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무라카미 하루키란 일본 작가에 대해서는 "해변의 카프카"란 작품을 쓴 작가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읽기를 끝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간을 꼭 내서 " 해변의 카프카"란 작품부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
책은 읽는 내내 재미가 있었다. 마지막 12장은 좀 의외의 내용이었는데 나머지 11장까지 전부 다 흥미있게 읽었다. 소설가로서의 무라카미의 생활 패턴이라든가 글을 쓰게 된 동기, 쓰는 방식 등. 늦은 나이에 신변잡기라도 끄적거리고 있는 나로서는 많은 참고가 되었다.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책 말미 '후기'에 요약 정리되어 있는데 이 책을 읽은 소감을 정리한다면 이렇게 써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래는 이 책을 소개한 출판사와 독자의 소감 글]
[책 소개]무라카미 하루키의 성실하고도 강력한 사고의 궤적.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루키스트’라는 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평론가들의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사회적으로 무책임’, ‘제국주의적’등 강도 높은 비난 속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그가 1979년 등단 이후 최초로 자신의 작가론적, 문단론적, 문예론적 견해를 풀어놓은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출간했다. 이따금 인터뷰나 에세이를 통해 언급했던 글쓰기와 그 현장을 비롯하여, 이를 뒷받침하는 문학을 향한 하루키의 생각을 한 권으로 정리했다.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 저서(총 252권)
- 처음으로 소설을 쓴 것은 29살때였다. 첫 소설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는데, 197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히로시마 카프와의 경기를 도쿄 진구구장에서 보던 중, 외국인 선수였던 데이브 힐튼 선수가 2루타를 치는 순간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1949년 일본 교토부 교토시에서 태어나 효고현 아시야시에서 자랐다. 국어교사이자 다독가였던 양친의 영향으로 많은 책을 읽고 일본 고전문학에 대해 들으며 자랐으나, 일본적인 것보다는 서구문학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중학교 시절에 러시아문학과 재즈에 탐닉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 손에 사전을 들고 커트 보너거트나 리차드 브라우티건과 같은 미국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 1968년 와세다대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해 격렬한 60년대 전공투 세대로서 학원분쟁을 체험한다. 1971년 학생 신분으로 같은 학부의 요코(陽子)와 결혼,1974년 째즈 다방 '피터 캣'을 고쿠분지에 연다.「미국영화에 있어서의 여행의 사상」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7년간 다녔던 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했으며 이 작품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 1982년 장편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제4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했고, , 전혀 다른 두 편의 이야기를 장마다 번갈아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1985년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7년 『노르웨이의 숲』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문학사에 굵은 한 획을 긋게 된다.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들의 한없는 상실과 재생을 애절함과 감동으로 담담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전 세계 누적 1000만 부 이상을 기록하며 '무라카미 붐'을 일으켰다. 또한 1997년에는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취재한 특이한 르포집 『언더그라운드』를 발표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그에 대한 평론집이 일본에서만 수십권에 이르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단정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을 통틀어 그는 현대사회의 소외된 군상들의 고독을 '...
[목차]
제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제3회 문학상에 대해서
제4회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제5회 자, 뭘 써야 할까?
제6회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장편소설 쓰기
제7회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
제8회 학교에 대해서
제9회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제10회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제11회 해외에 나간다. 새로운 프런티어
제12회 이야기가 있는 곳ㆍ가와이 하야오 선생님의 추억무라카미 하루키는 21세기 소설을 발명했다.
_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출판사 서평]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로 살아온 삼십오 년의
작가론적 문단론적 문예론적 인생론적 집대성
이 책에 담긴 일련의 원고를 언제쯤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확실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오륙 년 전이었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이렇게 소설가로서 소설을 써나가는 상황에 대해, 한자리에 정리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어서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 그런 글을 조금씩 단편적으로 테마별로 모아두었다. 즉 이건 출판사에서 의뢰를 받아 쓴 글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말하자면 나 자신을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다.
_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후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오해받아온 작가도 없을 것이다. ‘하루키스트’라는 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평론가들에게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사회적으로 무책임’ ‘제국주의적’ 등 강도 높은 비난 속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그가 1979년 등단 이후 최초로 자신의 작가론적, 문단론적, 문예론적 견해를 청중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소박한 형식으로 풀어놓았다. 이따금 인터뷰나 에세이를 통해 언급했던 글쓰기와 그 현장을 비롯하여, 이를 뒷받침하는 문학을 향한, 세계를 향한 생각을 총괄하여 한 권에 정리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문인이라는 구태의연한 허상을 벗어던지고 그야말로 생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대해 말한다. 삼십오 년 동안 지속적으로 소설을 써내기 위한 일상적인 실천, 건전한 야심을 품고 해외시장에 도전한 개척자로서의 모험과 성공, 소설로 먹고살기 위해 작가가 자신의 생업에 대하여 지녀야 할 자질과 태도를 열두 개의 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문단 권력의 거센 공격, 세상에 난무하는 문학에의 오해에 대한 친절한 설명서이자 소설가 및 소설가 지망생이 국내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힌트가 가득 담긴, 매우 피지컬한 문학 경영전략서가 될 것이다. 아울러 직업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삼십오 년을 더듬어가노라면 그가 하는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와 닿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편 일본 발간 당시 가장 먼저 화제가 되었던 것은 책의 이례적인 판매 방식이었다. 초판 10만 부 중 9만 부를 일본 최대의 오프라인 서점 기노쿠니야에서 매입하여 일부는 자사 매장에서 판매하고 나머지는 다른 서점에 공급했는데, 요컨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구하려면 인터넷 서점보다는 오프라인 서점을 찾아야 했다. 이는 인터넷 서점에의 대항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출판 유통 시스템, 즉 출판사가 중개업체를 통해 전국의 서점에 신간을 배본한다는,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시스템의 개혁을 위한 시도였다고 한다.
