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손세실리아 검색해서 나온 자료들 중에서 발췌]
진경(珍景)
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늙어서 “무쇠 걸음”인 노파와 “발목 잘린” 유기견의 동행을 그린 시이다. 그들이 함께 가는 길은 “굽잇길”이고, 노인의 등은 “오랜 노동으로 활처럼” 휘어 있다. “명아주 지팡이”는 노파의 손처럼 울퉁불퉁 마디로 가득하다. 유기견은 발목까지 잘린 채 버려졌지만, “가쁜 생의 고비”를 함께하기 위해 노파를 뒤따른다. 노파가 “절룩절룩” 걸어갈 때, 유기견은 “쩔뚝쩔뚝” 걸어간다. 아프고 약한 것들 사이의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화음(和音)의 저 끝에 산이 있고 절이 있다. 적멸(寂滅)로 가는 길이 화사하다. 그래서 “진경”이다<오민석 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 * *
마흔
먹어도 먹어도 허리가 줄고 시시로
목이 멥니다 마음과 몸이 삐걱대고
번번이 서로를 거역합니다
의연한 척 무연한 척하지만 기실은
매양 갈팡질팡합니다 이따금
관계에 홀려 휘청대기도 합니다
시퍼렇게 날선 작둣날을 타는
어린 무녀의 연분홍 맨발바닥처럼
아찔하기도 하고, 차도를 건너는
민달팽이의 굼뜬 보행처럼
위태롭기도 한, 낙타도 수통도 없이
사막을 건너는, 독사의 축축한 혓바닥
도처에서 널름거리는, 이승의 무간지옥에
다름 아닌, 내딛는 곳마다 허방인, 진창인,
생의 花根이며 火根이기도 한,
不不惑인,
* * *
우주의 신발
등산화 다섯 켤레째다
길 위의 시간을 대변해주는 물증인 셈이다
밑창 닳고 헐거워져 버릴 때마다
한 짝씩 차례로 손바닥에 올려놓고
고양이 등 쓰다듬듯 어루만지곤 하는데
별 뜻 있어서라기보다는
길 떠도는 동안 몸 사린 적 없는 충복이자
어디든 군말 없이 따라나서 준 도반이었으니
작별의 예를 갖춤이 도리일 것 같아서다
신문지에 싸서 버리고 새 신을 고르다 생각한다
내 몸도 어쩌면 우주의 얼음 발에 신겨진
한 켤레 신발일지도 모른다고
주야로 끌고 다녀 뒤축 꺾이고 실밥 터졌으나
생을 마감 짓는 날까지 벗어던질 수도
새 것으로 교체할 수도 없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구도자(求道者)란 진리나 종교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사람이다. 한 편의 시가 이처럼 경건하고 숭고할 수 있을까. 고려 중기 문인인 이규보의 ‘슬견설(蝨犬設)’에서 이(蝨)와 개(犬)를 견주어 무릇 생명은 크고 작은 것에 차이가 없으며, 귀하고 천한 것에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어느 날 ‘밑창 닳고 헐거워져’ 숨이 다한 때, 우리는 이처럼 숭고하게 보낼 수 있을까, 갈 수 있을까.
‘생을 마감 짓는 날까지’ 영혼은 몸을 버릴 수 있지만, 몸은 영혼을 버릴 수 없다. 당신과 내가 걸어온 길은 ‘등산화 다섯 켤레’를 쓸 정도로 길고 긴 ‘길 위의 시간’이었다. 시인처럼 미물에도 사랑이 닿아야 진정 사랑을 아는 자라 할 것이다. ‘고양이 등 쓰다듬듯’ 주변의 대상에 대하여 살갑게 어루만져주었나 자문해보는 시간이다. 그 대상이 당신일 수도 당신의 사랑일 수도 지인일 수도, 또는 당신의 몸일 수도...(시인 정훈교)]
* * *
얼음 호수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 출처 :『기차를 놓치다』, 도서출판 애지 2006
● 시, 낭송 – 손세실리아
196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2001년『사람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시작. 시집『기차를 놓치다』가 있음.
