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에 제주에서 발생한 4,3사건을 배경으로 작가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
그동안 작품에 대하여 알고는 있었으나 직접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 들으면서 놀란 것은
"순이 삼촌"이 남자가 아닌 여자란 사실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그런지
전문적인 해설 자료가 많아 이들로 대체.
현기영(1941~) <순이삼촌>(1978, 『창작과 비평』)
제목 |
1949년 마을 소각 당시의 상처를 잊지 못하며 살아가다 결국 자살을 하고 만 순이삼촌의 이야기. 순이삼촌으로 대표되는 당시 제주도민들의 고통. |
인물 |
나 : 마을 소각 당시 7세, 고향을 생각하면 1949년의 일이 떠올라 괴로워함 순이삼촌 : 나의 먼 친척, 26세 때 마을 소각으로 인해 두 아이와 남편을 잃고 홀어미니가 됨 , 당시의 일로 괴로워하다 결국 56의 나이에 자살함 길수 : 나의 사촌형 한 살 차이 귤밭을 일굼 고모부 : 도청 주사, 큰 밀감밭의 주인, 이북출신, 서북청년출신 할아버지 : 1949년 군인에 의해 죽음 아버지 : 공비와 군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일본으로 망명. |
서술자 |
1인칭시점 |
배경 |
제주도, 12월 1949 - 1970년대 |
사건 |
1949 마을 소각 - 함덕으로 옮겨져 조사를 받고 힘겹게 살아감 - 다시 마을로 돌아와 성을 짓고 성을 지킴 - 공비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자 마을에 집을 짓고 살아감 - 30년이 지났지만 순이삼촌은 당시의 고통을 잊지 못하고 신경 쇠약에 시달림 - 나의 집에서 일할 때 이상행동을 보였던 순이 삼촌 - 결국 서울에서 내려온 뒤 얼마되지 않아 자살함 - 현재 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일을 떠올리는 나, 친척들 |
줄거리 |
▶8년 만에 제주도로 향하는 나 -할머니의 탈상 이후로 고향에 간 적이 없어 8년 만임 -바쁘다는 핑계로 조부모 제사도 가지 않은 나를 가족들은 탐탁치 않게 생각할 것 -큰아버지가 가족묘지 매입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며 나를 불러 고향에 가게 됨 -나는 고향을 떠올리면 깊은 우울증, 가난밖에 떠오르지 않음. 30년 전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된 그 모습만이 떠오를 뿐 -그래서 고향을 8년 동안 외면하며 살아왔는데, 막상 고향에 가는 것은 비행기를 타고 50분이면 가능한 일이라 어리둥절함 ▶공항에서 서촌으로 가는 길 -스튜어디스에게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비행기에서 내림 -제주도 특유의 겨울 날씨를 느끼며 어린 시절의 음울한 겨울철을 떠올림 -동문 로터리에서 서촌을 경유하는 버스를 탐 -할머니들의 사투리를 들으며 사투리를 떠올려보고 제주의 풍경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림 ▶큰집에서 가족들과 인사하는 나 -인사할 만한 친척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음, 친척들을 대하며 8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을 실감함 -어른들의 책망을 듣고 그들에게 돈을 건넴 , 고모부는 돈을 받으며 나에게 한 마디 함(돈으로 무마하려 하는 것이냐) ▶순이삼촌의 죽음 -가족 장지 매입에 대한 의논을 끝낸 후 순이 삼촌에 대해 묻고 큰아버지는 순이삼촌이 죽었음을 알림 -순이삼촌은 홀로 살았기에 순이삼촌이 죽은 날짜도 명확하지가 않음 -집을 나간 순이삼촌이 며칠 간 돌아오지 않자 큰집 식구들이 걱정하여 순이 삼촌의 딸, 사위에게 연락하였고 그들이 순이 삼촌을 찾아 다님 -국민학교 근처 일주로도로변 밭에서 순이삼촌은 꿩약 싸이나를 먹고 죽어있었음 -순이 삼촌의 죽음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 : 큰아버지(순이삼촌이 누운 자리만 눈이 녹아 있던 것을 보고 그 땅에서 죽은 것이 운이 틔인 것이라고 생각), 큰당숙어른(양자를 들이지 않아 자손이 없는 것을 애석해 함), 나(자신의 집에서 내려간 뒤 삼촌이 죽은 것에 대해 가책, 후회를 느낌) ▶나의 집에 머물렀던 순이삼촌 -아내가 의상실 일에 집중하느라 밥 해줄 사람이 필요해 순이삼촌이 나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됨 -순이삼촌은 자신이 밥 많이 먹는 식모로 소문이 났다며 속상해함 -나는 그 말을 듣고 분통이 터져 아내와 말타툼을 함(나는 아내가 순이삼촌이 제주도출신이라. 