제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그만그만한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다양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됩니다. 이건 갖춰진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고,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갖춰진 사람도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고생 해가며 습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이따금 원고지와 오래도록 애용해온 몽블랑 굵은 만년필이 그리워지지만). 그리고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苦役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3회 문학상에 대해서
물론 이 두 사람은 과격한 예외인지도 모릅니다. 독자적인 스타일과 일관된 반골 정신으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혹은 태도로서 표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하나는,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그 수의 많고 적음은 제쳐두고―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입니다. 그 두 가지 확실한 실감만 있다면 작가에게 상이라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추인追認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4회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내 생각에는(이라고 할까, 그렇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런 자유롭고 내추럴한 감각이야말로 내가 쓰는 소설의 밑바탕에 자리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동력이었습니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엔진입니다. 다양한 표현 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성하고 자발적인 기쁨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 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제5회 자, 뭘 써야 할까?
다시 영화 얘기인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에서 E. T.가 창고의 잡동사니를 쓸어 모아 그걸로 즉석 통신 장치를 만들어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우산이라든가 전기스탠드라든가 식기라든가 전축 등등, 한참 오래전에 본 영화라 자세한 건 잊어버렸지만 그 자리에 있던 가정용품을 이것저것 적당히 조합해 척척 만듭니다. 즉석에서 척척 만들었어도 실은 몇천 광년 떨어진 모성母星과 연락이 가능한 본격적인 통신기입니다.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보고 크게 감탄했었는데, 뛰어난 소설이란 분명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재료 그 자체의 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매직magic’입니다. 일상적이고 소박한 재료밖에 없더라도, 간단하고 평이한 말밖에 쓰지 않더라도, 만일 거기에 매직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것에서도 놀랍도록 세련된 장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우리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창고’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매직을 구사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실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E. T.가 훌쩍 찾아와 “미안하지만 너의 창고 속 물건 몇 가지를 쓰게 해주겠니?”라고 말했을 때, “좋아, 뭐든 마음대로 써”라고 덜컹 문을 열어 보여줄 만한 ‘잡동사니’의 재고를 상비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제6회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장편소설 쓰기
즉 중요한 것은 뜯어고친다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작가가 ‘이곳을 좀 더 잘 고쳐보자’라고 결심하고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손질한다, 라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어떻게 수정하느냐’라는 방향성 따위는 오히려 이차적인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경우, 작가의 본능이나 직감은 논리성이 아니라 결심에 의해 좀 더 유효하게 이끌려 나옵니다. 숲을 몽둥이로 두드려 안에 숨은 새를 날아오르게 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떤 몽둥이로 두드리든, 어떤 식으로 두드리든, 그 결과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아무튼 새를 날아오르게 하면 그걸로 좋은 것입니다. 새들의 움직임의 역동성이 고정되어가던 시야를 뒤흔듭니다. 그것이 내 의견입니다. 뭐, 상당히 난폭한 의견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고쳐 쓰는 데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화가 나든 말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참고하며 고쳐나갑니다. 조언은 중요합니다. 장편소설을 다 쓰고 난 작가는 대부분 흥분 상태로 뇌가 달아올라 반쯤 제정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정신인 사람은 장편소설 같은 건 일단 쓸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닌 것 자체에는 딱히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에게 제정신인 인간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제7회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즉 당신이 (안타깝지만) 희유의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많든 적든 한정된) 재능을 시간을 들여 조금이라도 높이고 힘찬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내 이론은 나름대로 유효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제8회 학교에 대해서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善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제9회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언젠가 나는 레즈비언 성향의 스무 살 여성이 될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나는 서른 살의 실업 중인 하우스 허즈번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는 그때그때 주어진 구두를 신고 거기에 내 발 사이즈를 맞춰 행동에 들어갑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발 사이즈에 구두를 맞추는 게 아니라 구두 사이즈에 발을 맞추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일단 안 될 일이지만 소설가로 오래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건 가공의 일이니까. 그리고 가공의 일이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은 것이니까. 꿈이란―그것이 자면서 꾸는 꿈이건 깨어서 꾸는 꿈이건―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나는 기본적으로 그 흐름에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한, 온갖 ‘안 될 일’이 자유롭게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 쓰는 일의 큰 기쁨입니다.
