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동아일보 문화부 유윤종 선임기자의 2007.06.15 칼럼입니다. 슈만의 교향곡 ‘봄’에 대해 음악애호가 A와 음악 칼럼니스트 B 두 사람의 대화를 빌려 재미있게 쓴 글이라 올립니다.
슈만, 슈베르트 계보 잇다
글: 유윤종(동아일보 문화부 선임기자)
A: 이제 누구를 불러올까요? 1809년생인 멘델스존, 1810년생인 슈만. 연배도 비슷하고, 슈베르트의 교향곡에서 19세기 후반의 풍요한 교향곡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 점도 공통점이군요. 두 분이 또한 친구였고. 한 살이라도 많은 멘델스존을 불러올까요?
B: 순서로 따진다면 그게 맞겠죠. 그러나 우리는 슈만을 먼저 만나겠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에요. 하나는, 이제 3월이잖아요? 슈만의 첫 번째 교향곡인 ‘봄 교향곡’을 소개하기에 계절감이 그만이죠.
A: 찬성이에요. 그러다 보면 5월의 화창한 날에는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도 나오겠군요.
B: 멀리 보시는 성격이군요. 또 한 가지는, 앞선 주인공 슈베르트의 영향력을 슈만이 더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슈베르트의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그 얘기를 꺼내는 게 좋겠네요.
A: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봄’ 교향곡은 슈만이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을 찾아낸 이후에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인 거죠?
B: 네, 1939년 말에 스물아홉 살 한창 나이였던 슈만이 연인이었던 클라라 비크에게 쓴 편지를 볼까요. 이렇게 적었네요.
“오늘 슈베르트의 교향곡 연주를 들었소. 이 곡에서는 마치 악기들이 사람의 음성처럼 들리오. 그리고 마치 네 권으로 된 소설처럼, 마치 천국처럼 크고 길어요. 행복을 느꼈소. 앞으로 당신이 나의 아내가 되고, 나도 이런 교향곡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좋으련만!”
A: 역시 ‘그레이트’ 혹은 ‘무궁동 교향곡’ 이야기군요. 듣는 제 가슴이 막 벅차오르는 것 같아요. 이 젊은 작곡가의 꿈은 결국 둘 다 실현되잖아요.
B: 그렇죠. 신혼의 단꿈을 인생의 봄날로 부르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것이 거기에 해당되겠어요. 그 행복감을 구비구비 선율에 담아낸 야심작이 바로 슈만의 첫 교향곡이었죠.
A: 슈만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의 반대 때문에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랫동안 힘들어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죠. 저 편지를 쓸 당시에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궁금해요.
B: 한 마디로 한창 힘들었죠. 저 편지가 나온 바로 이듬해에야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거든요.
A: 여기서 지난 회 이야기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슈만과 슈베르트의 교향곡이 가진 남다른 사연을 다시 설명해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B: 1939년, 빈을 방문한 슈만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묘지를 찾아 경의를 표한 뒤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를 방문합니다. 페르디난트는 이 젊은 작곡가에게 동생이 죽은 뒤 10년이 지나도록 공개되지 않았던 교향곡 제9번 ‘그레이트’ 악보를 넘겨주었죠. 악보를 넘겨보고 경탄한 슈만은 이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곡의 공개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A: 그리고 당시 지휘자로 이름을 날리던 멘델스존에게 이 작품을 전해주었고.
B: 작품은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1939년 멘델스존의 지휘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앞에 슈만이 연인 클라라에게 쓴 편지는 그 두 번째 공연을 보고 기쁨과 흥분에 차서 쓴 것이죠. 슈만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다리를 잇는 슈만의 장대한 교향곡에서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교향악의 가능성을 느꼈을 겁니다.
A: 슈만은 곧바로 첫 교향곡에 착수했나요?
B: 그렇진 않았습니다. 아직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1841년 1월, 슈만은 우연히 무명 시인이었던 아돌프 뵈트거의 시 한 편을 접하게 됩니다. “옮겨라, 그대 걸음을 옮겨라, 골짜기에 봄이 싹트고 있나니…” 로 시작되는 시였는데요….
A: 생각보다는 밋밋하게 들리는 시네요. 슈만으로서는 한창 행복했던 시기였으니 눈에 딱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어요.
B: 그랬겠지요. 그런데 봄에 대한 시를 읽고 교향곡을 착상한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갈 뻔한 일이지만 그것은 교향곡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발상의 전환을 뜻하는 거였어요.
