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송나라가 오대십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계기가 된 사건]진교병변(陳橋兵變)

진교병변(陳橋兵變) 후주 세종의 뒤를 이은 것은 일곱 살의 공제였다. 황태후는 조광윤에게 요나라의 공격을 방어할 것을 명했고, 이를 위해 진교역에 진을 치고 있던 조광윤은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개봉으로 돌아온 조광윤은 공제에게 황제를 선양 받고 송나라를 건국하니 이것이 진교병변이다. 이로써 혼란의 오대십국 시대가 가고 통일 왕조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송나라 역사는 이후 319년간 지속되었다. [전문 보기]조광윤의 송나라 건국 , 진교병변 후주 세종의 뒤를 이은 것은 일곱 살의 공제였다. 황태후는 조광윤에게 요나라의 공격을 방어할 것을 명했고, 이를 위해 진교역에 진을 치고 있던 조광윤은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개봉으로 돌아온 조광윤은 공제에게 황제를 선양 받고 송나라를 ...[중국사를..

[5대 10국 시대: 북주의 초대 황제,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노지심"의 모델이 된 인물]郭威(곽위)

주 태조 곽위(周 太祖 郭威, 904년 9월 10일 ~ 954년 2월 22일)는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초대 황제(재위 : 950년 ~ 954년)이다. 자는 문중(文仲). 절일은 영수절(永壽節)이다. [Guo Wei (Chinese: 郭威) (10 September 904[1] – 22 February 954[2]), also known by his temple name Taizu (太祖), was the founding emperor of imperial China's short-lived Later Zhou during th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reigning from 951 until his death. Nicknamed "Sparrow Gu..

[한국전쟁:공산 중국군이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전투]삼강령 전투

삼강령 전투 중국은 1952년 하반기 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상감령에서 의지와 끈기로 버텨내 결국 북한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관점에서 상감령전투는 흔했던 고지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중국이 북한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결정적 전투였다. 중국군사과학원에서 출간한 항미원조전사는 상감령전투에 대해 ‘1952년 10월 14일에서 11월 25일까지 43일간의 전투’라며 ‘전투가 전역(戰役) 규모로 발전되었다’고 설명한다. 또 유엔군과 국군의 전투 참가 병력은 6만 명이라고 주장하면서 기간 중 190만 발의 포탄을 쐈다고 간주한다. 포병 화력 운용 밀집도에 관한 한 제2차 세계대전 수준을 넘는 격전이었다는 것. 이에 비해 중국은 4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포탄 40여 만 발을 소모했다고 소개하..

[전한(서한):무제기에 등용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했으나 말년이 좋지 않았던 인물]상홍양(桑弘羊)

상홍양(桑弘羊, 기원전 152년 ~ 기원전 80년)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하남군 낙양현(雒陽縣) 사람이다. 무제 때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전매제 등을 실시하여 재정면에서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본디 장사꾼의 자식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셈에 탁월하여 열세 살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중(侍中)이 되었다. 원수 3년(기원전 120년), 소금·철·술의 전매를 실시하여 막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공으로 대농승(大農丞)에 임명되었고, 이후 균수법을 추진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110년) 치속도위(治粟都尉) 겸 영대농(令大農)에 임명되었고, 지방에 염철관(鹽鐵官)·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그 정책을 구체화하는 한편 각지의 물류를 조정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다. 이 공으로 좌서장 작위를 받았다...

[토번(티베트): 당나라가 신라와의 전쟁(나당전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인물]가르친링 (論欽陵)

가르친링[論欽陵(논흠릉)[1](? ~ 699년) 토번의 무장 겸 재상. 정식 이름은 가르 친링 첸드로. 당시 천조국인 당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토번의 영토를 확장시킨 토번의 기틀을 마련한 명장이다. 덕분인지 미국 군사잡지 암체어가 위대한 장군 100명을 선정했을때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다만 후술되어 있듯 최후에는 숙청당했다. 아버지가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을 성사시킨 가르통첸(薛東贊)이다.[2] 667년에 가르통첸이 사망 이후 당과의 관계에 전면적으로 등장했으며, 이후에 685년 형인 가르친네(論贊悉若)가 죽자 재상의 자리까지 장악했다. 중국 기록에는 처음부터 가르친링이 재상인양 묘사되고 있지만 이건 당시 가르친링이 대외적으로 활동한게 크다. 형인 가르친네가 곧 사망했다고 하지만 티베트 기록은 ..

