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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溪寺(운계사) - 이심원(李深源 , 조선 , 朱溪君 = 호 醒狂)|

Bawoo 2016. 11. 28. 20:14


雲溪寺(운계사)

                                                                                             - 이심원(李深源 , 조선 , 朱溪君 = 호 醒狂)|




樹陰濃淡石盤陀(수음농염석반타) 숲 그늘 짙어오고 바위는 울퉁불퉁한데

一逕回縈透磵阿(일경회영투간아) 오솔길 하나 굽이굽이 시내를 돌아간다.

陳陳暗香通鼻觀(진진암향통비관) 꽃향기 솔솔 콧속으로 들어오니

遙知林下有殘花(요지림하유잔화) 숲속에는 지다만 꽃이 있는가 보다.

[ 續東文選에는 <二十五日自湘水驛到雲溪寺>라는 題目으로 실려 있음]


[서예 습작]


이심원(李深源, 1454년 ~ 1504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백연(伯淵),호는 성광(醒狂), 默齋(묵재), 太平眞逸(태평진일)이다. 연산군 때 동생과 함께 화를 당한 대유학자이다.[1] 효령대군 보의 증손으로 보성군 갑의 손자로서 평성도정 위(사후 평성군에 추증)의 장남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의 제자인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정암 조광조와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성종 때부터 훈구파의 퇴진과 사림파의 등용과 양심적인 지역 은거 인사들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고모부 임사홍의 비행과 비리를 성종에게 고했다가 할아버지 보성군으로부터 고소당하였으나, 성종이 그의 충심을 이해하고 반려하였다.

사림파에 대한 지지 선언으로 인사들의 단종 정순왕후 복권 여론을 이끌어냈다.[2] 그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 정광필 등의 상소로 죄를 면하고, 주계군으로 증직되었다.[3] 이후 홍록대부로 추증되어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의 행적은 『명신록』, 『삼강행실』, 『국고보감』등의 책에 기록하여 학문과 충절을 돋보이도록 하였다.[위키백과 이심원 에서발췌]

[시 정보-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