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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잡영(寒碧雜詠); 이기진(李起振)

Bawoo 2017. 1. 4. 20:12

한벽잡영(寒碧雜詠)

                                                    이기진 (李起振)

[서예 습작]


[협강양류녹음다:강가 수양버들은 녹음이 우거지고]

[연자함니함외과:제비는 진흙 입에 물고 난간 밖을 지나누나]

[수기부지전야우:잠 깨어 보니 간밤에 비온 줄 몰랐어라]

[요간홍습만정화:멀리 물가엔 붉게 물든 꽃들 가득하구나]


*陽柳:수양버들


*寒碧雜詠[한벽잡영]

[정의]
조선 후기와 개항기 이기진(李起振)이 청풍 한벽루 주변의 풍광을 노래한 칠언 절구의 한시.


[개설]
명와(明窩) 이기진[1869~1908]은 화서학파의 일원으로 유중교(柳重敎),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었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종사로 활약하여 의병장 서상렬(徐相烈)의 시신을 제천으로 운송해 오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병고로 의진에 계속 합류하지 못하고 고향인 충주 하곡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한벽잡영(寒碧雜詠)」은 청풍을 다니면서 한벽루의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비온 뒤 아침에 일어나 한벽루 주변의 싱그러운 경치를 노래한 작품이다.


[구성]
기구에서는 청풍 강가의 버드나무 늘어진 풍경을 읊었고, 승구에서는 제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그렸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시상을 바꿔 비온 뒤 아침에 물가에 활짝 핀 꽃을 싱그럽게 묘사했다.


[내용]
협강양류녹음다(夾江楊柳綠陰多)[강을 낀 버들가지 짙푸른 그늘 많고]

연자함니함외과(燕子銜泥檻外過)[제비는 진흙 물고 난간 밖을 지나가네]

수기불지전야우(睡起不知前夜雨)[잠 깨어 간밤에 비 온 줄 몰랐고]

요간홍습만정화(遙看紅濕滿汀花)[멀리 보니 붉게 젖은 만개한 물가의 꽃]


[특징]
기구와 승구, 결구에 각각 다(多), 과(過), 화(花)의 운자가 있다.


[의의와 평가]
비온 다음 날 청풍 한벽루 주변의 싱그러운 경치를 그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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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李箕鎭.1687.숙종 131755.영조 31)

조선 영조(英祖) 때의 문신. 자는 군범(君範), 호는 목곡(牧谷),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헌(文憲). 양구현감 이당(李簹)의 아들, 백부(伯父) 삼척부사 이번(李蕃)의 후사. 1717(숙종 43) 진사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경종(景宗) 때 헌납(獻納)으로 영조(英祖)를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흉언(凶言)을 퍼뜨린 유봉휘(劉鳳輝)를 벨 것을 청하였으며, 그 해 겨울의 사화(士禍)로 물러났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하고, 교리(校理)로 불렀는데, 시독관(試讀官)으로 징토(懲討)를 엄히 하여 의리를 밝힐 것을 극언(極言)하여 영조(英祖)의 노여움을 샀으며, 승지이조참의부제학을 거쳐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올라 왕세자 관례(冠禮) 때 봉전문(封箋文)을 빠뜨린 사건으로 파면되었다.


1728(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고향에서 서울로 달려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난이 그친 후 고향에 물러가 있었다. 이어 함경감사대사헌경상감사형조판서예조판서경기감사 등의 벼슬로 누차 소명이 있었으나, 혹은 취임하고, 혹은 취임하지 않았다.


1741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뽑히고,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지 않았다. 사묘행행(私廟行幸)의 사건으로 왕이 크게 노하여 신하들과 면대를 거절한 데 대하여 소를 올려 극간(極諫)하였다. 전형(銓衡)을 맡게 되자 곧은 성질이라 동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뿌리치고 고향에 돌아가니, 대신의 주선으로 홍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경기감사평안감사광주유수(廣州留守) 등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러 숭록대부(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죽었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출처] 시 정보-책"한국 한시 진보"/포르필: 조선 문신 이기진(李箕鎭)|작성자 재봉틀


[참고: 위 시의 출처인 '한국한시진보에 따르면 지은이가 아래 이기진 선생이 맞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가 더 전확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