마치 이육사의 시 ‘절정’을 2007년 12월에 다시 보는 듯합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염하고 완벽히 봉한다는 것, 그것은 생의 어떤 극점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이르러서야 소요와 엄살로 점철된 지나온 시간을 온전하게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는 꿈틀거리면서도 죽은 척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한 사나흘 죽어보지도 않고 힘들어 죽겠다고 엄살을 피운 건 아닌지? 반성 없이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한 해의 반성문을 써야 할 시간입니다. [2007. 12. 24. 문학집배원 안도현]
* * *
섬
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
안경을 두고 왔다
나직한 목소리로
늙은 시인의 사랑 얘기 들려주고 싶어
쥐 오줌 얼룩진 절판 시집을 두고 왔다
새로 산 우산도
밤색 스웨터도 두고 왔다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날을 몰라
거기
나를 두고 왔다
섬은 외로워 보이지만 사랑을 늘 묵상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섬은 사랑을 잃고 난 후의 통절한 울음 같기도 하고, 섬은 사랑 혹은 기다림의 자세 같기도 하다.
연인이 여기 있다.
섬을 떠나 뭍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 있고, 그를 다른 곳으로 떠나보낸 후 섬에 남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떠나오는 이는 섬에 이것저것을 두고 떠나온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던 안경의 애틋한 시선을 놓아두었다.
사랑을 노래한 낡은 시집 속 언어들을 놓아두었다.
궂은비가 내리는 날에 받쳐 들 우산을 놓아두었다.
털실로 두툼하게 짠 스웨터도 바람 부는 날에 입으라고 놓아두었다.
끌리는 눈빛과 거짓 없이 수수한 고백과 다정했던 날의 생활을 두고 떠나온다.
아니 그리하여 떠나오지 못한다.
떠나온 사람도 홀로 남은 사람도 섬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기억하는 한 섬은 섬이 아니다.
[문태준 시인 - 조선일보 & Chosun.com]
* * *
반뼘
무명 록 가수가 주인인
모 라이브 카페 구석진 자리엔
닿기만 해도 심하게 뒤뚱거려
술 쏟는 일 다반사인 원탁이 놓여 있다
기울기가 현저하게 차이지는 거기
누가 앉을까 싶지만
손님 없어 파리 날리는 날이나 월세날
은퇴한 록밴드 출신들 귀신같이 찾아와
아이코 어이쿠 술병 엎질러가며
작정하고 매상 올려준다는데
꿈의 반뼘을 상실한 이들이
발목 반뼘 잘려나간 짝다리 탁자에 앉아
서로를 부축해 온뼘을 이루는
기막힌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반뼘쯤 모자란 시를 써야겠다 생각한다
생의 의지를 반뼘쯤 놓아버린 누군가
행간으로 걸어 들어와 온뼘이 되는
그런
다리나 절뚝거리고 함부로 술을 쏟는 저런 반편이 원탁을 품고 있으니 장사가 잘될 턱이 없다. 그래도 월세 날이면 이 절뚝발이 원탁의 진가가 드러나니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했던가. 무명과 은퇴가 서로를 부축하고, 구석과 상처가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이 기막힌 라이브를 보라. 파고들 틈이 없는 온뼘보다 그늘을 이해하는 이런 반뼘들이 사무치는 시절이다<손택수·시인>
* * *
문전성시
해안가 마을길에 찻집을 차린 지 달포
발길 뜸하리란 예상 뒤엎고 성업이다
좀먹어 심하게 얽은 싸리나무 탁자
마당 정중앙에 버텨 앉은 맷돌상
바다정원의 화산암 테이블
좀처럼 빌 틈 없다 만석이다
기별 없는 당신을 대신해
떼로 몰려와 종일 죽치다 가는
눈먼 보리숭어
귀 밝은 방게
아기 보말
남방노랑나비
* * *
낌새
산새 죽은 자리 깃털 분분하다
먹고 싸는 일을 직방으로 해치우며 살아온
날 것의 최후답게 말끔하다
뼛속까지 텅 비었으니
해체도 간단했으리라
새로서야 몸의 하중이 가벼울수록
