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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강석[題江石]-홍유손(洪裕孫)

Bawoo 2016. 11. 29. 17:26


題江石


                                                          홍유손(洪裕孫)


       濯足淸江臥白沙(탁족청강와백사) 맑은 강에 발 담그고 흰 모래에 누우니

       心神潛寂入無何(심신잠적입무하) 심신은 고요히 잠겨들어 무아지경일세

天敎風浪長喧耳(천교풍랑장훤이) 귓가에는 오직 바람소리 물결소리

          不聞人間萬事多(불문인간만사다) 번잡한 인간속세의 일은 들리지 않는다네


[서예 습작]




홍유손(洪裕孫) 1431(세종13)~1529(중종24)


조선 초기 문인.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광진자(狂眞子). 본관은 남양(南陽).

문장에 능하여 부역을 면제받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지냈다.

세조(世祖)의 왕위찬탈 이후 세속적 영화를 버리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

1482년(성종 13)부터는 남효온(南孝溫)·이총(李摠)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자처하고 노장(老莊)의 학문을 논하여 청담파(淸談派)로 불렸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노예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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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세가 청빈하였으나 경(經)·사(史)를 섭렵하고, 방달(放達)한 기질에 얽매임이 없었다.

과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향리의 역(役)을 벗고자 꾀하지도 않았는데, 1481년(성종 12) 남양군수 채수(蔡壽)가 문장이 능한 것을 보고 역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자 곧 영남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 때 김종직은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긴 바를 알고 있으니 학자들은 모두 본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어 바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수업한 뒤, 서울로 돌아와서 김종직이 시사(時事)를 아뢰지 않는 것을 보고 비판하였다. 그는 세상을 희롱하여 고답(高踏)하면서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당시의 명류 김수온(金守溫)·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 등과 특히 가깝게 지내면서 죽림7현을 자처하고 노자(老子)·장자(莊子)의 학문을 토론하며 시율(詩律)을 나누었는데, 남효온은 그를 평하여 “문(文)은 칠원(漆園) 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涉).”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제주도에 유배되고 노비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76세에 처음으로 처를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얻어 홍지성(洪至誠)이라 이름하였다. 저서로는 『소총유고(篠䕺遺稿)』가 있다.



[출처: 정보-책:한국한시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