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61

[현대: 펑위샹의 역사 교사, 문화대혁명 때 자결한 인물]젠보짠(翦伯贊)

젠보짠(翦伯贊, 1898년 4월 14일 – 1968년 12월 18일)은 위구르족 출신의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후난성 타오위안현에서 태어난 젠보짠은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지자가 되었다. 1952년부터 죽을 때까지 베이징 대학 부총장을 역임했다. 그의 세대의 권위 있는 많은 학문적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문화 대혁명 기간 박해를 받았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젠보짠은 1968년 자살했다.[위키백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5〉 대역사가 젠보짠 “펑위샹 장군은 중국 진보의 상징” 1968년 문혁 발발 2년 후, 비판대에 끌려 나온 젠보짠. [사진 김명호]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은 사후에 총명한 며느리를 봤다. 1978년 가을, 해양지질연구소는 자료실 요원 위화신(余華心·여화심)을 ..

[제국 일본:도조 히데키가 연대장일 때 사단장이던 인물]마사키 진자부로(眞崎 甚三郎)

마사키 진자부로(일본어: 眞崎 甚三郎, 1876년 11월 27일 ~ 1956년 8월 31일)는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이자 일본 군벌 황도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인물과 경력 마사키 진자부로는 1876년 사가현에서 태어났다. 189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종군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 제19기를 졸업하였다. 이때 동기 중에선 후에 일본 육군 장성이 되는 아라키 사다오, 아베 노부유키, 혼조 시게루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가 군에서 맡았던 주요 직책으로는 군무국 군사 과장, 근위 보병 제1연대장, 보병 제1여단장, 일본 육군사관학교장, 일본제국 육군 제8사단장, 일본제국 육군 제1사단장, 타이완 주둔군 사령관, 참모 차장 겸 군사 참의관 등이 있으며, 특히 일본..

[에도 시대: 최대 유곽촌]요시와라

요시와라(일본어: 吉原)는 에도 시대 에도 교외에 만들어진, 막부 공인 매춘 업소가 모여 있는 유곽(요시와라 유곽) 및 그 지역의 이름이다. 현재의 도쿄도 다이토구 센조쿠 4번지 및 3번지의 일부이다. 현재 이 일대는 증기탕 업소들이 모여 있다. 요시와라의 유녀들을 촬영한 착색 흑백사진. 같이 보기 가라유키상 판판 [위 출처: 위키백과] 요시와라 유곽 - 나무위키 개요 상세 역사 구조 용어 실상 미디어 매체 여담 吉原遊廓 (よしわらゆうかく) 통칭 요시와라로 일본 에도 시대 때 생겨난 거대한 유곽촌(집창촌)을 일컫는 말이다. 교토의 시마바라 유곽(島原遊郭), 오사카의 신마치 유곽(新町遊郭)과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으며,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유곽촌이었다. 요시와라는 18세기에 약 1,750명의 여성이 살..

[제국 일본-도조 히데키로 부터 존경받았으나 황도파 군인-육군 중좌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에게 살해당한 인물]나가타 데쓰잔(永田 鉄山)

나가타 데쓰잔(일본어: 永田 鉄山, 1884년 1월 14일 ~ 1935년 8월 12일) 은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일본 군벌 통제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일본 육군성 군무 국장, 참모본부 제2부장, 보병 제1여단장 등을 지냈다. 약력 데쓰잔은 1884년, 지금의 나가노현 스와시에서 태어났다. 나가타는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수재로 군무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 장래의 일본 육군 대신으로 거론되는 인물이었지만, 일본 육군 내부의 파벌 분쟁과 관련돼 군무 국장실에서 일본 육군 중좌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에게 암살되었다.[1] 암살의 원인은 황도파의 중심 인물 육군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를 교육 총감직에서 경질한 일이었다. 나..

[전국시대:시마즈 가문이 규수 지역에서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된 전투]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

오키타나와테 전투 일본의 전국 시대인 1584년에, 다카노부 류조지가 아리마 하루노부ㆍ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따위의 연합군과 벌인 전투. 연합군 쪽이 병력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전하였다. 이로써 류조지 가문은 쇠퇴하고, 시마즈 가문이 규슈(九州) 지방에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오키타나와테 전투:[전문을 보려면 옆 제목 클릭] 전쟁 정보 오키타나와테 전투는 일본 센고쿠 시대에 히젠국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 현 나가사키현)에서 일어난 전투로 규슈의 센고쿠 다이묘인 류조지 다카노부와 아리마 하루노부·시마즈 이에히사 연합군 간의 전투이다. 나와테(畷)라는 말은 습지대에 난 작은 길을 의미한다. [위키백과] [정보]책:일본 전국시대 130년 지정학(지도로 읽는다)저자 코스믹출판 | 역자 전경아 | 이다미..