시골 사람이라 무시한다고 생각함) -그후 나는 고향에 대한 선입견을 대폭 수정하기로 함(사투리를 쓰기 시작하고 아들에게도 사투리를 알려주고) -순이삼촌은 그후에도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아내와 쌀때문에 말다툼을 벌임 -나는 순이삼촌이 그런 일로 상심하는 것을 안쓰러워하며 그를 위로하나 삼촌은 쌀이 빨리 떨어진 것이 밥을 잘못해서라고 생각하고 된밥을 지어내려 엄청나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쌀을 얼마나 먹었는지 수시로 체크함 -그리고 계속되는 순이삼촌의 이상행동(사진을 찍어주니 돈을 내겠다고 우기기, 토마토 주스 먹지 않기, 생선이 부스러진 이유 해명하기 등) -시골에 있는 딸이 순이삼촌보고 내려오라고 했으나 삼촌은 내려가지 않음 -시골에서 사위가 올라와 순이삼촌을 데러가려 하나 순이삼촌은 이를 거절함. 이에 나는 순이삼촌이 우리 가족과 오해를 풀기 위해 안 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고마움을 느낌 -사위에 의해 밝혀진 순이삼촌의 속내 : 심한 신경쇠약 환자, 환청 증세 -순이 삼촌이 신경쇠약에 걸린 이유 : 이웃집 콩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순이삼촌. 파출소에 가서 결백을 밝히라고 했으나 삼촌이 이를 거부하고 삼촌은 콩 도둑으로 소문이 남. 삼촌은 1949년 마을소각 이후로 군인, 순경을 피하는 증세가 있어서 파출소에 가지 못한것인데.. 콩 사건 이후로 순이삼촌은 남들이 자기를 흉본다는 결벽증에 시달리고 환청까지 들었으며 상군해녀였던 삼촌은 물질까지 그만두게 됐음 -사위가 내려간 뒤 세달 가까이 나의 집에 머물던 순이 삼촌은 그 후 시골에 내려가 자살한 것 ▶어린 시절 음력 섣달 여드렛날의 제사를 떠올리는 나 -싸락눈이 창호지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하는 나. 그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산디쌀을 떠올림 -어린시절, 제삿상은 보잘 것 없었으나 밥만은 산디쌀밥을 지었었음. -할아버지의 제삿날에 다른 집도 제사를 지냈었음.(1949년 4.3 사건으로 많은 이가 살해당함) -나는 돼지 오줌통으로 축구나 하며 곡소리도 듣기 싫고 소각 당시 이야기도 듣기 싫었었음. -파제 후 퇴줏그릇의 밥을 먹으러 오는 까마귀도 싫었었음. 어른들을 잡으러 왔던 서청 순경들의 옷빛, 시체를 파먹던 모습이 떠올랐기때문 ▶과거 회상 : 1949년 마을 소각. 음력 섣달 여드렛날 -1948년 어머니는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군인, 공산당을 피해 마룻장 밑에 숨어 살다가 일본으로 밀향. 고아가 된 나는 큰집에 얹혀살아감 -유달리 추웠던 그 날 아낙내들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음 -군인들이 연설을 들으러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두 집합하라고 함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음 -군인 가족, 순경가족, 공무원가족, 대동청년단과 국민회 간부 가족들만 따로 분류함,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마을은 불에 탐 -불에 탄 마을을 보러 사람들이 움직이자 군인은 노인을 총으로 쏘고 사람들을 위협함 ,군인은 영배 각시도 총으로 쏘며 사람들을 통제함 -길수, 나는 사람들 틈에서 우왕자왕하다가 겨우 할머니의 곁으로 감. 사람들도 피하려했으나 대창에 쫓김. 