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신문 신간 소개란에 소개된 것을 보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여 읽게 된 작품. 글쓰기를 하는 입장에서 폭력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갔을까가 궁금해서였다. 소재가 관심이 없는 분야일 경우 이런 장편을 시간 내서 읽기가 쉽지 않은데 그동안 폭력 세계에 대한 관심은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뭐 비단 나뿐이겠는가. 폭력 세계와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작품은 본문만 570여 쪽인 대작이다. 그런데 재미있게 읽히는 바람에 밤을 꼬박 새워 8시간 정도 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작품을 잘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설정이 혀를 내두르게 만들어 뒤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해지는 메세지 면에서는 재미로 읽힌다는 쪽. 순수문학 작품에서 찾게 되는 감동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냥 타임 킬링 용.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리 잘 썼을까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잘 썼다는 쪽이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구암이란 곳은 실재하는 곳은 아니다. 다만 작가가 부산에서 나고 자랐기에 해운대가 배경이 아닐까 추측은 가능하다.
이야기는 40초반 쯤 된 모자원 출신 폭력배 희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나이가 되도록 가족도 없고 집도 없이 호텔방 하나를 자기 집 삼아 기거하고 있다. 3대를 이어 폭력조직을 이끌며 구암 앞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만리장이란 호텔을 운영하는 손 영감이란 사람의 2인자 -지배인-로 있으면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역할이다. 인물 설정은 깡패지만 악한 편은 아니다. 모자원에서 같이 자란, 이제는 창녀가 되어 있는 여인을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순정파이기도 하다. 나중에는 결혼까지 한다. 반면 필요하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깡패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부산 폭력조직의 두 거목인 구암파 손 영감과 영도파 남가주 회장의, 겉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을 축으로 전개되지만 표면적으로는 그 밑에 있는 이른바 하수인들에 지나지 않는 인물들끼리 이권 문제 때문에 치고받는 설정이다. 두 거목의 손바닥 안에서 놀면서 말이다. 이런 과정에서 썩은 공무원들의 폭력조직과 유착된 내용도 나온다. 특히 경찰. 유착이 안 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겉으로는 합법을 가장하고 사업을 하고 있으니 법으로 쉽사리 없앨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결국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가 되는 것임을 말하려 하고 있는 듯하다.
자질구레하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영도파의 밀수 통로인 영도 앞바다가 비좁아 큰 배를 댈 수 없게 되자 신항을 세우려는 정부의 계획에 따라 밀수 루트를 잃게 된 영도파가 구암 앞바다를 빼앗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두 거목의 부하들끼리 얽히고설켜 죽고 죽이는 사태가 벌어지는 식으로 전개된다. 근데 이게 모두 영도파 남가주 회장이 밑그림이다. (진행 당시는 모르게 하고 나중에 밝혀지는 설정이라 작가의 작품 구성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구암파 손 영감은 이걸 알면서도 구암 앞바다는 절대 안 내준다는 마지노 선을 그어놓고 구암파가 여기까지 오면 전쟁이라는 계획을 세워놓는데 실제로 전쟁을 하게 된다. 전투대장은 당연히 주인공 희수인 것이고.
희수에게 전자오락기 사업을 하자고 한 양동이란 인물도 남가주 회장에게 포섭되어 지기 조직인 구암파를 배신하는 짓을 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두 파 싸움의 최종적인 승리는 주인공 희수와 그의 가장 강력한 적이던 천달호란 인물이 서로 공모하여 남가주 회장을 죽이면서 거머쥐게 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설정 과정이 읽는 이의 예측을 뛰어넘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혀가 절로 내둘러질 정도.
