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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후기의 작품을 중심으로---
女史의 시도 읽어보았기에, 제법 지켜야할 지조는 알고있지요.
옆에서 改嫁하라 권하며, 의젓하고 좋은 사내 있다하네.
백발에 신부같은 얼굴이면, 어찌 연지 곤지 부끄럽지 않겠나.
柳夢寅(1559-1623)의 <孀婦>19]라는 5言律詩다. 행간의 의미에 관계없이 칠순에 가까운 홀어미가 수절하면서 사는 내면의 정감세계가 드러난다. 시인은 守節이 절대화된 상황과 힘겹게 살았던 홀어미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守節은 당시 여성의 삶을 지배하는 수단 중의 하나였다. 당시 貞節관념의 최정점에 있던 ‘烈’은 여성을 질곡으로, 혹은 자기 위안의 탈출구로, 때로는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예시한 <孀婦>도 늙은 홀어미의 모습을 통해 당대 여성의 삶의 모순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남성적 관점에서 여성정감을 재 구성한 ‘玉臺體’의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가부장제의 질곡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한시는 문학적 사유를 어떻게 발휘하여 그 문제를 그려내고 있던가? 그리고 문학적 사유를 통해 형상화한 그 시적인 지향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떠한 모습의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는가?
본고는 이러한 몇 가지 문제에 단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주로 ‘열’이념이 경직화되어, 여성들의 삶에 보다 깊이 관여하는 이조 후기의 한시를 중심 축에 놓고 논의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필자는 생물학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생래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논지 곳곳에 숨겨져 있는 남성적 시각과 편견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임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20] ?연암집? 권1, 「열녀함양박씨전?, “乃國朝四百年來, 百姓旣沐久道之化, 則女無貴賤, 族無微顯, 莫不守寡, 遂以成俗. 古之所稱烈女, 今之所在寡婦也”
烈은 여성이 한 남자를 위해 지키는 곧은 절개를 말한다. 한 여성이 자신의 절개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그 장애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에 따라 烈, 혹은 不烈이 된다. 예컨대 외간 남성의 유혹과 강압, 改嫁의 권유, 남편의 억압, 남편의 병, 외적의 침략, 맹수로부터의 습격, 관의 횡포, 남편을 따라 죽는 殉節, 남편 사후 守節하는 등이 烈, 不烈의 유형에 들 수 있다. 21] 이 경우, 여성의 대응방식에 따라 烈과 不烈로 나뉜다.
이조시대 문헌에 자주 보이는 毁節, 失節, 守節, 貞節, 殉節 등은 모두 ‘烈’의 외연을 말하는 것이거니와, 이것은 ‘烈’의 對他로 설정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중에서 烈行에 관련된 경우, 烈女․烈婦․節行 등으로 칭송되었고, 그것에 반하는 경우 不烈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不烈’도 ‘烈’이 전제되어야 성립되는 것이므로 ‘烈’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烈’을 위시하여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의 지향과 실현은 兩性 중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강요할 사항도 아니며, 반드시 어느 한 性에만 국한된 것도 아닐 터이다. 이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본고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덕목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이념화되어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기능하는 ‘烈’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열’은 그 유래가 사뭇 깊다.
?고려사?에 “판서 이하 육품까지의 관리의 처는 남편 사후 3년 이내에 改嫁를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失節로 간주하여 처벌하고, 수절을 하는 자는 정려문을 세워두고 상을 내린다는 언급이 있다.” 22]
이러한 관습은 이조시대에 오면서 통치논리와 맞물리면서 점차 강화되고, 마침내 ‘정절’의식은 改嫁禁止法이라는 법제적 정리를 거쳐 점차 이념화되어 간다. 구체적으로 “烈女不更二夫”와 “一夫從事”, “三從之道”라는 규범으로 현실화되고, 차츰 지배이념으로 굳어지면서 여성의 삶을 강제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임진․병자 양 전쟁이후, 지배계층은 예학을 정치논리에 따라 이해하고, ‘정절’의식을 하층민에게까지 강요되는 형국으로 발전시킨다. 이에 따라 정절이념은 더욱 경직된다.