사람들은 교문 밖으로 떠밀려 감 -교문 밖에서는 사격 소리가 들리고 남은 사람들은 엉엉 욺. 타고 있는 마을에서는 불에 타 죽는 소, 말 울음 소리가 들림 -군인들은 일주도로변 밭에 사람들을 밀어붙이고 사살함 오백여명을. 사람들을 죽이던 중 대대장 차가 도착해 총살 중지 명령을 내림 -고모부는 중대장이 사람들, 물자를 다 비우라는 명령을 물자, 사람들을 전부 소각하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여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설명. 그러나 친척이 이에 반박하자 고모부는 사람들을 옮긴 후에도 남아 있는 공비 동조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은 있었으나, 이 부락은 그런 것도 없이 사살한 것이 이상하다고 말함 -대체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일까? : 5.10선거 때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 선거를 보이콧했었음. 그로 인해 부락이 공산주의 마을로 인식됐던 것, 그 후 마을 남자들이 사라지자 다들 공비가 된 것으로 오해하고 마을을 소각한 것 -왜 남자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나 :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입산하지 않는 자들을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순경들이 도피자 검속을 해대는 통에 마을 남자들은 밤낮으로 숨어지낼 수밖에 없었음. 이로 인해 나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밀항해버렸고. 어떤 이들은 전라도로 피신했고 대를 잇기 위해 사내 아이를 친척 집으로 보내기도 했었음. 그러나 대다수의 남자들은 고향에 남아 고통받다가 한사란 아래 목장으로 올라가 마른 냇가의 굴속에 피신함. -피난민들의 생활 : 불도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고 나무때기에서 잠을 자고 썩은 말고기를 주워 먹는 등 힘겹게 살아감.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얼어죽는 사람이 생기기도 함. ▶서청을 변호하는 고모부 -이 사건을 외부로 알려야 하는가, 알리지 말아야 하는가로 논쟁하는 친척들 -고모부는 이미 지나간 일을 왜 들추냐며 화를 냄 -서청의 악행(아이들에게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 형이 숨은 곳을 알아내기, 여자들의 옷을 벗기고 눈요기하기 등) -도피자 가족들 중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청과 정략결혼을 하곤 했었는데, 할아버지도 고모와 고모부를 결혼시켰음. 대다수는 육지로 떠나버렸으나 고모부만은 다시 제주로 돌아왔던 것. -고모부는 이북사투리로 서청을 변호함(빨갱이가 싫어 남북했다, 남북하고 보니 특히 제주도에 빨갱이가 많았다) -고모부는 다시 제주말을 쓰며 서청도 잘못했지만 당시 모든 육지인들이 제주 사람들을 나쁘게 봤었다며 항변. ▶박주임에 대하여 -함덕 지서주임이었던 박주임은 부하들에게 명령 없이 도피자들을 총살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육지인들이 마음대로 총살했다는 큰당숙어른 -작은당숙어른은 그것이 아니라며 박주임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함. 박주임이 도리어 서청보다 악독하게 굴었다고 함. -그러나 인수 아방에 의하면 박주임은 도피자들을 몰래 놓아주곤 했다고 함 -사건 후 이년쯤 뒤 부락에 온 박주임은 치도곤을 당함(휴가를 맞아 제주에 와 있던 감나무집 청년 인구가 우리 아빠, 형을 살려내라고 작대기를 휘두름) ▶마을 소각 후 청년들의 삶 -초토작전을 반성하게 된 전투사령부는 선무공작을 펴 한사산 동굴 미의 도피자들을 상당수 귀순시킴. -그 후 6.25가 터져 귀순자들은 자원입대함.