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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익(崔天翼·1712∼1779) 선생의 ‘농수집(農수集)’에 실린 ‘삼강비명(三綱碑銘)

Bawoo 2015. 12. 16. 20:00

이희룡(李希龍)은 말 타기와 활쏘기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따라 의주(義州)에 가 있다가 영남의 적병을 정찰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적들은 영호남에 걸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은 적병을 피해 몰래 경주, 울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적의 허실과 형세를 알아냈다. 임금에게 보고하려고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그만 적과 마주쳐 갈 수 없게 되었다. 공은 “왕명을 받든 몸이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나아가 적과 싸워 죽음으로써 임금께 알리리라” 하고는 마침내 혼자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공의 아들 이문진(李文軫)이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길을 떠났다. 충주에 가서 공의 시신을 찾다가 신녕(新寧)에 이르러 적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이에 분연히 말하기를 “나는 이 도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달려들어 힘껏 싸우다가 적들에게 맞아 죽었다.

이문진의 아내 김씨가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하였다. “시아버님은 나라에 충성하다 돌아가셨고, 남편은 효도하다 죽었으니 내가 죽을 곳을 알겠다(吾舅死於忠, 吾夫死於孝, 吾知死所矣). 유골을 수습해서 선산에 묻어드리고 나의 뜻을 결행하리라.” 김씨는 걸어서 적진에 이르러 들판을 두루 뒤졌다. 그런데 하필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니 시신들이 포개진 채로 비를 맞아 겉모습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손금을 보면서 찾아 헤맸는데 석 달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김씨는 여종에게 울면서 “나는 이제 죽으련다” 하더니 집으로 돌아가 곡기를 끊고 죽었다. 

최천익(崔天翼·1712∼1779) 선생의 ‘농수집(農수集)’에 실린 ‘삼강비명(三綱碑銘)’입니다. 한 집안에 충·효·열(忠·孝·烈) 삼강(三綱)이 다 갖춰진, 이른바 ‘삼강 명문가’를 칭송한 글이지요.

 

[동아일보-'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모범 가문을 찾아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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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1.최천익(崔天翼)1710년(숙종 36)∼1779년(정조 3).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자는 진숙(晉叔), 호는 농수(農叟). 아버지는 흥해의 아전이었던 준걸(俊傑)이다. 어려서 같은 고을의 운와(耘窩)라는 사람에게 배웠으며, 이형상(李衡祥)에게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집안 대대로 흥해의 군리(郡吏)였는데, 그만은 열심히 공부해서 진사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진사시에 급제하자 분수에 족하다고 하면서 다시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10여 년 동안 군리로서 생활한 것을 제외하고는 사방으로 배우러 다니며 학문에 힘썼다. 만년의 30여 년 동안은 후진을 양성하며 보냈다. 그의 문하에서 유인복(柳寅福)·최기대(崔基大)와 같은 인물이 배출됐다. 외지고 작은 마을인 흥해에서 이름 높은 선비들이 그 뒤에 많이 배출된 것은 최천익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시문에 능하여 성대중(成大中)·신유한(申維翰) 등 당대의 일류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고금의 역사와 정치 등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아전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뜻을 펴지 못했다. 정조 때 병조판서를 지냈던 권엄이 그의 능력을 알고 관찰사에게 말해 조정에 천거하려했으나 하지 못했다.

[저서]

저서로는 초간본 『농수고(農叟稿)』 1권 1책과 중간본 『농수집(農叟集)』 2권 2책이 있다.

 

2. 이씨삼강묘비명(李氏三綱廟碑銘).

 

 

 