[전국시대-시코쿠 지역을 평정했으나 아들 대에 몰락하는 비운을 당한 도사번의 당주]조소카베 모토치카

조소카베 모토치카(일본어: 長宗我部 元親 ちょうそかべ もとちか[*], 덴분 8년(1539년) ~ 게이초 4년(1599년 5월 19일))는 도사의 센고쿠 다이묘다. 조소카베씨 제20대 당주. 전성기에는 시코쿠의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을 받고 항복, 이후에도 도사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도 참전했다. 위키백과] ---------------------------------------------------------------------------------- [전문보기]조소카베 모토치카 일본 무사 조소카베 모토치카 ~ 게이초 4년(1599년 5월 19일))는 도사의 센고쿠 다이묘다. 조소카베씨 제20대 당주. 전성기에는 시코쿠의 대부분을..

[전국시대:우에스기 겐신이 오다 노부나가를 이긴 전투]데도리가와 전투

데도리가와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데도리가와 전투교전국지휘관병력피해 규모 센고쿠 시대의 일부 우에스기 가문 오다 가문 우에스기 겐신 시바타 가쓰이에 20,000명 48,000명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음 1,000명 이상 오다 노부나가의 전투 아카쓰카 전투 가야즈 전투 무라키토리데 전투 이노 전투 우키노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 도호라 전투 고노시마 전투 이나바야마성 전투 간논지성 전투 오카와치성 전투 가네가사키 전투 아네가와 전투 노다·후쿠시마성 전투 시가의 진 히에이산 방화 마키시마성 전투 이치조다니성 전투 오다니성 전투 나가시마 포위전 다카야성 전투 나가시노 전투 에치젠 포위전 덴노지 전투 제1차 기즈가와구치 전투 데도리가와 전투 기슈 정벌 아리오카성 전투 제2차 기즈가와구치 전투 이가..

[일제의 조선 지식인 탄압 및 변절 유도 사건]수양 동우회 사건 [修養同友會事件]

수양 동우회 사건 [修養同友會事件] [요약]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1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한 사건. 당시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가 각 지부에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담은 문서를 발송한 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그 배후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동우회가 수사망에 들게 되었다. 이에 안창호를 비롯해 이광수, 김성업 등 동우회의 지역 지부 대부분의 회원들이 검거되었고, 재판 끝에 적게는 2년, 많게는 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재판에 회부되기 전, 최윤세, 이기윤은 고문 끝에 감옥에서 사망했고, 김성업은 불구자가 되었다. 동우회사건이라고도 한다. 1937년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에서 금주운동 계획을 세우고 그해 5월 '멸망에 ..

[여성 무사] 여무예자(女武芸者 :온나부게이샤Onna-Bugeisha)

여무예자(일본어: 女武芸者 온나부게이샤[*])는 일본의 여성 무사, 즉 여성 사무라이를 뜻한다. 지배 계급, 특히 무사 계급의 여성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무기의 사용법을 익히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여무예자들로는 한가쿠 고젠, 도모에 고젠, 나카노 다케코, 타치바나 긴치요 등이 있다.[위키백과] ------------------------------------------------------ Onna-Musha (女武者, lit. "Female Martial Practitioner")--or Onna-Bugeisha (女武芸者,lit. "Female Martial Arts Practitioner")--is a term referring to female warriors in pre-modern Ja..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투- 선발대장으로 참가하여 패하고 자결(?)한 인물] 이치키 기요나오(一木淸直)

이치키 기요나오(일본어: 一木淸直, 1892년 10월 16일 ~ 1942년 8월 21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 생애 시즈오카현 출신으로 191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임관 후 보병학교 교관, 중국 주둔 보병 1연대 3대대장을 거쳐 1937년 노구교 사건 당시 중좌로 진급하고, 1942년 미드웨이 섬 점령부대인 이치키 지대의 지대장이 된다. 노구교 사건 당시, 발포 명령이 내려지자 "정말로 발포합니까?" 했다는 일화서 보듯 소심하고 관료적인 장교였다고 전해진다. 실전에서도 미드웨이 전투 당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과신해 충분한 정찰 없이 행군하다 갑자기 나타난 미국 해병대에 대해 준비안된 상태에서 무리한 백병전을 명령해 부대를 전멸시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