자유로운 비행이 수월해서라지만
새도 아닌 노모
사소한 동작에도 분질러지고 바스라져
툭하면 깁스 신세다 얼마 전엔
잇몸뼈까지 도려냈다 그뿐인가
지리는 일 잦아져 바깥출입도 삼간다
기필코 날고야 말겠다는 듯
하루하루 새를 닮아가는
손세실리아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사 , 2014
시골에 살며 가까이에서 많은 새들을 보았다. 곤줄박이·붉은머리오목눈이·딱새· 물까마귀·뻐꾹새·종달새·휘파람새· 까마귀·멧비둘기·딱따구리·가창오리· 왜가리…. 앵두와 양보리수와 버찌가 익으면 뭇새들이 날아와 쪼아 먹는다. 시골생활의 즐거움은 새들에게서 온다. 대기가 코발트빛으로 빛나는 여름 새벽 부지런하고 사랑스러운 새들은 깨어나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나는 새벽마다 새소리를 들으며 깨어나곤 했는데, 망망대해와 같은 고독 속에서 큰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었다. 인간의 관점과 새의 관점에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과 새는 뇌의 크기가 다르고 감각계가 다르다. 대개 맹금류의 눈은 정밀도가 뛰어나 세세한 것까지 보고, 올빼미의 눈은 민감도가 뛰어나 어두운 곳에서도 사물을 잘 본다. 그러니까 새의 일부는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시각을 갖고 있는 셈이다. 새들은 인간에겐 없는 자각(磁覺) 기능을 갖고 있다. 철새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할 때 이 자각 기능으로 방향을 탐지하고, 지구 자기장으로 제 위치를 인식한다. 믿기 힘들지만 새들은 지구 자기장을 본다고 한다. 이 명민한 새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고 축복이다.
시인은 죽은 산새를 본다. 나도 시골에 살며 산새 죽은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더 힘센 부리와 발톱에 해체된 산새의 주검! 그 자리에 살점 흔적은 없고 깃털들만 분분하게 날린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코마(koma)’의 영역, 즉 생물적 욕망과 생물적 필요로 얽혀 있다. 약육강식의 먹이사슬로 얽혀, 먹고 먹히는 일이 항다반사로 일어난다. 먹고 먹힘을 통해서 자연은 끝없는 에너지 교환을 한다. “산새 죽은 자리 깃털 분분하다/먹고 싸는 일을 직방으로 해치우며 살아온/날 것의 최후답게 말끔하다”. 산새의 죽은 자리가 깔끔한 것은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새는 먹고 싸는 일을 직방으로 해치우며 살았던 것. 그렇다면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배설한다. 먹고 싸는 무분별의 이면에는 탐욕과 이기주의, 기만과 허언들이 엉겨 있다. 지구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교란시킨다. 배신하고 상처를 입는다. 누군가를 배신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미안하다 잘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늙은누룩뱀의 눈물〉) 한다.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할 때 욕망은 그르렁거리고, 불만과 우울증으로 마음은 병이 든다. 사람으로 사는 일은 “생의 이 너머와 저 너머를 넘나드는/초인적 여정”(〈파일럿〉)이다. 삶은 복잡하고, 관계들은 얽히고설킨다. 그에 반해 새들은 얼마나 단순한가! “뼛속까지 텅 비었으니/해체도 간단했으리라”. 새들은 뼛속까지 텅 비우고 산다. 그렇게 단순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죽는다. 그 단순한 새의 생태는 복잡한 삶을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낌새〉는 사는 일의 버거움을 감당하다가 마침내 삭막하게 늙은 노모의 모습을 그려낸다. 아마 노모는 시간에 쫓기며 그렇게 팍팍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자신을 돌볼 시간도 없고, 여가를 충분히 즐기지도 못한 채. 