삼강묘비는 이희룡(李希龍)의 충성과 아들 이문진(李文軫)의 효성, 이문진의 처 김씨의 절개를 기린다. 이희룡의 자(字)는 응서(應瑞)이고, 선대는 옥구(沃溝)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경주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무과에 합격해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왕을 따라갔다가 명을 받고 영남의 적을 정탐하게 되었는데, 정탐하고 돌아가던 중 적을 만나 싸우다가 죽었다. 아들 이문진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체를 찾으려고 가다가 적을 만나 싸우다 죽었다. 이문진의 처 김씨가 소식을 듣고 시체를 찾으러 전쟁터에 갔는데 3달 동안 찾지 못하고 돌아와 목숨을 끊었다. 이희룡은 본래 효성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충성심의 바탕에 효성이 있었던 것이다. 1709년 관찰사의 장계로 인해 증직하고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그 뒤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또 비문을 써 기록하게 되었다. 한 집안에서 삼강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희귀한 일이었던 것이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參綱廟碑銘」
三綱廟碑銘幷序」
資憲大夫刑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南有容撰」
通政大夫守慶州府尹慶州鎭兵馬節制使洪梓書」
天之生人有大經焉有大坊焉三綱之謂也一日無是則民無以爲生后王無以爲國然敎化」
易於陵夷人心安於暴棄故先王爲是坊也顯其忠㫌其孝表其烈以歆動斯民以型範一世」
盖所以養其源遏其流也嗚呼擧一州一鄕而求一人之忠一人之孝一婦之烈尙或寡矣若」
一家之內臣死於君子死於父婦死於夫得三綱之全者亦天下一而已矣余讀故殿中李公」
家傳未嘗不爲之流涕也公諱希龍字應瑞其先沃溝人也後家慶州好兵法善騎射選武擧」
補司憲府監察 宣廟壬辰南蠻入寇公從 王于義州承 命覘賊嶺南時賊屯亘湖嶺千」
里無人煙公冒矢石出沒慶州蔚山之間盡得其虗實緩急狀將歸復于 行在至忠州遇賊」
不得進公曰王命在身身固不可辱寧前鬪賊以死聞于 王遂獨身力鬪死公子文軫聞」
公死立起行在途哭不絶聲將至忠州尋公屍及新寧爲賊所遮乃奮曰吾不可與此賊共生」
一天之下遂突陣力摶死其妻金氏聞而哭曰吾舅死於忠吾夫死於孝吾知死所矣然收骨」
歸瘞故山乃行吾志耳誓家衆徒步至戰所遍索原野間時甚風雨暴屍相疊不可以貌辨獨」
驗其手線而求之三月卒無得泣謂其女僕曰吾今死矣必以夫遺服葬我言已自引死嗚呼」
烈哉雖霽峯高氏一門五節何以尙焉盖 公自幼以孝友特聞父母沒與兄變龍廬于墓泣」
血以終三年至今鄕人稱其里曰孝幕洞其臨危效命不渝臣節固自有基本矣其子若婦之」
視死如歸各盡其道者亦豈非得之觀感者然歟 肅廟己丑 御史朴公鳳齡採南士之誦」
申狀于 朝翌年庚寅 命贈殿中公通政大夫戶曹參議文軫宣務郞義禁府都事金氏端」
人旌其閭曰節孝忠烈三綱俱備之門 聖朝褒尙之典至此而無憾矣今 上丙戌鄕人又」
謀立祠于州北丹丘里以享公之忠孝烈配焉甚盛擧也今府尹洪公梓亦樂爲之助將刻石」
紀其事使殿郞朴泰運褁足踰嶺屬余爲交舖張風烈固非老筆所能爲特重洪公之義嘉鄕」
人之志書其梗槩如右系以銘曰」
維天降衷曰惟三綱 人道攸基敎思無疆 民孰不知孰敢怠荒 大難臨之鮮弗蒼黃」
昔在龍蛇蠻寇跳踉 烈烈殿中 王命是將 覘機賊巢將復于 王 孤誠未達悍鋒交」
搶 旅踵匪志喪元弗忘 孝子皇皇矢死旻蒼 父讎在心不見劒鋩 義奮力竭授賊以」
肮 忠臣有子死骨亦香 哀哀貞婦繭足戰場 負骸歸土責在未亡 原隰之裒色貌莫」
詳 一慟而殂天何茫茫 鷄林之野丹丘之鄕 爰有祠屋朱楔煌煌 辟王之命邦國之」
光 招魂作主酒冽肴芳 兒婦陪食宛在帷堂 英靈相感載陰載陽 風聲攸漸懦夫氣」
張 破穹者石有麗牲羊 百爾君子視此銘章」
崇禎三丙戌 月 日立」

 

삼강묘비명(三綱廟碑銘)

이씨삼강묘비명(李氏三綱廟碑銘). 서문을 아울러 기록함.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資憲大夫刑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남유용(南有容) 지음.
통정대부 수경주부윤 경주진병마절도사(通政大夫守慶州府尹慶州鎭兵馬節度使) 홍재(洪梓) 글씨.

하늘이 사람을 내면서부터 근본이 되는 도리와 커다란 제방이 있었는데, 바로 삼강을 말한다. 하루라도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고 임금은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교화는 쇠퇴한 데서 쉽게 이루어지고 인심은 포기한 데서 편안해지므로 선왕은 이것을 제방으로 삼았다. 충성을 드러내고 효를 기리며 절개를 표하여 백성을 고무하고 한시대의 전형으로 삼는 것은 대체로 그 근원을 기르고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방도인 것이다. 아아, 한 고을 한 마을을 통틀어 하나의 충신, 하나의 효자, 하나의 열부를 구해도 오히려 드문데, 한 집안에서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죽었으며 아내는 남편을 위해 죽었으니, 삼강을 완전히 갖춘 경우는 천하에 하나뿐일 것이다. 내가 작고한 전중(殿中) 이공(李公) 집안의 전기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의 이름은 희룡(希龍)이고 자(字)는 응서(應瑞)이다. 선대는 옥구(沃溝)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경주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병법을 좋아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에 합격해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선조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공은 의주(義州)로 왕을 따라갔다. 명을 받고 영남의 적을 정탐하게 되었는데, 그때 적은 긍호령(亘湖嶺)에 주둔하고 있었고 천리길을 가는 동안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공은 시석을 무릅쓰고 경주와 울산(蔚山) 사이에 출몰하여 적군의 허실과 완급 상황을 모두 알아냈다. 다시 행재소로 돌아가던 중 충주(忠州)에 이르러 적을 만나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공이 말했다. “왕명을 받은 몸이라 몸을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앞에 나가 싸우는 것으로 임금에게 알리리라.” 이윽고 혼자 몸으로 힘을 다해 싸우다 사망하였다. 


