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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Bawoo 2017. 3. 3. 23:40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조선이 망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500여 년을 존속한 것에 대해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기간이 오래라는 자랑(?)일 것도 없는 자랑을 하는 내용을 책에서 본 적도 있지만 이는 웃기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북한처럼 소수 지배계층에 속하는 인간들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며 사는 나라가 천년을 간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지배계층에 속하는 속하는 인간들이 아닌 대부분의 평민 계층의 사람들이 나라가 바뀌는 게 무슨 상관인가. 대대손손 전쟁 안 겪으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이란 나라가 그랬는가? 굳이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된 역사서가 아닐지라도, 한반도의 지배계층은 중국의 안보우산 아래에서 자기들의 이익만 쫓는 통치행태를 보였다. 100년 전국시대를 끝낸 일본이 침략했을 때 중국 명나라 덕분에 멸망의 위기를 넘겼으면서도-명은 이게 원인이 되어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멸망했다-정신을 못차리고 자기 당파들의 이익만 쫓는 나라 경영에 다시 몰두했다. 만주나 몽골지역에서 흥기한 원나라나 청나라가 한반도에 있는 고려, 조선을 복속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는 보다 광대한 중국 대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작은 한반도를 눈독 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속된 말로 까불지 않고 얌전히 말 잘 들으면 그냥 놔뒀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한족이 중국을 지배할 때는 한반도를 침범하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다. 한반도까지 생각하기에는 주변 이민족의 위협이 너무 강했던 측면도 있다.  청나라가 병자, 정묘호란을 일으킨 것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뒤를 단도리하려고 한 측면이 강하다. 명나라를 칠 때 배후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이 커지니 다른 나라를 넘본 것이고, 그 대상국으로 지리적으로 제일 가까운 한반도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 한 채 당파적 이익에만 몰두한 조선의 지배계층들. 중국 명나라가 아니었으면 그때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 것인데 전후에도 정신 안 차리고 자신들의 이익만 탐하여 반정을 일으키고, 재조지은이란 명분으로 망해가는 명나라만 추종하다가 신흥강국 청나라에게 침략을 당하고... 그러다가 청나라가 힘이 떨어져 돌봐 줄 형편이 안 되니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일본에게 통째로 먹혔다. 그 연장선상에 지금의 분단이란 결과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이 나라의 지배계층들. 지금은 이런 행태를 끝낸 것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특히 조선,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 군사독재시절을 면면히 이어 오면서 뿌리를 이어가고 있는 세력들.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전묹적인 소개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조선판! 조선이 숨겨온 몰락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는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조선의 정치·경제·문화를 날카롭게 분석해, 조선이 결코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나라였다는 점을 짚어낸다. 또한 이 책은 우리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접한 ‘신제도학파’의 시각을 바탕으로 조선의 몰락을 살펴보는 국내 최초의 저서로, 제도적 측면에 집중해 조선이 몰락하게 된 진짜 원인을 살펴본다.

조선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중 대부분은 현대를 사는 우리 곁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저자는 조선의 사례를 보며 우리도 대대적인 재점검과 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와 국민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좀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대한민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 과거 우리가 밟아온 길을 되짚으며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배워야 할 것은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책은 다른 집단의 이익을 빼앗기 위해 싸우기보다 전체 파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라고, 그리고 다른 집단을 적대시하기보다 포용하고 수용하라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저자소개

저자 : 정병석
저자 정병석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Michigan State University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제 17회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1977년부터 30여 년간 노동부(현재의 고용노동부)에서 근무하면서 고용정책과장, 고용보험심의관, 근로기준국장, 기획관리실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쳐 노동부 차관을 역임했다. 노동부 재직 시 최저임금제와 고용보험제 등의 주요 제도 마련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2006년 한국기술교육대학교(코리아텍)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교육자의 길로 들어섰으며, 한양대학교 경상대학의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특임교수로 경제사와 성장론을 중심으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최저임금법》(공저), 《이기는 청춘》 등이 있다.