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이북인들로 인해 당한 것을 떠올리며 누구보다 다 열심히 싸움. ▶그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발끈하는 나 -고모부에게 당시 빨갱이가 얼마나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묻는 나. 고보무는 300명쯤이라고 대답하고 이에 나는 화를 냄 -비무장공비가 아니라 피난민이었을 뿐이라고 항변, 직작 선무공작을 쓰지 않은 것을 비판. -우리마을뿐 아니라 제주 출신들이 그 당시 많이 죽었었음. 나는 이를 죄악이라고 생각함. 그러나 이 죄악이 30년 간 고발된 적이 없는 것이 원통함. 제주 사람들은 합동위령제나 떳떳하게 올리고 싶은 것이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사람들이 권력 주변에 있을 것을 염려하여 아무도 이 일을 고발하지 못함. ▶마을 소각 후 성을 만들며 살아감 -마을이 소각되던 날 사람들은 그대로 학교에 남아 울며 밤을 지샘 -큰아버지는 군인이 마을에서 빠져 나가자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 할아버지를 보러 감. 죽어있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소뿔에 찔려 운동장에 오지 못했음. 병풍을 들고 나오다가 감나무 밑에서 총을 맞고 돌아가심) -순이삼촌은 홀로 살아남아 사람들과 말도 섞지 않고 울지도 않고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샘 -다음날 마을로 돌아가 남은 식량을 나누어 먹고, 사람들은 함덕으로 감. 함덕에서 함덕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취조를 받고 두 달 동안 집도 없이 가난하게 살다가 향리로 돌아옴 -마을로 돌아와 시체를 처리하고 망쳐버린 보리농사를 처리함. 대충 움막을 짓고 돼지사료를 먹으며 살아감. -사람들은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성을 쌓음(공비들을 막는다는 목적), 아침부터 저녁까지 굶주리며 두 달동안 성을 쌓았고, 성을 쌓은 후에도 밤마다 성을 지킴. -순이삼촌은 임신한 몸으로 성을 쌓았고 만삭이었음에도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함 -이런 생활을 일 년 넘게 계속했으나 공비들은 약탈하러 오지 않음. 결국 사람들은 성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음. ▶살아남은 이들의 후유증 -아이들은 일주도로변의 옴팡밭에서 탄피를 주워다 화약총을 만들곤 했는데, 어른들은 이에 기겁함 -그 밭에서 고구마 농장은 풍년.(시체의 거름) -순이삼촌은 두 오누이를 묻고, 아이를 데리고 김을 멤.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 녹슨 납탄환이 걸림 삼십년 동안 끊임없이 출토됨. -순이삼촌은 30년이 지났지만 오누이가 묻힌, 흰뼈와 납탄환이 출토되는 그 밭에서 벗어나지 못함. -이미 순이삼촌은 30년 전 그 날 죽었던 것임. |
단어 |
섣달 :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끝 달 싸락눈 : 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 발복하다 : 운이 틔어서 복이 닥치다. 된밥 : 물기가 적게 지은 밥 곤밥 : 쌀밥의 방언 치도곤 : 몹시 혼남, 또는 그런 곤욕 |
[출처:cafe.daum.net/songheony/3YaU/1159 김준&송헌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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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현기영]
"4·3은 나의 숙명…세상의 모든 억압은 나의 적"
문학을 숙명처럼 생각해온 나는 문학 이외의 다른 삶을 살아볼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참혹한 유년을 겪은 자는 어려서 문학을 만나면 곧장 그 길로 들어서기 쉽다는데, 아마 내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나 보다.
