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슨 호 사건
가고시마 만,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의 상선 ‘모리슨 호’(Morrison)에 대해 사쓰마 번 우라가 봉행이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포격을 했다. (에도 만에 포격을 명령받은 것은 오다와라 번 그리고 가와고에 번이다.)
그러나 이 모리슨 호에는 마카오에서 보호하고 있던 일본인 표류민 오토키치, 쇼조, 주사부로 등 7명이 타고 있으며, 모리슨 호는 이 일본인 표류민 송환과 통상, 포교를 위해 내항했던 것이 1 년 후에 나타나 이국선 타격령에 대한 비판이 강해졌다.
또한 모리슨 호는 비무장이었으며, 당시는 영국 군함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이국선 타격령이 제정되어 있었다.
나중에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한 와타나베 카잔, 《무진몽물어》(戊戌夢物語, 무진년 꿈 같은 얘기)를 저술한 다카노 쇼에이 등이 막부의 대외 정책을 비판한 혐의로 체포되는 ‘반샤의 옥’이 일어난다
[이국선 타격령]
이국선 타격령(異国船打払令)은 에도 막부가 1825년(분세이 8년)에 발표했다 외국선 추방령이다. 무조건 타격령(無二念打払令), 외국 선박 타격령(外国船打払令), 분세이 타격령(文政の打払令)이라고도 한다.
개요
1808년 10월(분카 5년)에 일어난 페이톤 호 사건, 1824년 오쓰와 사건(大津浜事件)과 보물섬 사건[1]으로 인해 발령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같은 해 1824년에 발생한 미토 번 어민들이 몇 년 전부터 초여름 경, 앞바다에서 조어를 하고 있는 서양 포경선의 선원들과 물물교환을 한 일이 발각되어 300여명이 조사를 받았다 사건의 중요한 동기로 서양인과 일본 백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짙게 가지고 있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1808년 페이톤 호 사건과 1824년 오쓰와 사건 사이에 영국은 열심히 개국을 시도했다. 1816년에는 류큐에 통상을 요구하여 1817년부터 1822년까지 우라가에 여러 번 배를 보내기도 했었다.
타격령이 내리진 1825년은 잉글랜드 은행으로 인해 유럽을 삼켜 공황이 일어났다. 이 3년 후에는 시볼트 사건이 일어났다.
내용[편집]
일본 해안에 접근하는 외국 선박은 발견 즉시 포격하여 쫓아보낸다. 또한 상륙한 외국인에 대해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일본인 표류 어민 오토키치, 쇼조, 주사부로 등 7명을 귀환시키려고 온 미국 상선 모리슨 호를 영국 군함으로 오인하고 포격한 모리슨 호 사건이 발발하자 일본인도 이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아편 전쟁에서 대국 청나라가 참패했다는 정보로 막부는 서양 군사력의 위력을 인식하고 1842년(텐포 13년)에는 이국선 타격령을 폐지하고 조난당한 선박에 한하여 보급을 인정한다는 신수급여령(薪水給与令)을 발령하였고, 분카의 신수급여령 수준으로 복원되었다.[2016. 5. 25]
[출처]정보- 책
1권/ 수집- 한국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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