목차

들어가는 글

1장 조선은 왜 가난했을까
19세기 서양 무역상의 눈으로 본 조선 / 19세기 중국인의 눈으로 본 조선 /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의 기록 / 정치력과 경제력의 불일치

2장 제도가 만든 경제성장의 차이
왜 제도가 핵심인가 / 권력 독점으로 훼손된 조선의 제도 / 중국, 조선, 일본의 성장 전략

3장 조선 초기의 제도
정권 안정 제일주의 / 정도전은 어떤 철학으로 개혁을 주도했는가 / 초기 제도의 위기와 개혁의 실패

4장 포용적 정치제도
개방적인 정책 결정 과정 / 포용적 정치제도의 사례 / 대동법, 조선 최고의 제도 혁신 사례

5장 조선의 유교화
조선, 이상적 철학 국가를 지향하다 / 사림의 등장과 왕도정치에의 몰입 / 성리학은 조선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 사농공상의 4민체제가 불러온 것 /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부작용

6장 지식의 국가 독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 / 조선 정부의 지식 독점과 통제 / 철저히 경시된 한글과 우리의 역사 / 종이 생산을 제약한 착취적 제도

7장 통치의 기반, 관료제와 양반
양반계급의 형성 / 양반의 특권과 책무 / 관료의 녹봉과 선물 문화

8장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 사족과 향리
지방 통치자, 수령 / 향촌의 지배자, 재지사족 / 실무 집행자, 향리

9장 착취적 신분제의 대명사, 노비제도
노비제도의 실상 / 노비제도의 폐해 / 노비제도의 동요

10장 폐쇄적 정치제도
개혁을 거부한 조선 조정 / 세부 시행 규정과 감독체제의 미비 / 초기의 부국강병책에서 이탈하다 / 정부의 책임과 인민의 저항권

11장 포용적 경제제도는 존재했는가
조선의 토지와 조세제도 / 조선의 재분배체제 / 조선의 핵심 산업 / 18세기 조선의 상공업

12장 상공업을 억제한 조선
왕도정치를 위하여 / 시장 형성을 억제하는 제도 / 폐쇄적 제도가 불러온 침체

13장 재산권과 조세제도
사유재산권과 소유권 보호제도 / 혼란스러운 토지 소유권, 전정의 문란 / 착취적 조세제도, 환곡의 문란 / 시작은 공평했으나… 군정의 문란 / 조선의 화폐에 대한 인식 / 왕실의 착취제도

14장 현대 국가를 일깨우는 조선의 외침
우리는 조선의 사례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참고문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조선판!
조선의 몰락에는 우리가 몰랐던 ‘진짜 원인’이 존재했다


조선 왕조는 5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존속했다. 아래로는 일본과, 위로는 중국과 대립하며 여러 차례의 내우외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오래 유지했다. 고려 말기의 혁명을 주도하고 조선을 세운 건국 세력은 고려가 쇠퇴한 원인을 찾고 이를 보완해 완벽한 국가를 세우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우리가 아는 ‘선비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와 이론적 기반 위에 세워졌음에도 조선은 왜 현대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일까?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는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조선의 정치·경제·문화를 날카롭게 분석해, 조선이 결코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나라였다는 점을 짚어낸다. 또한 이 책은 우리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접한 ‘신제도학파’의 시각을 바탕으로 조선의 몰락을 살펴보는 국내 최초의 저서로, 제도적 측면에 집중해 조선이 몰락하게 된 진짜 원인을 살펴본다. 조선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중 대부분은 현대를 사는 우리 곁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결국 이 책은 조선에 대한 보고서이자, 현대 대한민국에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