일찍이 宋의 程頤가 “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라 하여 失節을 죽음보다 소중한 것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정절’의식을 수용한 조선조 성리학은 이후 많은 변형태를 산생시킨다. 가문을 중시하는 성향과 종법제의 강요, 그리고 부계직계의 가족제도의 강화 등도 그러한 변형태다.
사실 “禮不下庶人”이라는 언급에서 보듯 일반 民들은 신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러한 규범과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무방한 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민들까지 가부장제와 ‘열’이념의 규제를 받는다. 이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열이념이 더욱 규범화 내지 경직화되면서 전일적으로 작동한 데 연유하였다. 특히 국가를 담당했던 지배권력은 이러한 烈이념을 통치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삶을 담보로 자신들의 권력욕과 가문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하였다. 이에 ‘烈’을 둘러싼 규범과 사회적 역기능은 여성의 삶에 그대로 전이되었고, 또한 현실의 작동원리로 着根되면서 더욱 심각성을 더해갔다. 23]
그러므로 한시는 ‘열’을 형상하면서도 다양한 소재를 부분 수용하는 선에 머물고 있다. 예컨대 한시는 열이념의 실현과 인간의 본성이 갈등하는 양상, 구체적으로 정절이념과 성적 본능이 갈등하는 것을 포착한 작품이 적은 편이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서사한시의 경우가 그러하다.
서사한시의 경우, 어떠한 소재를 취해, 어떠한 방식으로 서사방식을 드러내는 가에 따라 ‘野談’이나 ‘傳’, 그리고 ‘記事’가 보여주는 역동적 면을 능가하기도 하고, 주제의식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며, 대개는 한시가 보여주는 일반 문법에 따라 제한적으로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이 점 미리 전제해 둔다. 25]
22]?고려사? 권38 형법1.(아세아문화사, 1972 中, p.853-854) 참조.
23]이조후기의 열녀상에 대한 변모에 대한 개략은 이혜순, <열녀상의 전통과 변모>(?진단학보? 85, 진단학회, 1998) 참조.
24]이에 대해서는 朴珠, 「18세기의 旌表政策」(?국사관논총?, 제22집, 1991)과 이옥경, 「조선시대 정절이데올로기의 형성기반과 정착방식에 관한 연구」(이화여대 석사논문, 1995) 제3장 참조. 구체적으로 열의 유형을 보면,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從死한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대개는 旌閭를 받는데, 주로 ‘열부전’으로 그려지듯이, 傳의 가장 주요한 소재가 된다. 그리고 부모의 개가 종용에 항거하여 목숨을 버린 경우와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신체 중의 일부를 베어 구원한 경우가 있다. 이러한 내용 또한 ‘전’이나 ‘야담’ 등에 자주 보이는 사례들이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 죽음을 무릎 쓰고 복수를 한 경우가 있다. 이 또한 전과 야담에 자주 보인다. 그리고 외간 남자로부터 貞操를 지키기 위해 항거하다가 죽은 경우가 있다. 이 그리고 범에 물려 가는 남편을 살린 경우도 있는 바, 이것은 야담이나 한시에서 더러 보인다.
25]이 외에도 실제로 김려같은 시인은 평등의 감수성을 통해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바, 이는 그의 악부시 ?사유악부?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극히 드문 사례에 속한다.김려의 새로운 감수성과 평등의식에 대해서는 김려 지음 박혜숙 옮김, ?부령을 그리며?(돌베개, 1996) 작가론 참조.