공의 아들 이문진(李文軫)이 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일어나 나갔다. 가는 도중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장차 충주에 도착하여 공의 시체를 찾으려고 하였는데, 신녕(新寧)에서 적을 만나 막히게 되자 흥분하며 “내가 이 적과 함께 같은 천하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하고는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 죽었다. 이문진의 처 김씨(金氏)가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했다. “우리 시아버님은 충성을 위해 죽고 내 지아비는 효를 위해 죽었으니 내가 죽을 곳을 알겠다. 그러나 뼈를 거두어 고향 산에 묻은 뒤 내 뜻을 실행하리라.” 집안사람들에게 맹세한 뒤 걸어서 전쟁터로 가서 들판을 찾아다녔다. 때마침 비바람이 심해서 널려있는 시체가 포개져 있어 모습을 분간할 수 없었다. 오직 손금을 증표로 삼아 찾았으나 세 달이 지나도 끝내 찾지 못하자 여비에게 울면서 말했다. “내가 이제 죽을 것이니 남편이 남긴 옷으로 나를 장사 지내다오.” 말을 마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아, 열부로다. 아무리 제봉 고씨(霽峯高氏 : 고경명(高敬命)) 한 가문의 다섯 절개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는가? 


들어보니 공은 어렸을 때부터 효도와 우애로 특별히 소문이 났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인 이변룡(李變龍)과 여막에서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시묘 하였다. 지금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을 효막동(孝幕洞)이라고 부른다. 그가 위난을 당해 목숨을 바쳐 신하의 절개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본래 근본이 있었던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각자의 도리를 다한 것 역시 눈으로 보고 느낀 결과가 아니겠는가? 숙종 기축년(숙종 35, 1709년)에 관찰사 박봉령(朴鳳齡)이 남쪽 선비들이 칭송하는 것을 캐내 조정에 장계를 올리자 이듬해 경인년(庚寅年)에 전중공(殿中公)에게는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이문진에게는 선무랑 의금부도사를, 며느리 김씨에게는 단인(端人 : 정8품관 아내의 품계)을 증직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는데 ‘충 · 효 · 정열의 삼강을 모두 갖춘 가문(忠孝貞烈三綱俱備之門)’이라고 쓰여 있었다. 성조(聖朝)의 포상하는 은전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유감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뒤 병술년(丙戌年)에 향리 사람들이 다시 고을의 북쪽 어느 마을에 사당을 세워 공을 향사하고 효자와 열부를 배향하고자 했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지금 부윤으로 있는 홍재(洪梓)가 기꺼이 도와 비석에 그 일을 새기고자 하여 전랑(殿郞) 박태운(朴泰運)을 고개 너머로 보내 내게 글을 부탁하였다. 열렬한 풍모를 열거하여 드러내는 일은 노련한 필력이 아니면 잘 할 수 없겠지만 특별히 홍공의 의리를 중시하고 마을 사람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이와 같이 대강을 기록하고 명을 썼다.


하늘이 참마음 내리니 삼강이라 하는데
사람 도리의 기본으로 가르침 무궁하니
누군들 모르고 누가 감히 소홀 하겠는가만
큰 난리 닥치면 당황하지 않은 사람 없네.
옛날 임진 계사년에 왜구가 날뛰자
열렬한 전중공 왕명을 받들고 가서
적의 소굴 엿보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정성은 미치지 못하고 예봉이 교차하여
뜻밖에 발길 돌려 목숨 잃고 못 잊었는데
효자가 황급히 하늘에 죽기를 맹세하며
아비의 원수 갚을 마음에 칼날은 보지 않고
의분으로 힘을 다하여 적에게 목을 내주니
충신의 아들이라 죽은 뼈도 향기로웠네.
애달프다, 지조 높은 아내 부르튼 발로 가서
해골 짊어지고 고향에 돌아올 심산이었는데
늪과 언덕의 많은 시체 모습을 가릴 수 없어
통곡하고 죽었는데 하늘은 어찌 아득한가?
경주의 들판에 있는 신선의 마을에
사당이 있고 붉은 문설주 휘황한데
임금이 내린 명으로 나라의 빛이 되니
초혼하고 신주 만들어 좋은 안주 술 올리고
아들 며느리 배향하여 완연한 유당 유당(帷堂) : 염습한 시신을 가리기 위해 마루 위에 유막(帷幕)을 치는 것을 말함.
갖추니
영명한 혼령 서로 감응하여 음양을 실어
바람소리 점차 더해 약한 장부 기운 펼치네.
저 활모양의 돌에 희생양 바쳤으니
모든 군자들은 이 명문을 볼 것이다.

 

[출처:cafe.daum.net/moonhwa-guide/5gu7/179   포항KYC 문화역사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