무엇이 조선을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로 만들었는가
조선은 매우 가난했다. 개인의 생활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군대의 군량은 항상 부족했고, 재해가 찾아오거나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무수히 생겨났다. 정부에서 신분이나 관직을 내다 팔아 곡식을 사들일 정도였다.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녹봉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관료들은 지방의 하급 관료들에게 선물 형식의 금품을 요구했고 지방 관료들은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이것을 메꾸었다. 상황이 이러니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가난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근검절약하는 청빈한 삶, 안빈낙도의 철학을 숭상한 탓이었다. 양반들은 아무리 먹고살 것이 없어도 상민들처럼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굴비를 바라보며 맨밥을 먹을지언정, 나가서 밭일을 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개인으로서의 양반은 마을의 어른이자 올바른 선비의 귀감이었을지 몰라도, 양반층 전체를 본다면 그들은 1인당 생산량이 0에 가까웠으며 국가가 부강해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계층이었다.
무엇이 조선을 이토록 가난하게 만들었으며, 가난에서 빠져나올 노력조차 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오랜 연구 끝에 ‘제도’에서 원인을 찾았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지리적, 역사적, 인종적 조건이 아니라 바로 제도”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저자도 제도적 요인을 중심으로 조선의 몰락에 대해 논의한다. 신분제도, 조세제도, 관료제도, 정치제도 등 사회를 옭아맨 각종 제도(공식적 제도)에 조선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성리학을 문화(비공식적 제도)로 포함시켜, 이 모든 제도들이 조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본 것이다.

스스로 발전을 거부하고 제도에 갇히다
조선 중기를 지나 후기로 갈수록, 조선에서 시행되던 제도들은 대부분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관료를 뽑는 과거 시험에 양인(천민을 제외한 모든 계층)이라면 누구든 응시할 수 있었으나 점차 상인과 장인, 서얼에게는 응시 기회를 주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시험의 내용이 유교 경전 위주였음에도 평민들에게는 서적 자체를 유통시키지 않아 공부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정부는 모두 양반 사대부 출신의 관료로 구성되었으며, 백성의 목소리는 정책 어디에서도 반영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관료들은 자기 계층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했다. 사회에 큰 혁신을 가져올 만한 기술적 발달이나 개혁 정책은 모두 막으려 했고, 백성을 위한 정책보다는 기득권을 보호하는 정책을 우선시했다. 관료들은 서점을 만들자는 건의가 나오자 “우리나라의 풍속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반대했고, 노비의 수를 줄이는 정책이 시행되려 하자 “노비가 없어지면 평민을 잡아다가 부리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또한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과 유교 문화로 인해 ‘농본상말(농업이 근본이고 상업은 말단이다)’ 의식이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상공업은 천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회 풍조가 생겼다. 기술자들을 천하게 여기고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으니 기술이 발달할 수 없었다. “상인은 땀을 흘리지 않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니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관료도 있었다. 당연히 시장이나 무역, 화폐의 발달에도 관심이 없었다. 경제성장과 부국강병의 이론은 덕이 아닌 힘으로 통치하는 패도覇道라고 생각했다. 삼강오륜과 주자의 예법 등 형이상학적 학문에 심취했던 조선의 관료들과 지배층에게는 경제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다.
전 국토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임진왜란 이후에는 인식이 달라졌을까? 재난을 겪고 나서 누군가는 조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처절한 반성을 해보았을까? 불행하게도 조선은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에도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책임을 진 사람도 없었다. 저자는 임진왜란 후 병자호란 전까지 30년 이상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에 위기를 초래한 원인을 찾아내고 혁신을 이루었더라면 조선이 존망의 위기를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성토한다.

“한국은 강한 국가인가?”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통해 보아야 하는 것

지금에 와서, 이렇게 조선의 제도를 회고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처럼, 조선의 이념과 제도가 남긴 흔적은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폐쇄적, 착취적 제도의 문제들이 결코 조선에 국한된 논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법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 과도한 규제와 제도, 불합리한 기득권, 배타적인 태도, 불공정한 노동 시장과 임금 격차,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 등 현대 사회가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들 중에는 조선에서부터 존재했던 것들이 많다. 모두 조선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세대 간 갈등과 집단 간 갈등이 극에 달한 지금의 세태를 보면 조선 시대 양반과 상민 간 갈등, 관료와 백성 간 갈등이 겹쳐진다. 성장을 촉진하기보다는 경제 부문을 옥죄는 규제가 된 제도들, 산업을 육성하기보다는 진입장벽이 되어 기득권을 보호하고 있는 제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결국 조선의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이 앞으로 만나게 될 역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저자는 조선의 사례를 보며 우리도 대대적인 재점검과 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와 국민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좀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대한민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 과거 우리가 밟아온 길을 되짚으며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배워야 할 것은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책은 다른 집단의 이익을 빼앗기 위해 싸우기보다 전체 파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라고, 그리고 다른 집단을 적대시하기보다 포용하고 수용하라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강한 국가’는 군사력이 강할 때나 법 조항이 많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힘이 꼭 필요한 곳에 신속히 손을 뻗을 수 있을 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 때 완성된다. 그리고 강한 국가를 완성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이 책은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국가를 발전시키는 제도란 무엇인지, 국민을 위한 제도란 무엇인지 조선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다.

