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귀뚜리
―이형기(1933∼2005)
봄밤에도 귀뚜리가 우는 것일까.
봄밤, 그러나 우리 집 부엌에선
귀뚜리처럼 우는 벌레가 있다.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아무튼 제철은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목청껏 우는 벌레.
생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열심히 울고
또 열심히 열심히 사는 당당한 긍지,
아아 하늘 같다.
하늘의 뜻이다.
봄밤 자정에 하늘까지 울린다.
귀를 기울여라.
태고의 원시림을 마구 흔드는
메아리 쩡쩡,
메아리 쩡쩡
서울 도심의 숲 솟은 고층가
그것은 원시에서 현대까지를
열심히 당당하게 혼자서도 운다.
목청껏 하늘의 뜻을
아아 하늘만큼 크게 운다.
‘봄밤의 귀뚜리’는 뭔가 어색한 제목이다. 기왕 어색한 김에, 겨울이 되어 ‘봄밤의 귀뚜리’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시의 핵심은 봄밤에도, 귀뚜리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귀뚜라미는 예쁘지 않다. 특이하지도 귀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몸집에 비해 목청이 참 크고 좋다. 그래서인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빚진 노래나 시가 제법 많이 있다. 심지어 이 작품의 시인은 당장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다. 꿇을 만도 하다. 생명으로서의 신호를 저렇게도 잘 뽑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살아있음 자체를 힘차게 주장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감탄한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바로 긍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당연한 이 말이 요즘 들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시에 의하면 살아있는 것은 스스로 권위를 갖는다. 하물며 귀뚜라미도 생명의 긍지를 지지하며 운다는데 반대로 현대인들은 살 이유를 찾아야만 살 수 있다. 봄밤의 귀뚜리만 당당할까. 겨울에든 여름에든, 생명은 다 존엄하다. 오늘날 하늘의 뜻이 지상의 뜻에 지지 말기를 바라며 이 시를 음미할 수 있다.
나민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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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시인[1933~2005]
1963년에 간행된 시집 <적막강산>에 수록된 시 <낙화>로 유명한 시인이다. 존재의 무상함과 아름답게 사라져가는 소멸의 미학을 특유의 반어법으로 표현해,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사회학적 미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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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9년 고등학교 재학 중에 <문예>지에 <비오는 날>이 추천되어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등단했다. 초기 시 세계는 자연을 응시하는 가운데 맑고 고운 현대적 서정의 세계를 추구했으며, 자아와 존재의 궁극을 추구하며 조락과 소멸의 운명을 수긍하는 전통 서정의 계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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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했다. 시집 <적막강산>(1963)에서는 생의 근원적 고독과 세계의 공허를 일찍부터 깨달은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펼쳐 보인다. 평론으로도 주목받은 그는 1963년 이어령과의 문학논쟁에서 평론 표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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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문학론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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