작품에 보이는 기인의 사랑을 받았던 일, 기인이 죽자 서울까지 가서 상복을 입었던 일, 평생 기인을 위해 수절한 것 등은 모두 역사적 사실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일선이 취한 행동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선은 헤어지는 마당에 血書까지 쓰면서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하고 마침내 지속적 사랑도 받아낸다.
그런 다음 일선은 자신의 애정을 지켜나가기 위해 숱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 그녀의 삶의 의미는 혈서와 투신자살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일선은 ‘열’이념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처지였고, 그 삶도 애당초 ‘열’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녀 스스로 삼년상에다 평생 수절까지 하면서 ‘정절’을 지키고 죽은 님을 위해 자살까지 기도한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삶의 자세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 미천한 신분(기생)임에도 진정 자신을 알아주고 인간적 교감을 나누었던 대상에 대한 인간적 배려를 넘어서, 스스로 선택한 사랑에 대해 자아를 확인하고 싶은 방식은 아니었을까? 이는 죽음이라는 길을 택할 때보다, ‘烈’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읽혀진다.
어찌 보면 더 이상 진정한 인간적 소통과 사랑이 불가능한 공간 속에서 자아를 확인하는 방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방식은 세계에 대해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여성을 억압하는 ‘열’이념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리라.
다음으로 成海應(1760-1839)의 서사한시 <田不關行>을 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미천한 출신의 기생 전불관이 구씨라는 양반을 사랑하였다가, 구씨가 떠나고 새로온 사또가 수청들기를 강요하자 자결해 죽는 이야기다. 기생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는 점에서는 앞의 작품과 동일하다. 하지만 시인은 ‘전불관’의 ‘열’에 시선을 두기보다는 인격을 지닌 한 인간으로, 자존의식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 있다. 시인은 이를 바탕으로 중세사회의 모순에 맞서 죽은 한 인간의 운명을 초점화하고 있어 보다 문제적이다.
<전불관행>은 외견상 기생이 烈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당대로서는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이는 거꾸로 이해할 성질이다. 시에서 주인공은 강요된 변화에 대해 고달프게 적응하는 수동성을 보이기 보다는 자발적인 주체성을 발휘하여 비천한 기생도 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떳떳한 주체임을 주장하는 인간선언을 한다. 이러한 선언은 사랑도 운명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비록 시에서 ‘열’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으나, 그 내면적 지향은 정반대다. 시는 물론 비극이다.
?춘향전?의 ‘춘향’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 불관이 서로의 진정한 사랑과 인간적 정감을 교감하고,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확인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는 것은 진정 비극이다. 이에 반해 춘향전의 결말구조는 어찌 보면 사실이 아니고 환상에 가깝다.
당대의 현실에 비춰보자면 田不關처럼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관에서 너희를 둔 것은 보고 즐기자는 데 불과하거늘, 네깐년에 貞節이란 당키나 하느냐, 관장의 뜻을 거역하려 들다니”라 하면서 수청을 강요하는 鎭將의 주장은 현실에 즉해보자면 이치가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전불관이 “이 몸뚱이 아무리 으스러질지라도 내 마음 끝내 변치 않으리!”라고 절규하면서 처절하게 대항하는 것은 매우 저항적이다.
작품에서 전불관의 대응은 다소 무모해 보일 정도로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 대응에 돌아오는 것은 말못할 고통과 몽둥이 세례 뿐이다. 이모 또한 기생으로 태어난 것을 숙명으로 알고 관장의 영을 거역하지 말라고 전불관에게 타이른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전불관은 “인생이 어지 이리 몹쓸 운명 타고 났나요/사는 길을 택하자면 짐승같이 될 터이지---”라 하면서 처절한 고뇌와 절규를 드러낸다. 원치 않은 삶을 사는 것은 ‘짐승의 삶’에 가깝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제 전불관이 선택할 길은 오직 한가지다. 바로 죽음의 길이다.
전불관이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것은 정절도 아니고 한 남자에 대한 지순한 사랑도 아니다. 따져보면 사랑을 넘어 자기 주체를 견결하게 지키려 하였던 인간적 각성에 가깝다.