* 책속으로 추가 *

고려 시대에는 양인과 천인의 혼인을 엄격히 금지했으나 조선 시대에는 사실상 허용하는 방임정책을 취했다. 허용보다는 방조하는 성격이 더 컸다. 여기에는 양반계층의 분명한 이해관계가 내재되어 있었다. 오히려 양반들이 노비끼리의 혼인을 제한하고 양인과 혼인하도록 조장했다. 주인집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남종이 다른 집의 여종과 혼인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어미인 여종의 주인 재산이 되므로 이는 매우 불리한 사례였다. 지금 당장 재산 손실은 아니지만 장차 재산이 될 수도 있었을 재산이 감소하는 것, 즉 기대이익의 손실을 의미했다. 이 경우에 손해를 끼친 남종 노가 주인에게 용서를 빌며 자신의 재산 일부를 주인에게 헌납해 주인의 재산 손실에 사죄했다는 기록도 있다. ㆍ 9장_ 착취적 신분제의 대명사, 노비제도 p.285

조선 건국 초부터 시행된 상공업 억제제도는 조선의 경제성장을 저해한 제도적 요인들 중 가장 중요한 제도 요인이다. 경제는 인센티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공식적인 법제뿐만 아니라 사회의식, 문화 등이 경제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조선은 공식적인 제도만이 아니라 의식, 가치관, 문화 등 비공식적인 제도에서도 경제활동에 커다란 족쇄를 채웠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상공업에 대해서도 진취적인 생각을 했는데, 유교를 국정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상공업에 대해 폐쇄적인 제도를 설정하고 이를 철저히 이행했다. 그 결과가 조선의 전반적 쇠퇴였다. ㆍ 12장_ 상공업을 억제한 조선 p.382

국가는 게임의 기본 규칙만 규정하고, 나머지는 국민의 역량을 믿고 민간에 맡겨야 한다. 국가의 핵심 제도를 이런 원칙에 따라 정비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성격을 강화하자는 것이 조선을 통해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경제의 성장과 고용 창출, 복지 확충을 위해 법질서가 바로 서게 하고 이익집단 간의 갈등은 국민 대의를 앞세워 과감하게 조정해야 한다. 나는 조선의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를 비판하면서 그것이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ㆍ 14장_ 현대 국가를 일깨우는 조선의 외침 p.464


책속으로

대학생들에게 “500년 이상 존속했던 조선이 왜 망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개 당파 싸움, 쇄국정책, 양반의 수탈 등의 답변을 한다. 그러면 “그런 요인들이 어떻게 조선을 망하게 했을까? 경제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면 그다음부터는 답변이 궁해진다. (…) 제도에 중점을 두는 경제성장론(제도론)의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남북한의 격차를 제도의 차이로 분석하는 것처럼 조선이 왜 쇠퇴의 길로 가게 되었는지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ㆍ 들어가는 글 p.6

500년 이상을 유지한 조선 왕조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지 않은 제도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결코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 나는 조선의 제도를 연구하면서 제도의 논의가 조선뿐 아니라 현대의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조선에 대해 분석했듯이 우리 후손들도 현대를 분석할 때 폐쇄적인 제도 때문에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의 문제가 결코 조선에 국한된 논의가 아니라 현대에도 적용되는 유효한 관점인 것이다. ㆍ 14장_ 현대 국가를 일깨우는 조선의 외침 p.461