A: 왜죠? 하이든도 ‘놀람’ ‘시계’ 같은 제목으로 교향곡을 썼고, 베토벤도 ‘전원 교향곡’을 남겼잖아요. ‘운명’이나 ‘영웅’은 베토벤이 의도한 제목인지 의심스럽다고 해도….
B: 조금 다릅니다. 일단 ‘놀람’이나 ‘시계’는 시적인 표제라고 할 수 없죠. 베토벤의 ‘전원’도 다른 문학 장르의 작품과 연계된 제목은 아니었습니다. 낭만주의 예술의 특징 중 하나인 ‘장르 허물기’가 슈만의 시대에 와서 시작됐음을 바로 ‘봄 교향곡’에서 알 수 있는 거예요. 한 발 더 나아가면, 슈만의 교향곡 제3번 ‘라인’이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교향곡 등도 지극히 낭만적인 발상의 산물임을 알 수 있어요. 지역색이나 여행의 감흥을 교향곡으로 만든다는 것.
A: 이해가 갑니다. 그렇다면 하이든의 ‘파리 교향곡’은 어떻게 된 것인지, 모차르트의 ‘프라하’, ‘린츠’ 교향곡은 어떤 발상인지 꼬투리를 잡고 싶지만, 안 하겠어요. 그 제목들은 단순히 창작 시기에 작곡가가 접했던 환경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지 그 지역을 묘사한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B: 잘 하셨습니다. 우리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베토벤식의 기념비적인 고전적 이상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에 대한 사랑으로 초기 낭만주의 교향곡의 성격을 정의했죠. 그렇지만 슈베르트에게 “당신은 낭만주의 교향곡 작곡가였죠”라고 물어보면 “예?” 하고 눈을 크게 뜰지도 몰라요. 그런 개념 자체가 낯설었겠죠. 그렇지만 슈만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그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또는 “바로 그거야!”라며 기뻐했겠죠.
A: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던 모습을 보아도 슈만은 낭만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요? 후후.
B: 슈만은 누구보다도 낭만주의 기본 정신에 충실했고, 문학에서 붐을 이뤘던 낭만주의 정신을 음악 분야에 누구보다도 빨리, 충실하게 도입한 주인공이었습니다. 낭만주의 운동이 왕성했던 라이프치히와 하이델베르크에서 대학 수업을 하며 문학도들과 교유했고, 기행에 가까운 당시 대학사회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익혔죠. 문인이 된다는 것까지는 꿈꾸지 않았을 지라도 글쓰기에는 자신이 있었던 문학청년이었던 모양이에요. 그가 음악세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피아니스트나 작곡가가 아니라 유능하고 눈에 띄는 문학평론가였으며 음악 저널리스트였으니까요.
A: 그런데 슈만이 위대한 교향곡을 쓰기로 마음을 굳히는 데는 그 자신이 악보를 찾아낸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이 큰 역할을 했다고 소개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두 작품이 많이 닮았나요, 슈베르트의 제9번과 슈만의 첫 교향곡이?
B: 글쎄요, 딱 듣고 “와, 두 교향곡은 실제 닮았구나”라고 할 만한 점은 사실 찾아내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있다면 첫 악장이 금관만의 서주로 시작한다는 정도일까요. 그런 소소한 점보다는 슈베르트의 제9번 교향곡을 통해 ‘낭만주의 시대에도 교향곡의 구실이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슈만에게는 더 큰 수확이었을 거예요.
A: 슈만도 그런 얘기를 했나요.
B: 암시하는 대목은 많습니다. 이 교향곡이 나오기 한 해 전 <라이프치히 음악신보>에 기고한 기고문을 볼까요. ‘베토벤의 천분을 갖지 않은 채 베토벤의 교향곡을 뒤따르면 안 된다. 슈베르트는 여섯 개의 교향곡을 통해 이미 독자적인 교향곡 작법을 확보했다. 이 작품에서는 네 개의 악장이 개성 있는 배우처럼 역할을 나누고 있다.’
A: 몇 가지가 느껴지네요. 당시 많은 작곡가들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슈만이 느꼈던 것이나….