반세기 전 내 고향 제주를 가공할 재앙불로 초토화시킨 4ㆍ3의 대참사는 어린 나의 뇌리에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내 몸을 얽어맨 채 좀처럼 떠나지 않던 우울증과 지금의 이 나이에도 이따금씩 찾아오곤 하는 실어증도 그 참혹한 유년에서 기인한 것이다.
내가 술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래서 지금은 빼도 박도 못할 모주꾼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장 된장국에 빠질 것 같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비 개인 듯 사물이 밝게 보이고, 실어증의 굳은 혀도 나긋나긋하게 풀어져 기분좋게 다변스러워지는데, 어떻게 음주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술의 공덕인지는 몰라도, 이제 나는 매력적인 시琯涌“獨?볼 수 있는 우울증 - 멜랑콜리의 우아한 분위기를 오히려 부러워할 정도로 낙천적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나에게 덮씌워진 그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꽤나 애를 썼던 일들이 생각나는데, 아마도 우울증이나 슬픔이 성장에 해롭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혼자 있으면 우울해지기 일쑤여서, 늘 동무들 가운데 끼어 있기를 좋아했다.
내면이 억압되어 말을 더듬었던 동무들과 얘기하며 놀 때면 주로 듣는 편이었지만, 몸 부딪치며 뛰어 놀 때면 말 더듬는 답답함을 벌충하려는듯이 천방지축 그야말로 ‘천둥번개에 개 뛰기’로 날뛰곤 했다.
충동적이고 난폭한 몸놀림 때문에 목숨을 잃을뻔한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생채기 흔적이 지금도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뉘가 있는 밥을 먹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혹시 돌을 씹을까 봐서 떠듬떠듬 조심해서 입을 놀려야 하는데, 그때의 답답함이 바로 말더듬이의 답답함일 것이다.
어떻게든 이 답답한 어눌함에서 벗어나 보려고 책을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혓바닥과 턱 운동도 해보곤 했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중1 때는 학교에서 주최하는 이야기 대회에 그 오죽잖은 언변을 가지고 나가는 만용을 부렸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1 때 처음 만난 문학은 나에게 지옥에서 만난 부처님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에 글을 택하기로 작심했다.
문학은 내 기질에 잘 맞았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내면의 억압 현상 때문이었는지, 나는 권위주의적인 어른들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두려워했고, 두려운 만큼 증오했다.
학교 교사들은 물론 아버지도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이었는데, 고2ㆍ고3 때는 각각 교련 교사와 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의 억압적 권위에 도전하는 한판의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억압된 내면의 비정상적인 폭발일 수도 있지만, 집안 내림의 격렬한 기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기질 면에서 아버지를 많이 닮았고, 할아버지는 한 술 더 떠 일제 때 일본 오사카(大阪)의 노동판에서 왜놈들과 싸워 이긴 싸움꾼이었다.
평소에는 얌전히 처신하다가도 간질 발작처럼, 본능이 시키는 것처럼, 문득 문득 고개를 쳐드는 사나운 격정, 저돌적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 그러한 나 자신이 나는 얼마나 두려웠던가.
이 저돌적 파괴 본능은 남을 공격하지 못하면, 그 대신 자신을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고3 때 있었던 두 번의 자살 기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억압적인 가부장 밑에서 자란 아이는 나중에 반항아가 되기 쉽다고 한다.
아무튼 문단 데뷔 직후 나는 유신 정권의 폭정 속에서 제주 4ㆍ3을 소재로 한 세 편의 중단편 소설들을 잇달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나의 못된 성미가 제법 옳게 쓰여진 단 한 번의 예일 것이다.
이렇게 권위주의를 싫어하고 예속을 싫어하다 보니, 내 기질에 맞는 것은 결국 문학밖에 없었다. 문학은 자유 혹은 해방과 같은 말이 아닌가.
말하자면, 나는 억압된 나의 내면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문학을 택한 셈이었다.
