釣 魚
仁齋 成聃壽 인재 성담수
[서예 습작]
把竿終日趁江邊 [파간동일진강변] 낚싯대를 잡고 종일 강가를 쫓아 다니다가
垂足滄浪困一眠 [수족창랑곤일면] 맑은 물결에 발 담그고 곤히 잠들었더니
夢與白鷗飛萬里 [몽여백구비만리] 꿈속에서 흰갈매기들과 함께 만리를 날다가
覺來身在夕陽天 [각래신재석양천] 깨어보니 이 내몸은 저녘 하늘아래 있었네
성담수(成聃壽, ? ~ ?)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은일사로, 세조 때 단종 폐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사직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미수(眉叟) 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성담년은 그의 친동생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6촌 동생이다. 명종 때의 정승 이기와 용재 이행은 그의 생질이다. 교리를 지낸 성희(成熺)의 아들이다. 본관은 창녕이다. 1782년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생애]
예문관대제학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개(成槪)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를 지낸 성희(成熺)이며, 어머니 이씨는 호조판서를 지낸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성승은 그의 당숙이고 성삼문은 그의 6촌 형이었다. 1450년(세종 32년)에 진사가 되었고, 승문원 교리 등을 지냈다. 단종 복위 사건으로 6촌간인 성삼문 등이 사형당했으며, 그도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어 김해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겨우 풀려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 성희는 3년 뒤에 풀려나서 공주에 돌아왔으나 유배지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한다. 그는 1450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관직을 단념한다. 그 후 세조는 여러 번 그에게 참봉, 봉사 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벼슬을 단념하고 경기도 파주의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사후 정숙(靖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세조는 그의 아버지 성희에게 참봉 벼슬을 내렸다가 그에게도 참봉 등의 관직을 내렸는데 그는 세조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뜻임을 간파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 뒤 그와 함께 은거한 대표적인 신하 다섯 명인 김시습, 이맹전(李孟專), 원호, 조려(趙旅), 남효온 등과 함께 사육신에 대비하여 생육신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사후 성종 때 동생 성담년이 관직에 나가기도 했다.
1782년(정조 6)에 김시습(金時習)ㆍ원호(元昊)ㆍ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정조의 특명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함께 봉향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성송국(成松國), 성삼문,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성혼(成渾) 등 성씨 일족들을 제향한 서원에 배향, 함께 제향되고 있다.
가족 관계
기타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은 그의 6촌 형이고[1], 명종 때 을사사화를 날조하는데 가담한 이기는 그의 생질 로, 여동생의 아들이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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