주인공 희수가 영도파에게 잡혀 죽게 되자 - 이 과정은 용강을 죽이려고 한 희수가 자기 편인 줄 알았던 털보의 배신으로 그리 된다. 이때 살인기계인 달자라는 인물이 죽는다. 털보를 자기 사람으로 알고 몇십 년을 살았는데 배신당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폭력배들 간에 의리가 있다는 건 다 거짓말이라는 걸 작가는 강조하려고 한 대목 중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작품 전편에 걸쳐 그걸 강조하고 있기는 하다. 깡패는 그저 깡패다. 의리는 무순 개뿔이라는 작가의 생각. - 이를 안 손 영감이 만리장의 명의를 희수 앞으로 해놓는 바람에 살게 된다. 소유주가 죽으면 그 건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반대파에서 절대로 못 죽이게 되어 있다는 설정이다. 소유권이 희수에게 넘어간 것을 안 영도파는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손 영감을 죽게 만든다. 손 영감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태에서 희수에게 '같은 적이지만 남가주 회장보다는 천달호와 공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면서 천달호와 손을 잡고 남가주 회장을 죽이라'고 코치한다.
엔딩은 주인공 희수가 만리장 호텔 사장으로 취임하기 위하여 취임식장으로 가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이때는 이미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아들이 죽은 뒤 떠나버린 뒤이다. 묵숨을 걸고 이권 다툼을 벌여 승리했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다. 허무를 강조하려는 작가의 뜻이 배어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족:책 제목 "뜨거운 피"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혹시 깡패들의 피가?]
[보충 자료: 2022. 6. 26 - 영화 때문인지 검색하는 분이 많군요.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아래 작품도 추천합니다.]
[아래는 이 작품을 소개해 놓은 글]
한국형 누아르의 쌉싸름하면서도 찐득한 맛이 살아 있는, 간절한 남자들의 삶!
2006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캐비닛》, 2016 프랑스 추리문학대상 후보에 오른 소설 《설계자들》의 저자 김언수의 세 번째 장편소설 『뜨거운 피』. 탄탄한 구성과 서스펜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분출하는 에너지로 매번 강렬한 세계를 그려내는 저자가 2년간 집필한 신작 소설로, 마흔 살 건달의 짠내 나는 인생이야기를 들려준다. 1993년 봄과 여름, 부산 앞바다를 배경으로 두려울 것 없던 마흔 살 건달이 겪게 되는 정서적 절망감을 사실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냈다.
마흔 살, 전과 4범, 부산 변두리 구암 깡패들의 중간 간부이자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 만리장 호텔의 사장이자 구암 암흑가의 보스인 손영감의 오른팔인 희수. 건달로 사는 데 염증을 느끼고 구암 바다를 지긋지긋해하지만 달리 갈 곳도, 딱히 바라는 삶도 없던 그는 20년간 모신 보스 손영감을 떠나 새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사랑해온 여자와 그녀의 아들과 함께 잠시나마 가족을 꾸리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하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갈등과 첨예한 권력 싸움에 휘말리고 점점 더 치열하게, 점점 더 비열하게 살아가게 되는데...
저자 김언수
- 저서(총 12권)
- 2002년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에 단편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과 「단발장 스트리트」가,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첫 장편소설 『캐비닛』으로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두 번째 장편소설 『설계자들』을 2010년에 냈고, 소설집 『잽』이 2013년에 나왔다. 오랜 침묵을 깨고 2016년 세 번째 장편 『뜨거운 피』를 발표했다. 『뜨거운 피』는 1993년 부산을 배경으로 한 짠내 가득한 이야기로, 건달들의 비루한 삶을 그렸다.소설58%
목차
1부 봄
구암의 바다 │ 만리장 호텔 │ 뻐꾸기 창고 │ 테라스 │ 달방 │ 모자원 │ 옥사장은 왼손잡이다 │ 보드카 │ 낮술 │ 방파제 │ 허벅지 │ 인숙의 방 │ 빨래공장 │ 통발 │ 밤섬 │ 안개 │ 아미 │ 장례식장 │ 이발소
2부 여름
결혼과 여름 │ 벤츠 │ 사무실 │ 까치복 │ 인계철선 │ 치킨 │ 루어 │ 떠올라야 할 것, 떠오르지 말아야 할 것 │ 텍사스 홀덤 │ 똥병 │ 요리사 │ 나무 기둥 │ 양다리보단 헛발질이 낫다 │ 멍텅구리배 │ 그 여름의 끝
[이 책을 읽은 이들의 독후감]
씨발놈들 전성시대
이책을 다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참 개같은 세상에 개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 듭니다 작가의 전작 설.. 적목의남자님 반디앤루니스 2016.10.10
- 뜨거운 피
- 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작가 김언수의 소설은 처음 만나보았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하도 광고를 많이 해서 궁금한 마음에 구입을 하게 되었다.탄탄한 ..