제10회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물론 세간에는 남성 독자 대상의 책, 여성 독자 대상의 책이 있어도 좋겠지요.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내가 쓴 책이 남녀 구별 없이 독자의 마음을 환기하고 감동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인끼리, 남녀 그룹이, 혹은 부부가, 부모와 자식이, 내 책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눠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겠지요. 소설이란, 스토리란 남녀와 세대 간의 대립이나 그 밖에 다양한 스테레오타입의 대립을 누그러뜨리고 그 날카로운 칼끝을 완화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기능입니다. 내가 쓴 소설이 이 세계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포지티브한 역할을 해주기를 나 혼자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제11회 해외에 나간다. 새로운 프런티어
스토리란 본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변동하는 주변 현실의 시스템을 따라잡기 위해, 혹은 거기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내적인 장소에 앉혀야 할 새로운 스토리=새로운 메타포 시스템을 필요로 합니다. 그 두 가지 시스템(현실 사회의 시스템과 메타포 시스템)을 제대로 연결하는 것에 의해, 다시 말해 주관 세계와 객관 세계를 오고 가면서 상호 간에 제대로 적응하도록 하는 것에 의해, 사람들은 불확실한 현실을 겨우겨우 받아들이고 평정심을 유지해나갈 수 있습니다. 내 소설이 제공하는 스토리의 리얼리티는 그러한 적응의 톱니바퀴로서 우연히 글로벌한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 아닌가―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실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완전히 잘못짚은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12회 이야기가 있는 곳ㆍ가와이 하야오 선생님의 추억
우리는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눴고, 하지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라고 앞에서 말씀드렸는데, 실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 내용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그곳에서 뭔가를 공유했다는 ‘물리적인 실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공유했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아마도 이야기라는 개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일상적으로 그 장소에 내려갑니다. 가와이 선생님은 임상가로서 클라이언트와 마주하면서 일상적으로 그곳에 내려갑니다. 혹은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와이 선생님과 나는 아마도 그것을 ‘임상적으로’ 서로 이해했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서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냄새로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물론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에 가까운 어떤 공감이 있었다고 나는 지금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 책속으로 추가 *
원래 분쟁이나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정말입니다) 그러한 ‘관례’ ‘문학계의 불문율’을 거스르겠다는 식의 의식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서 어렵사리 이렇게 (일단은)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나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해나가면 될 것이고 내 쪽은 내 쪽대로 해나가면 된다.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그 개략은 처음부터 상당히 확실했습니다.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기 시작하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합당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의 지금 서 있는 위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잘 보였습니다. 만일 그런 정점定點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곳곳에서 상당히 헤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_ 104~105쪽, 「제4회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_ 106쪽, 「제4회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야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분명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소설가가 예술가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가. 대체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정했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됩니다.
_ 150~151쪽, 「제6회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장편소설 쓰기」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 치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補正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혹은 승화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잘되면 그런 작용을 독자와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딱히 구체적으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도 그때 그러한 자기 정화 작용을 본능적으로 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소설이 쓰고 싶어졌던 것이겠지요.
_ 260쪽, 「제10회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책속으로
[…]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40~41쪽
야쿠르트 선두 타자는 미국에서 온 데이브 힐턴이라는 호리호리한 무명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타순 1번이었습니다. 4번은 찰리 매뉴얼입니다. 나중에 필리스의 감독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당시 그는 실로 힘세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타자여서 일본 야구팬에게는 ‘붉은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선발 투수는 분명 다카하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쿠르트의 선발은 야스다였습니다. 1회 말, 다카하시가 제1구를 던지자 힐턴은 그것을 좌중간에 깔끔하게 띄워 올려 2루타를 만들었습니다.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顯現’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45~46쪽
이따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번역 투’라는 말이 들립니다. 번역 투라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빗나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한 장 분량을 실제로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는 그 지적도 일리가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프로세스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내가 거기서 지향한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뉴트럴한neutral’, 활동성이 뛰어난 문체를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추구한 것은 ‘일본어다움을 희석시킨 일본어’ 문장 쓰기가 아니라 이른바 ‘소설 언어’ ‘순수문학 체제’ 같은 것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일본어를 채용해 나만의 자연스러운 음색으로 소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때의 나에게는 일본어란 단지 기능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51~52쪽
원래 분쟁이나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정말입니다) 그러한 ‘관례’ ‘문학계의 불문율’을 거스르겠다는 식의 의식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서 어렵사리 이렇게 (일단은)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나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해나가면 될 것이고 내 쪽은 내 쪽대로 해나가면 된다.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그 개략은 처음부터 상당히 확실했습니다.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기 시작하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합당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
후기
1979년 등단 이후 최초로 자신의 글쓰기 현장과 이를 지탱하는 문학을 향한, 세계를 향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펼쳐낸 이 책은 ‘무슨 이유로 언제부터 일본을 떠나 어떤 시행착오와 악전고투를 거치면서 세계로 향하는 길을 걸었나’, ‘학교교육과 3·11을 통해서 보는 일본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애초에 왜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선택하여 오랜 세월 동안 쇠하지 않는 창조력으로 끊임없이 쓰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만의 성실하고도 강력한 대답이 담겨있다.[독자 리뷰]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씨의 삶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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