련인 법인데 만약에 아들을 그때 영영 잃어 버렸다면 우리 세가족의 지금의 삶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때 아들을 잃어버렸다 찿은 일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 일을 겪은 이후로 길을 가다가 잃어버린 아이들을 찿는 벽보가 붙어 있는 것을 볼 때 마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가슴에 한이 서려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런 그들을 마음으로나마 위로하는 한편으론 '우리 가족이 그런 불행한 일을 겪을 뻔 했다가 모면하고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도 많았었다.
7.
이후의 삶은 아들이 군 복무를 위해 의경으로 입대를 하고 제대를 하기 전까진 비교적 평온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부터는 아예 초등교사인 집사람이 데리고 다녔으니까 걱정할 일도 없어져 버렸다.다만 3학년때 부터인가 집 근처로 전학을 시키고 집에서 혼자 지내도록 놔뒀는데 이것이 잘 한 일인지는 지금도 판단이 잘 안선다. 집사람이 근무하는 학교에 다닐 때는 총명하다고 다른 선생들이 다 칭찬했다는 것을 보면 너무 일찍 집사람 보호를 벗어나게 하여 보다 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없이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후회스러운적도 있었다.
아무튼 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집에 있는 컴퓨터로 혼자 컴퓨터를 익히고 책을 읽으며 잘 지내 줬으니 그것만으로도 대견하고 고맙다고 해야 되는 것인지...
8.
이렇게 성장을 한 아들이 초,중,고를 거쳐 대학을 다니다
군 복무를 위해 의경으로 입대를 하고 복무를 할 때가
부모로서 가장 힘들게 마음 조린 마지막이 나날들이 아니었나 싶다.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유년기를 남의 손에 맡기면서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매일매일 아들을 집에서 볼 수 있었으니 설사 마음이 편치않고 속상한 일이 있기는 했을지언정
마음을 조리며 불안한 나날을 보낼 일은 없었다.
그러나 군복무라는 것은 나라의 부름이라는 미명하에 부모의 품을 떠나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서 의무 기간을 지내야 되는 것이니
제대를 하는 그날까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이
아들을 둔 부모들의 똑 같은 마음 일 것이다.
그런 부모의 마음이 우리 부부가 유독 컸다고 한다면 아들을 둔 다른 부모들이 비웃을지는 모르겠으나
논산 집결 부대에서 아들을 배웅할 때 마음은 정말이지 가슴이 메어졌었다.
더군다나 그 부대가 내가 71년말 입대해서 훈련을 받던 그 부대였으니 그 시절 힘들게 훈련받던 기억까지 생각이 나서 그 힘든 과정을 아들이 겪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다 아들은 의경을 자원해서 입대를 한 탓에 우리 부부 마음을 더 조리게 만들었다.
아들이 의경을 자원한 이유가 아마 집 근처에서 복무를 하게 해주고 수시로 집엘 다녀갈 수 있다는 것에 끌린 것 같았는데 부모된 입장에서는 차라리 육군이나 공군으로 입대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의경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시위가 발생하면 시위대와 제일 전면에서 맞닥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때 부상당할 가능성이 매우 많아서 어떻게 보면 제대하기 전까진 항상 전시나 다름없는 상태로 복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실제로 이명벅 정권 초기 촛불 시위 사태때 시위 차단 임무에 투입되어 있던 아들을 만나보러 청와대 인근까지 집사람과 찿아갔던 일도 있었을 정도로 아들이 제대를 하던 그날까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9.
이런 아들에게 부모로서 그리고 애비로서 미안한 점과 아쉬운 점이 있다.
미안한 점은 수도없이 많고 아쉬운 점은 딱 한가지인데 많은 미안한 점 가운데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리부부가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모들 처럼 좋은 학군을 찿아다니는 열성을 안보인 점인데
이에 대하여는 '아들의 복 아니겠냐'라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집사람이나 나나 서울로 이사가는 것을 전혀 생각을 안하고 지금까지 아들이 태어난 한지역에서만 살아온 것이 아들의 삶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겠는가 하는 점에서 그런데 사실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던지 서울로 이사가도 될만한 경제력은 있었기 때문이다.
강남이야 집사람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가능했지만 목동이라면 집사람 출퇴근에도 전혀 지장이 없는 거리이니 그곳으로 이사를 생각해볼만 했는데 집사람이나 나나 전혀 생각을 안하고 있다가 아들이 다 성장한 뒤에야 뒤늦게 생각을 했으니 참 이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도 아들의 장래에 대해 너무 무심했던 것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많다.이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 성장기 시절에 너무 잦은 전학이 내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형성과 관계가 있어서 자식은 절대 전학을 안시키고 키우겠다는 고정관념 비슷한 걸 갖고 있던 탓에 그랬다는 것인데 아무튼 이 부분은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라 아들의 복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또 한가지 미안한 점은 아들의 어린 시절에 같이 놀아준 기억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휴가때 아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는 그런 것은 했으나 평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지낸 것이다.
이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직장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이를 풀기에 바빠 아들과 놀아줄 생각을 전혀못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젠 돌아가시고 안계신 부친과 같이 살아본 적이 없어서 아들과 놀아줘야 된다는 것 까지는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난 그저 한집에서 같이 살아주는 아빠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됐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아들과 잘 놀아주는 좋은 아빠는 아니었던 것 같아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10.
아들에게 서운하고 아쉬운 점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한 '내 자식이 남의 집 자식보다 잘자라 주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께다.
아들은 IQ가 150에 육박하는 수재급의 머리를 갖고 있는데 그에 걸맞는 학구욕이 별로 없었다.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가정 형편상 접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볼 때 나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머리에 뒷바라지가 가능한 부모를 둔 아들이 학구욕이 없는 것에 처음엔 많이 실망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자기 인생은 자기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들에 대한 큰 기대는 접고 말았는데 지금도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11.
이 아들이 어쨌던 요즘 청년 취업난 시대에 모 대기업 취업 시험에 합격을 했다.
내가 취업을 하던 젊은 시절인 70년대에는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취업이 확정이 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 요즘 취업시험 형태를 보면서 내가 지금 이 시대에 취업을 해야하는 나이라면 도저히 취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하는 시험에 합격을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견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부모의 욕심이 어디 그런가?
지금이야 아쉬운대로 내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으니 큰 불만이 없이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젊은 시절, 생활을 위해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아직도 가슴 한켠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아픈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아들은 '보다 더 큰 꿈을 향해 날아가 보려는 노력을 안한 것은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는 아들의 삶을 내 못다 이룬 꿈에 대입해 놓고 보는 때문일테니 결코 옳은 방식은 아닐 것이다.
또 아들은 아들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직장을 구한 것이어서 만족을 하는 것 같고...
아들은 이제 홀로서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젊은 시절 누구나 다 하게 마련인 이성교제,밤업소 출입 같은 거 한번 안하면서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을
'나도 젊은 시절에 그리 살았는데 뭘'하며 당연시하는게 내 마음이면서도 한편으론 많이 고맙기도 하다.
이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걸어가기 시작을 하려하고 있는 지금,아들의 앞날이 무탈하게 잘 펼쳐지기를 부모의 마음으로 빌어본다.진짜 자기 몫의 삶은 이제부터이니.....
2013.11.24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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