- 두뽀사리님 반디앤루니스 2016.10.05
- 뜨거운 피
- 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작가 김언수의 소설은 처음 만나보았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하도 광고를 많이 해서..
- 두뽀사리님 인터파크도서 2016.10.05
- 뜨거운 피.
- 탄탄한 구성과 서스펜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분출하는 에너지로 매번 강렬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 김언..
- 태양새별아빠님 인터파크도서 2016.09.30
- [뜨거운 피] 그들이 사는 세상
- 구암이란... 자신의 직업세계와 다른 사람들을 칭할 때 일반인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연예인과 일반인, 군인과 일반인, 정치인과 일반인 등등..
- 경암군님 인터파크도서 2016.09.30
- 뜨거운 피 : 김언수 장편소설
- 뜨거운 피 : 김언수 장편소설 김언수의 신작 장편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나름 기대가 되었고 읽어본 책이 있습니다. 뜨거운 피라는 ..
- 은영공주님님 인터파크도서 2016.09.28
- [출판사 서평]
2006 문학동네소설상 수상 『캐비닛』
2016 프랑스 추리문학대상 후보 『설계자들』
그리고 독자들을 또 한번 흥분시킬 압도적인 이야기
숭고하지 않은, 그래서 더 뜨거운 피를 가진 남자들의 인파이팅!
탄탄한 구성과 서스펜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분출하는 에너지로 매번 강렬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 김언수의 신작 장편이 출간되었다. 2006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캐비닛』, 2010년 문학동네 온라인카페 연재 당시, 매회 수백 개의 덧글이 달리며 ‘설거지들’ 열풍을 일으킨 작품 『설계자들』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장편소설이다. 특히 『설계자들』은 올해 프랑스에 번역 출간되어(출판사 ‘로브’) ‘2016 프랑스 추리문학대상Grand Prix de Litterature Policiere’ 후보에 올라 있다. ‘프랑스 추리문학대상’은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모리스 베르나르 앙드레브에 의해 1948년 제정되어, 매년 최우수 프랑스 소설과 최우수 외국소설에 수여된다. 엘러리 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프레더릭 포사이스, 피터 러브시, 마이클 코넬리 등이 이 상을 받았다. 9월 중 수상작이 발표되며, 아시아권 소설로선 최초의 수상작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설계자들』은 프랑스, 일본, 베트남에 이어 최근 호주 출판사 ‘텍스트 퍼블리싱’에도 판권이 수출되었다. 텍스트 퍼블리싱은 존 쿳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파트릭 모디아노, 이스마일 카다레 등의 작가 리스트를 보유한 지명도 높은 문학 전문 출판사이다.
작가는 2014년 집필을 시작해 지난 2년간 『뜨거운 피』에 매달렸다. 공들여 다듬은 작품을 어느 해보다도 강렬한 이 여름, 세상에 내놓는다. 1993년 봄과 여름의 이야기다. 마흔 살 건달의 짠내 나는 인생 이야기. 인생에도 사계가 있다면 마흔 살은 여름에 해당될 터, 그 뜨겁고 강렬한 날들의 기록이 부산 앞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한국형 누아르의 쌉싸름하면서도 찐득한 맛이 살아 있으며, 두려울 것 없던 마흔 살 건달이 겪게 되는 정서적 절망감이 사실적이면서도 흡인력 있게 담긴 작품이다.