비록 성의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의 내면 정서가 억압된 섹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면, 그 성을 해방시켜 주어야 옳지 않은가.
나는 성을 다룬 시ㆍ소설이 미학적으로 옳기만 하다면, 공적 영역에서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제주도민의 대다수가 앓고 있는 집단 콤플렉스인 4ㆍ3은 나의 내면 정서의 억압이기도 했으므로, 그 억압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 문학 정신일진대, 4ㆍ3의 억압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풀지 않고서는 문학적으로 단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4ㆍ3의 슬픔은 순수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미롭기조차 한 애잔한 슬픔이 아니라, 피와 비명과 떼주검의 무서운 고통의 슬픔이다.
도전적인 그 세 편의 소설은 즉각 유신 정권에 의해 보복을 당했다. 만약 그 모진 매질의 고문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곧 경쾌하게 4ㆍ3 소재를 떠나 순수문학의 지경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 고문자들은 저승의 염라대왕처럼 무서웠기 때문에, 내가 죽어 저승에 가면 혹시 염라대왕이 생시의 그 고문자들처럼 왜 그런 글을 썼느냐고 추궁하면서 고문하지나 않을까 하는 착각이 생기곤 한다.
유신 권력의 핵이 암살당할 무렵에 그러한 필화를 입었던 나는 그 이듬해까지 포함해서 거의 1년 반 동안 내내 울분과 절망 속에서 펜대를 꺾은 채 술로 허송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한 여인이 나타나서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나자빠져 있는 나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무섭게 야단치는 생생한 꿈을 꾸었다.
그 여인은 내가 작품 속에서 창조한 순이 삼촌이었다. 그때 나는 가공의 인물인 그 불행한 여인이 나의 분신으로서 나의 내면에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내가 소설 쓰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변신의 매력이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이라는 하나의 아이덴티티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자기 자신 속에 가지려 하는 자이다.
소설가는 변신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작중인물들을 창조해 낸다. 작중 인물은 작가의 분신이면서 동시에 별개의 존재이기도 하다.
아무튼, 자기 자신의 삶 외에도 다른 여러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소설가의 특권인데, 나 또한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
예컨대 나의 내부에 거주하는 캐릭터들 중에는 노예 신분에서 용약 민중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프랑스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이재수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의 궐기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늘 기분이 좋다.
“소인이 비록 미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옳을 의(義)’ 자를 위해 죽지도 못합니까? 외적과 난신적자를 토멸하는 데 어찌 반상(班常)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는 먼 과거 속의 인물들은 나름대로 만들어 봤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대 소비 사회의 소비자로서의 인물은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
소비 사회의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환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인물로 변신해 보는 것이 내 꿈인데, 그게 나로서는 여간 어렵지 않다.
작가의 변신은 독자의 변신 욕구에 부응한 것이다. 독자들은 감정 이입을 통해 작중 인물과 동일시함으로써 변신을 꾀한다.
그리고 독자가 작중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독자의 천박한 취향에 영합한 베스트셀러 통속문학이,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순수문학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세상이다.
통속문학이 비판되지 않으면, 사회의 가치 체계는 전도되게 마련이다. 한국인들은 똑같은 책을 보고, 똑같은 화면을 보고, 똑 같은 사고를 한다고 말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베스트셀러들은 대개 상투적인 이야기에 가짜 해결, 혹은 너무도 손쉬운 해결, 상처에 마약 바르기 식의 해결이기 쉽다. 회의하고 질문하는 문학, 요컨대 사고하는 문학이 너무도 드물다.
지금의 소비 사회는 인간을 끝없는 소비 욕망의 포로로 만들어 놓고, 늘 새로운 감각, 새로운 쾌락을 좇아 다니게 한다.
상품에 저항하여 인간에게 소비 대신 사고를 되돌려 주는 문학,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본래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문학을 나는 꿈꾼다.
제주도 북촌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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