B: 또 한 가지가 느껴집니다. 베토벤은 교향곡을 네 악장이 긴밀하게 엮인 집중적인 구조로 썼지만 슈베르트 이후의 낭만주의 교향곡에서는 마치 벽면에 걸린 네 개의 그림처럼, 더 연관성이 헐거워질 수 있다는 거죠. 슈만이 항상 이 명제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어요. 제1번 바로 다음에 쓰인 제4번 교향곡은 오히려 베토벤보다 더 꽉 묶인 구조를 택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5악장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제3번 ‘라인 교향곡’에 이르면 구조는 더 느슨해지죠.
A: 어서 슈만 교향곡 제1번 ‘봄 교향곡’을 들어봐야죠? 음, 약간 귀가 따가운 1악장 금관 서주는 낯설지만, 이어지는 현악기의 통통 튀는 리듬이 신선하네요.
B: 예전에 저명한 문학평론가 한 분이 그러셨죠? 서양 언어에서 봄을 나타내는 ‘스프링’ ‘프륄링’(독일어) ‘프랭탕’(프랑스어) 등은 모두 통통 튀는 신선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우리말의 ‘봄’은 조는 듯, 꿈꾸는 듯하다고 하셨던가요….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A: 마지막 4악장도 역시 ‘스프링 심포니’ 또는 ‘프륄링 쥠포니’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활기찬 느낌이군요. 어떻게 보면 물기를 탁탁 털어낸 야채샐러드 같구요, 경쾌한 하이든 교향곡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B: 음, 반면 느릿한 2악장은 조금 더 명상적이죠. 협주곡도 그렇지만, 슈만은 느린 악장에 그다지 절절한 애수를 표현하지는 않았어요. 호젓한 느낌을 주는 짧은 악장으로 끝내곤 하죠. 그렇지만 빠른 악장들에서 로맨틱한 느낌들이 충분하니까, 오히려 전체적인 균형으로는 어색하지 않다고 할까.
A: 구체적으로 봄의 어떤 모습들을 나타냈다는 설명도 있나요?
B: 중요하면서도 있을 법한 의문이네요. 슈만은 1악장부터 차례로 ‘봄의 시작’ ‘황혼’ ‘즐거운 동무들’ ‘무르익은 봄’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그랬다가 나중에 삭제해 버렸죠.
A: 왜죠? 딱 어울리는 제목들인 것 같은데요. 저도 처음부터 그 제목들을 알았다면 좀 더 즐겁게 들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왜 삭제했을까요?
B: 순음악으로서의 교향곡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교향곡은 네 악장이 잇따라 지어내는 형식의 균형과, 주제의 구성이 자아내는 미학으로 감상해야 한다.
A: 그게 무슨 얘기죠? 형식적 균형은 균형이고, 교향곡에는 뭘 나타낸다는 표제가 있으면 안 되나요? 게다가 글자 그대로 낭만주의 교향곡인데요! 곡 전체를 나타내는 ‘봄’이라는 제목도 있고….
B: 저런, 화가 나셨나요? 사실 이 문제는 19세기 내내 작곡가들을 괴롭혔던 문제이기도 해요. 아마 슈만도 교향곡이 표제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음악계의 보수적인 인물들이 “교향곡은 엄정한 형식에 충실해야지 문학적 내용 같은 것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라고 욕할까봐 두려웠겠죠. 어쨌거나 낭만주의 시대 내내 교향곡에 표제를 붙인다는 것은 뭐랄까, 조금 두려운 문제였습니다. 마음속의 환상을 나타내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그건 소리로 표현되는 환상이어야지 ‘글’을 사용한다는 것은 음악이 글에 종속되는 거라고 봤던 거죠.
A: 하지만 상세한 표제를 써넣은 ‘환상 교향곡’도 있잖아요.
B: 그렇죠. 차이콥스키의 ‘만프레드 교향곡’도 있죠. 하지만 이렇게 각 악장에 표제를 단 교향곡들이 베를리오즈의 교향곡 제1번이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으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결국 교향곡이되 정식의 교향곡으로 취급받지는 않은 거죠. 일종의 뮤턴트(변종)랄까. 차이콥스키의 경우 제4번 교향곡을 쓸 때 자세한 문학적 내용을 상상했지만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만 이것을 공개했고 대중들 앞에 발표하지는 않았지요.
A: 그렇군요. 그래도 부지런한 음악학자들 덕에 슈만 교향곡 제1번에 붙었던 각 악장의 제목들이나, 차이콥스키가 제4번 교향곡을 쓸 때 상상했던 내용들이 오늘날 알려지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감상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도움이 많이 된다구요.
B: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