이것은 누아르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 안에서 늘 끓어넘치고 있는
그 뜨거운 것들에의 송가다
마흔 살, 전과 4범, 부산 변두리 구암 깡패들의 중간 간부이자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다. 만리장 호텔의 사장이자 구암 암흑가의 보스인 손영감의 오른팔이기도 하다. 부하들 몰래 우울증 약을 먹으며 호텔방에서 ‘달방’을 산다. 주인공 희수의 현주소다. 건달로 사는 데 염증을 느끼고 구암 바다를 지긋지긋해하지만 달리 갈 곳도, 딱히 바라는 삶도 없다. 그런 희수가 20년간 모신 보스 손영감을 떠나 새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사랑해온 여자와 그녀의 아들과 함께 잠시나마 가족을 꾸리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폭력조직이란, 아니, 세상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기에 거대 세력 간 충돌과 음모 앞에 개인의 삶과 신념은 이용당하고 희생되기 마련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자기 일신의 안위를 살피고, 눈앞의 이익을 좇고, 암투와 회유, 배신으로 일희일비한다. 그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격랑이 이토록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갈등과 첨예한 권력 싸움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가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던지는 그 뜨거움 때문이다. 즉흥적이고 속물적인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바라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으로 슬프고 씁쓸한 우리네 인생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사내가 보기 좋은가
이 삶이 보기 좋은가
희수는 모든 인물, 사건과 관계되어 있으면서도 한 발짝 떨어진 채 관조하는 듯한 시선, 침착하고 다소 시니컬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이다. 그건 희수가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결핍을 끌어안고 성장했으며, 아버지라는, 모르는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자랐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희수가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들은 병신 같거나 허약하거나 이 거친 세상을 견디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사람들이었다.”(297쪽) 반면에 희수를 아들 삼고 싶어한 사람들은 모두 건달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희수가 마흔이 될 때까지 집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 것도 내면에 근본적인 동공(洞空)을 가진 그의 캐릭터와 맥이 닿아 있는 설정이다. 어디에도 마땅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희수의 삶을 유지시키는 건 손영감-희수, 희수-아미(첫사랑 인숙의 아들)의 유사 부자관계이다. 손영감에 대한 의리와 아미에 대한 애틋함이 희수를 움직이게 하는 두 개의 큰 축이다. 때로는 부드럽고 뭉클하게, 때로는 잔인하고 힘겹게 희수를 흔들어대는 두 축은 그래서 더 강렬하게 부각된다. 결국 손영감과 아미를 모두 잃고 만 희수가 주저앉아 쏟은 눈물에는, 삶에 대한 일말의 애착과 연민이 담겨 있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끈적거리고 뜨겁게 달라붙는 것들을 희수는 이제 사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을 때의 거대한 동공을 희수는 이제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586~587쪽) 뜨거운 여름이 끝나면, 바다로 몰려온 그 많은 사람들은 떠날 것이다. 1993년 봄과 여름, 구암의 날들은 잊히고, 어느새 춥고 외롭고 쓸쓸한 겨울 바다가 희수 앞에 펼쳐질 것이다. 우정도 사랑도 지키지 못했고, 소중한 것을 모두 잃은 희수에게. 그리하여 권력과 명예를 쥐게 된 희수에게.
비밀은 없고, 마음은 안타깝고, 피는 뜨겁다
작가는 적지 않은 분량을 압도적인 흡인력으로 이끈 뒤 이렇듯 메워지지 않을 동공 하나를 독자들의 마음에 남긴다.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히고 있듯, 구암의 풍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은 작가가 소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재탄생시킨 것이다. 삼류 건달들과 사창가 여인들, 황홀한 쇼윈도 불빛, 피와 눈물과 흐느낌 등 온갖 직설적인 것들로 가득했던 그 거리를 작가는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점점 더 치열하게, 점점 더 비열하게 살게 되는 인물들의 그리 대단하지 않은 삶은, 단순히 그들이 건달이고 악행을 저지른다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오히려 지금 우리의 “쾌적하고 젠틀하고 깔끔한” 삶과 대조되는 강렬함으로, 간절함으로 다가온다. 뜨거운 여름, 이 촌스럽고 지리멸렬한 삶에 과감히 압도당하길 권한다.