왜 그럴까? “시간에 쫓긴다는 것이 예측 불가능성과 통제권 박탈의 결과라고 한다면, 진정한 여가는 자신에게 그 경험에 대한 일정한 통제권과 선택권이 있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브릿지 슐트, 《타임푸어》, 379쪽)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삶의 통제권도 없다. 그러니 여가도 없다. 세월과 더불어 나이를 먹는데, 나이의 침범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면서도 끈질기다. 나이란 “우리 주변과 우리 내부를 관통하며 짜인 그물”(로버트 그루딘, 《당신의 시간을 위한 철학》, 174쪽)이다. 그 그물에 걸리면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살다가 문득 늙어가는 자신과 마주친다. 늙는다는 것은 시간과 인생의 가능성이 축소된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젊음은 소리 없이 시간 속으로 확장되는 반면, 우리의 노년은 거꾸로 축소된다.”(로버트 그루딘, 앞의 책, 171쪽) 누구에게나 사는 일은 버겁다. 시인도 그 버거움 속에서 허우적이다가 제 곁에서 고사목 같이 늙어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놀란다. 그리고 자신의 삶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직관한다.
노경은 인생이란 연극의 종막이다. 사람은 노경에 이르러서 생명의 마지막 변화를 맞는다. 등뼈가 굽고, 육체는 주름이 가득한 채 시들며, 여행들은 조용히 끝난다. 뇌가 짜낸 기억의 태피스트리는 방대하지만 이제 그것을 다 챙기지 못한다. 기억은 단속적으로 끊어지며 끊어진 것들의 이음새는 헐겁다. 기억의 힘보다 망각의 힘이 더 세지는 것은 늙어간다는 유력한 징표다. 노화는 “점점 빛이 어두워지다가 이윽고 주변의 어둠과 섬세하게 합쳐지는 과정”이고, 그 뒤를 잇는 죽음은 “무한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쇠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275쪽)다. 죽음은 길게 끌고 온 인생의 파국이고 종말이지만 동시에 불가피한 노쇠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구원이자 행운이다. 시인은 새의 주검에 노모를 겹쳐본다. 노모의 뼈는 속을 비운 새의 뼈같이 약해진다. 그래서 “사소한 동작에도 분질러지고 바스라져/툭하면 깁스 신세다 얼마 전엔/잇몸뼈까지 도려냈다”. 세상 떠날 때를 앞둔 노모는 비우고 바스라지고 도려내며 죽음을 예비한다. 점점 더 새를 닮아가는 노모와 함께 사는 일은 애련하다.
나는 손세실리아 시인의 개인적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시에 따르면, 시인과 어머니 사이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다. 시인은 어머니와 인연을 끊으려고 멀리 달아난 적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시인과 어머니는 화해한다. 시인의 삶은 그 어머니와 화해에 이르는 도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시가 곧 인생이다. 인생은 “소심함과 머뭇거림과 뒷걸음질/미주알고주알과 하찮음과 오지랖”(〈내 시의 출처〉)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일이고, 동시에 “담대하고 장엄하고 매혹적인”(〈파일럿〉)이다. 죽음은 인생이 펼친 그 모든 것을 닫는 일이고, 결국 인생이란 노역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시인은 날마다 새처럼 나는 연습을 하는 노모를 바라본다. 그 눈길에 담긴 것은 “기필코 날고야 말겠다는 듯” 하루하루 새를 닮아가는 노모를 향한 동병상련이다![장석주 시인]
[ 출처 - 손세실리아 검색해서 나온 자료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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