양반 관료의 정권 독점, 관념적인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을 지배하며 다른 사상을 억압했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전 백성에 보급하고 의식화해 경제활동을 저해하고 활력을 떨어뜨렸다. 또한 성리학은 삼강오륜을 내세워 경제활동과 영리 행위를 천시하는 문화를 조성했다.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으며 고고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조에서는 경제가 성장할 수 없었다. (…) 이렇게 분석해보면 조선은 현대 경제성장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요소보다 저해하는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조선에는 경제를 침체시키고 성장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ㆍ 1장_ 조선은 왜 가난했을까 p.41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삼강오륜과 《주자가례》의 예법으로 정치와 사회생활을 규율했다. 성리학은 학문으로서 교육과 과거 시험의 핵심 과목이었고, 정치의 원리로서 모든 제도에 그 이념을 반영했다. 또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서도 행동의 기준이 되는 도덕이고 가치관이었으며 생활규범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에서 정치와 경제제도의 기본 바탕이고 비공식적 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리학을 빼놓고 조선의 제도를 논하기는 불가능하다. 기독교를 배제하고 서양 문화를 논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ㆍ 5장_ 조선의 유교화 p.135

학문과 지식을 독점하는 사회에서는 인쇄 출판과 서적 유통을 제한하는 것이 기득권의 이익에 부합했다. 이것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활발했던 서적의 인쇄 출판과 유통, 서점의 개설이 조선에서는 그렇게 오랜 기간 제약이 많았던 것을 설명해준다.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의 영향과 기득권 세력의 특권 보호 본능을 조선 사회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서적 이외에 지식을 전파할 다른 매체가 없는 상황에서 서적의 독점, 그리고 그 결과로 얻는 지식의 독점은 지배층에게 매우 중요한 자산이자 특권이었다. 이 특권을 다른 계층에게 나누어 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기존 질서의 변화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ㆍ 6장_ 지식의 국가 독점 p.190

조선의 관리들은 관존민비 사상에 젖어 백성들에게 군림하며 온갖 횡포를 부려도 큰 탈이 없다고 생각했다. (…) 이렇게 백성과 직접 대면하는 향리들이 부정과 비리를 남발하고 강도처럼 백성을 착취하는데, 대체 무엇으로 이를 견제해야 하는가? 지역의 견제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고 중앙의 감독기관도 감시 기능에 한계를 보인다면, 이것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결국 이런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기관이 제 역할을 하도록 압박하지 못한 ‘제도’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ㆍ 8장_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 사족과 향리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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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어떤 나라는 잘사는가?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가?’

작년 말 출간한 정병석 교수의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에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경제 제도, 그리고 당시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들의 행적에서 교훈을 찾았다.

1866년 조선에 도착한 독일 무역상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2년 동안 세 번이나 서해안을 답사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가 보기에 조선은 대륙에 면해 유리한 지리적 여건, 온화한 날씨, 비옥한 토지 등 잘살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에도 백성이 가난한 결정적 이유가 정부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정치 체제에 있다고 판단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청나라 엘리트 관료 마건충도 조선이 옛것에 얽매였기 때문에 국가가 약해지고 재물이 부족한 것이며, 상업의 침체는 정부의 정치적 무능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임진왜란 이후 세 차례 파견된 조선의 통신사들에게는 전란 중에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이른바 피로인(被擄人)들의 송환 문제가 핵심 외교 이슈 중 하나였다. 적어도 6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피로인들은 10년, 20년이 지나 고국에서 온 사절들이 귀국을 종용해도 대부분 귀국을 꺼렸다. 특히 도자기 장인이나 인쇄 기술자들은 아예 귀국할 뜻이 없었다. 도자기 장인들은 사무라이 같은 신분으로 특별한 우대를 받았고, 모노즈쿠리라 할 수 있는 장인 기업가 정신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정책적 지원도 충분했다. 미개한 문명국가였던 일본은 이미 시장경제 원리를 개인과 산업에 적용해 국가 부흥의 기반이 되는 제도를 실천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제도는 상공업이 억제돼 자본이 축적될 기회가 적었다. 관리와 양반 계층의 착취와 견제로 부를 축적했다고 소문이 날 경우, 자칫하면 재산을 빼앗길 위험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 백성들은 모험을 무릅쓰고 재산을 축적할 동기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경제 관념이 없었던 조선의 지배계층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파이를 키우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 자신의 몫을 늘리는 착취적인 지대추구(地代追求) 행위만 일삼았던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Column/3/all/20170304/83161080/1#csidx4086a1b9d3bede5a3ab00f133151a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