나는 가끔 그 미로 같은 골목과 위태로울 정도로 얇은 벽들이 나를 소설가로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진공관처럼 그 얇은 벽에서 들려오는 무수한 수군거림은 신비롭고 은밀하며 긴장감 넘치고 심지어 굉장히 성적이기까지 했었다. 그 수군거림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어서 들어오라는 듯 모든 집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 같았다(실제로 대부분의 문들이 열려 있었다). 하여 이 동네에선 비밀이 숨을 곳이 없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았다. 누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누구를 증오하고,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간절히 사랑하는지 모두들 알았다.(…)
사람들은 이제 뜨겁지 않다. 뜨거운 것들은 모두 미숙하고 촌스럽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죄목으로 촌충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구암의 그 지리멸렬한 삶이 그리워진다. 구암의 시절엔 짜증나고, 애증하고, 발끈해서 술판을 뒤집었지만 적어도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다.
_‘작가의 말’에서
주요 인물 소개
ㆍ희수
“건달로 살아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게 있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 좆같은 새끼야.”
마흔 살. 전과 4범. 부산 변두리 구암 깡패들의 중간 간부이자 손영감의 오른팔.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다. 아버지 없이 엄마와 아이들만 모여 사는 모자원에서 자랐다. 침착하고 사려 깊으며 다소 시니컬하지만, 아미와 인숙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숨기지 못한다.
ㆍ손영감
“건달이 양복 입어서 좋을 거 하나 없다. 폼은 잠시고 감옥은 평생이다. 까놓고 말해서 할 짓이라고는 건들거리는 것밖에 없는 건달한테 양복이 대체 왜 필요하노?”
만리장 호텔의 사장이자 구암의 항구를 장악한 암흑가의 보스. ‘건달은 닥치고 그저 쥐죽은듯이 조용히!’를 신조로 안전을 최우선시하며, 다른 조직과의 마찰을 극도로 꺼린다. 조부가 권력의 실세에게 무참히 맞아 죽은 것에서 얻은 교훈이다. 조부가 일군 것을 물려받아 손쉽게 보스가 되었으나, 오십 년 건달 생활의 관록과 빠른 판단력, 철저한 계산, 원칙주의자적 면모로 구암 보스 자리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다.
ㆍ아미 : “귀여우면서도 터프한 거! 그게 함께하기가 진짜 쉽지 않은 건데, 아버지 아들이 그 어려운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스타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버지는 이 귀엽고 용맹무쌍한 아미만 믿으면 됩니다.”
스물네 살, 키 백구십에 몸무게 백이십 킬로의 거구. 구암의 전설적인 건달로, 아미와 “스치면 그 자리에서 사망이고 살짝 피했다 싶으면 전치 육 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숙의 아들로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희수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른다. 자기가 늘 기분이 좋아서 덩달아 주위를 기분좋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미 주위에는 늘 사람이 많다.
ㆍ인숙 : “나는 내가 안 부끄럽다. 동생들이 내가 창피해서 모두 다 이 구암 바다를 떠나도, 시장 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만날 내 뒤에서 수군덕거려도, 나는 내가 안 부끄럽다. 나는 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살았다.”
술집 ‘허벅지’의 마담. 아미의 엄마이자 희수의 동갑내기 첫사랑. 희수와 같은 모자원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동생 일곱을 키워낸 소녀가장이었다. 열일곱에 완월동 사창가에 제 발로 들어갔다.
ㆍ남가주 : “나는 이 친구가 참 맘에 들어.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뭐랄까 눈빛이 묵직하면서도 감성이 살아 있잖아. 21세기형 건달은 이래야 돼. 감성이 있어야지 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야. 감성이라고는 좆도 없는 저런 삭막한 포주 새끼들 데리고는 미국 마피아들처럼 월드하게 성장할 수 없다는 거지.”
부산 폭력조직의 본거지인 영도의 지배자이자, 전국구 조직인 남가주파의 보스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게 쫓겨 만주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까지 떠밀려와 맨손으로 모든 걸 일군 피란민 1세대 건달. 섬세하고 유연한 성격으로 건달들 사이에서 존경받고 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ㆍ용강 : “희수 니가 버팅기면 나 같은 용병이 우짜겠노. 할 수 없이 희수 니도 죽여야 하고, 아미도 죽여야 하고, 손영감도 죽여야 하고.나는 애초에 일거리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아이가. 처음엔 겁만 살짝 주면 된다고 해서 시작한 일인데 일거리가 산더미네. 그나저나 말하다보니 이거 시발, 남가주랑 계약을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냐?”
