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의 10가지의 색다르고 다양한 맛을 지닌 소설집으로 유쾌한 반란과 익살을 동시에 보여준다. 표제작 「청춘가를 불러요」를 포함한 10편의 단편에는 삶의 깊은 무게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배되어 있다.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조금은 컬트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번 소설집은 가벼워 보이나 결코 가볍지 않고 경쾌한 삶의 모습을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세세하고 소소하게 펼쳐 보인다. 때로는 알싸하게 때로는 톡 쏘는 느낌처럼 그의 소설들은 바닥을 겪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깊이와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저자 한창훈
- 저서(총 37권)
-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 세상에 나왔다.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것과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에 낚시를 시작했고 아홉 살 때는 해녀였던 외할머니에게서 잠수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사십 전에는 기구할 거라는 사주팔자가 대략 들어맞는 삶을 살았다. 음악실 디제이, 트럭운전사, 커피숍 주방장, 이런저런 배의 선원, 건설현장 막노동꾼, 포장마차 사장 따위의 이력을 얻은 다음에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로는 한국작가회의 관련 일을 하고 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시로 거문도를 드나들었다.현대상선 컨테이너선을 타고 두바이와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갔으며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에 승선해 베링해와 북극해를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그 항해를 떠올리며 먼 곳으로 눈길을 주곤 한다. 그리고 문득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고 쓰고, 이웃과 뒤섞이고, 낚시와 채집을 하며 지내고 있다.그동안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소설로 써왔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청춘가를 불러요』 『나는 여기가 좋다』『그 남자의 연애사』, 장편소설 『홍합』 『열여섯의 섬』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꽃의 나라』, 산문집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등을 냈으며 어린이 책으로는 『검은 섬의 전설』 『제주선비 구사일생 표류기』가 있다. 한겨레문학상, 요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받았다.
바위 끝 새
이제 그곳에는 봉네가 없다
주유남해(舟流南海)
여인
깊고 푸른 강
해는 뜨고 해는 지고
복국 끓이는 여자
그 사랑
청춘가를 불러요
꽃 피는 봄이 오면
작가의 말미식가들의 지친 혀를 달래는 담박소쇄한 맛의 소설
때론 알싸하고 때론 톡 쏘는 맛의 소설로 돌아온 한창훈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는 손여사와 이영감. 어느 날 우연히 포르노테이프를 함께 보게 된 그들은 거침없는 입담을 풀어놓는다. 쓸쓸하면서도 한편으로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유쾌함을 담은 「청춘가를 불러요」를 비롯하여, 산골로 요양을 와 있는 사내와 마당 옆 논 주인 부강댁이 티격태격하며 정을 쌓아가는 「꽃 피는 봄이 오면」, 「주유남해(舟流南海)」까지 소설집에서는 나이듦에 대한 생각과 생활, 현 세태를 구석구석 날카롭게 꼬집으면서 풍자하고 있다. 단편「여인」은 여성의 험난한 삶과 세월의 아픔이 물씬 풍기는 수작이다. 「이제 그곳에는 봉네가 없다」, 「복국 끓이는 여자」, 「깊고 푸른 강」, 「해는 뜨고 해는 지고」 등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대한 물결로 밀려오는 삶의 변화와 그 속에서의 고독과 외로움, 헛헛함을 절실하게 그리고 있다.책속으로
제가 그 사람을 못 잊어하고 심지어는 닮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충동적으로 간병했던 게 무엇인가를 생각했어요. 아,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정상적으로 헤어지지를 못했던 것이죠. 그만 안녕. 이제 그만 만나. 이렇게 이별을 했더라면 훨씬 일찍 마음을 정리했을 거예요. 제가 그 사람에게 지금껏 잡혀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더군요. 단 한 번만 그 사람이 찾아와서 스무하루 동안 있었던 일은 잊자고 말했어도 전 고개를 끄덕거렸을 거예요. 그 사람은 시작이 없었으니 끝도 없는 것이겠지만 전 시작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끝이 필요했어요. 끝이. 그래야 그 다음 시작을 할 거 아니겠어요. -「바위 끝 새」 중에서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냥 여자라고 할 수도 있고 말없이 검지로 머리통 옆에 동그라미 하나 그려낼 수도 있다. 혀를 찰 수도 있고 흐뭇하게 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그를 확연하게 가리킬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하천 주변에 살고 있는 이들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달리 말하면 그들은 모두 봉네를 잘 알고 있다. 이름만 듣고도 바로 누구인지 알고 길 가다가 언뜻 스쳐도, 도대체 배달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하여 인건비 싼 맛에 두고 쓴다는 얼음가게 조수 손군까지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까 봉네는 사람들이 잘 안다고 해도 말이 되고 통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그런 이였다. -「이제 그곳에는 봉네가 없다」 중에서
"여자가 남자를 안다는 게 늘 그런 과정을 겪더군요. 세상을 알기도 전에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알게 되고 그러다가 이별을 하고. 특히 항구란 만나고 헤어지는 게 늘 되풀이되는 곳이죠. 사내는 바다로 가고 여자는 도시로 가서 또다시 외로워지고." -「여인」 중에서
그래, 웃는 게 나을 일이었다. 세월이란, 나이란, 그게 뭐 별다른 것이 아니고 어리고 젊었던 것이 늙어간다는 딱 그거 하나인데, 그거 하나로 출중한 게 있어 이렇듯 울 일도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늙어가는 것 하나로 선방의 고덕 대승이 될 수는 없듯이 그들의 웃음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웃음이란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울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얼굴이기도 하니까. -「 깊고 푸른 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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