[당 현종 시대 : 역대 다른 환관과 달리 권력을 남용않고 본분에 충실했던 환관]고력사[高力士]

고력사[高力士:690년 ~ 762년] 1. 개요 당나라의 환관. 당현종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본명은 풍원일(馮元一)로, 고력사라는 이름은 훗날에 개명한 것이다. 조부 이전에는 대대로 벼슬을 지냈던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풍군형(馮君衡)이 죄를 지어 관직과 가산을 몰수당했고, 풍원일은 10세의 나이로 노비가 되었다. 698년에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가 측천무후를 모셨다. 이름이 고력사로 바뀐 사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기록이 전한다. 신당서와 구당서에 의하면, 당태종의 셋째 아들 이각의 아들 이천리가 풍원일과 또 다른 환관을 궁에 바치면서 금강역사(金剛力士)에서 따와 금강과 력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풍력사가 되었고, 나중에 죄를 지어 측천무후에게 매를 맞고 궁에서 한 번 쫓겨났을..

[미군정기 내각총리대신(44대)]시데하라 기주로(幣原 喜重郎)

시데하라 기주로(일본어: 幣原 喜重郎, 1872년 8월 11일 ~ 1951년 3월 10일)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1945년 10월 9일부터 1946년 5월 22일까지 제44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그 이전에는 외무 차관, 주미 대사, 가토 내각· 하마구치 내각의 외무 대신을 지냈다. 그는 외무 대신 시절, 일본 군부에 저항해 미국과 영국에 대한 협조,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등의 외교 방침을 지향하였고, 전 후에는 쇼와 천황에게 조각 명령을 받아 미군의 점령 하에 시데하라 내각을 조직하였다. 부인 마사코(雅子)와는 런던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혼인하였다. 장인은 미쓰비시 재벌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이다.(In 1903 he married Masako Iwasaki, who came f..

[제국 일본-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황도파 장교에게 암살당한 인물]나가타 데쓰잔(永田 鉄山)

나가타 데쓰잔(일본어: 永田 鉄山, 1884년 1월 14일 ~ 1935년 8월 12일) 은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일본 군벌 통제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일본 육군성 군무 국장, 참모본부 제2부장, 보병 제1여단장 등을 지냈다. 데쓰잔은 1884년, 지금의 나가노현 스와시에서 태어났다. 나가타는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수재로 군무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 장래의 일본 육군 대신으로 거론되는 인물이었지만, 일본 육군 내부의 파벌 분쟁과 관련돼 군무 국장실에서 일본 육군 중좌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 에게 암살되었다. 암살의 원인은 황도파의 중심 인물 육군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를 교육 총감직에서 경질한 일이었다. 나가타는 사..

[극우범죄단체 청년에게 암살당한 19대 총리대신]하라 다카시(原 敬)

하라 다카시(일본어: 原 敬, 1856년 2월 9일 ~ 1921년 11월 4일)는 일본의 정치가이고, 1918년 9월 28일부터 1921년 11월 4일까지 1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냈고 공식적으로 하라 게이 또는 하라 사토시라고 불렀으며, 어릴 적 이름은 겐지로(일본어: 健次郎)이다. 1856년 모리오카 번사 하라 나오하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75년 분가 독립해 스스로 평민이 되었고 기자 생활을 하며 외무성, 농상무성에서 근무하다가 1896년 주한 공사로 임명되었다가 1897년 사임하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사장이 되었다. 1900년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참여해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체신상을 맡았고 1902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내각 내무상을 역임한 뒤 1914년 ..

[청나라 말기:중국 개혁을 위해 힘쓴 인물]장지동(張之洞)

장지동(중국어 정체자: 張之洞, 병음: Zhāng Zhīdòng, 1837년 ~ 1909년)은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다.[1]보수적인 대외 강경론자로 독일식 군대를 편성하고, 경한 철도를 부설하였다.[2] 그는 유교적인 전통을 살리면서 근대화 정책을 취하였으며,[3]평향 탄광·한양 제철소·방직 공장·생사 공장 등을 창설하였다. 1837년(도광 17년), 직례(현재의 하북성 남피)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구이저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852년(함풍 2년)에 15세의 나이로 향시에 합격했다. 1863년(동치 2년), 26세에 진사(탐화)로, 다음 해 1864년에는 한림원 편수, 문역각 교리를 역임했다. 1880년(광서 6년), 서태후가 억지로 광서제를 옹립하자 관리인 오가독이 죽음으로서 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