돈 받고 남의 구역에 들어와서 똥물을 튀긴다고 하여 ‘똥병’이라 불린다. 월남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한 이력이 있다. 조직에 속하지 않고 혼자 일한다. 연민과 사랑이 없는 것은 물론, 두려움도 공포도 모른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잃을 게 없는 사람, 그러므로 누구든 용강과 얽히면 진창으로 떨어지게 된다.책속으로
용강이 희수를 보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이 있다. 오랫동안 너무나 많이 잃어봐서 잃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얼굴. 바닥까지 내려가봤고 그 바닥에서 치고 올라온 적이 있는 얼굴 말이다. 깡패는 그런 놈들이 하는 것이다. 자식도 없고 마누라도 없고 부모도 없는, 지켜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놈들이 하는 것이다. 당장 오늘 죽어도 별 상관없다는 태도를 가진 놈들, 다 같이 막장으로 떨어지면 누가 더 다칠 것 같냐고 늘 협박을 하는 그런 얼굴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희수도 잃을 것은 없었다. (206쪽)
“니는 씨발 정신이 없다.”
씨발 정신은 또 뭐냐는 듯 희수가 양동을 쳐다봤다.
“니는 너무 멋있으려고 한다. 건달은 멋으로 사는 거 아니다. 영감님에 대한 의리? 동생들에 대한 걱정?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하는 평판? 좆까지 마라. 인간이란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니가 진짜 동생들이 걱정되면 손에 현찰을 쥐여줘라. 그게 어설픈 동정이나 걱정보다 백배 낫다. 니는 똥폼도 잡고 손에 떡도 쥐고 싶은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우리처럼 가진 게 없는 놈들은 씨발 정신이 있어야 한다. 상대 앞에서 배 까고 뒤집어지고, 다리 붙잡고 울면서 매달리고, 똥꼬 핥아주고, 마지막에 추잡하게 배신을 때리고 우뚝 서는 씨발 정신이 없으면 니 손에 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 (305쪽)
희수가 아미를 쳐다봤다. 싸움에선 그토록 용맹무쌍하던 아미가 칼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스무 살엔 희수도 아미 같았다. 감정에 수분이 가득해서 무엇이든 쉽게 끓어올랐다. 뭐든 지금보다 더 슬펐고 더 분했고 더 불쌍했고 더 그리웠다. 그 뜨거운 것들이 전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465쪽)
용강은 광물 같은 인간이었다. 연민과 사랑이 없는 것처럼 두려움도 공포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침착하고 차분했다. 처자식도 없고 애인도 없다. 용강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담배꽁초처럼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들만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자기 목숨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 잃을 게 없는 인간과는 결코 싸움을 하면 안 된다. 그런 놈과 싸움을 하면 이기든 지든 진창으로 떨어지게 된다. 용강이 그런 놈이었다. (498쪽)
“내가 왜 당신 따위랑 닮았는데.”
“너는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거든. 그런 인간이 갈 곳은 딱 두 군밖에 없다. 저 바닥으로 계속 추락하거나 아님 저 위로 하염없이 올라가서 왕이 되거나. 둘 다 존나게 쓸쓸하고 무의미한 곳이지. 그래도 사람이 죽을 순 없으니까 어딜 가긴 가야 하잖아? 나는 이왕에 떨어지기 시작한 거 저 밑바닥까지 가보려고. 희수 니는 올라가서 왕이 되어라. 더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514쪽)
'♣ 책 도서관 ♣ > - 문학(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장편소설]삿포로의 여인:이순원 (0) | 2016.11.30 |
---|---|
[우리 장편역사소설] 군함도:한수산 (0) | 2016.11.23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김주영- 잘 가요 엄마 (0) | 2016.08.22 |
<인도 장편소설>저지대- 줌파라히리 (0) | 2016.01.14 |
[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 (0) | 2015.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