더욱이 결말 부분에서 시인이 “한 여자 정조 지키기 어려우매/마침내 처절한 원혼 되었구나”라 한 정회도 기생으로서의 정절이 아닌 한 인간의 인격을 지키려 한 전불관의 행위를 적극 긍정하고 있다. 이 의식은 전불관의 행동에 호응되는 바 있다. 비록 시인의 발언이 ‘烈’이념에 의해 착색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원치 않은 사람에게 가느니 죽음으로 자기의 인격을 지키려 한 전불관의 ‘인간 되고자 함’에 대한 긍정적 시선일 것이다.
27]이 작품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은 윤호진, <西浦의 ‘端川節婦詩’와 역사적 사실>(?한문교육연구? 13집, 1999) 참조.
당시 ‘一夫從事’라는 규범적 도덕율은 여성에게 또 다른 질곡이었다. 무엇보다 시집살이는 여성에게 말못할 고통을 강요한다. 그래서 시집살이의 괴로움을 경험한 부모가 딸에게 시집가지 말라고까지 할 경우도 생겨난다.28] 더 심각한 경우, 남편의 구박과 시집살이의 괴로움에 여성이 죽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여성은 시집살이의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은 이러한 질고를 인내하고 살던가 아니면 다른 탈출구를 찾아 나서야했다. 가정에서 탈출하는 것도 고통에서 탈출하는 하나의 대안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아비를 떠나는 것 자체가 ‘不烈’로 바난 받을 일일뿐 아니라, 모든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는 상황, 그리고 지아비에게 복종해야하는 ‘열’의 관념적 당위성이 여성의 고통보다 우선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도강고가부사>는 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내용은 소경에게 시집간 한 여성의 시집살이를 형상한 서사한시다. 이 시 29] 는 360행 1800자에 달하는 편폭이 매우 길다. 중국 문학사에서 최대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孔雀東南飛>가 350행임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의 양을 짐작할 만하다. 이 시는 다산이 강진 지방에서 직접 목도한 사건을 한시로 옮긴 것이다.
그 내용은 부모의 강권에 자신이 원치도 않은 불구자 소경에게 시집간 한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있다. 소경에게 시집--탈출하여 비구니--관가에 압송--다시 비구니--다시 관가로 압송으로 이어지는 기막힌 사연이 그 줄거리다. 이 사연은 작자의 개입 없이 시종 작중 주인공의 어머니에 의해 진술되는 형태를 취하며, 작품은 각 인물간의 대화로 일관되어 있다.
우선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작품해석의 관건이다. 이 작품에서 ‘不烈’의 축은 늙은 소경과의 결혼에 있다. 이 결혼이 주인공의 삶을 파행적으로 몰고 간다. 시집간 뒤의 주인공의 모습은 “옷이 몸에 헐렁한 꼬락서니/그 곱던 살결 다 여위어 수척해 보이었소.”라는 언급에 압축되어 있듯, 삶 자체가 비극이다.
이 죽기보다 못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한밤중에 또 몰래 빠져 나와/도망질을 쳐서 험준한 산마루 넘고 넘어” 탈출을 시도한다. 이는 생존을 위한 의미도 있겠으나, 이러한 삶을 몰고 온 현실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항은 곧 지아비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띤다. 사실 그녀의 출가는 자기 삶에 대해 매우 집요하며 강경하다는 의미이며 현실모순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그녀는 지아비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烈’의 도덕률을 거부한다.
어머니의 改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겪고 보면 결혼 자체가 죽음보다 더한 지옥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改嫁란 또 다른 질곡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는 여자의 도리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그녀의 언술이 이를 말해준다. 그녀는 이 지점에서 ‘烈’이건 ‘不烈’이건 간에 이를 인식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생존자체가 절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현실에서 ‘一夫從事’를 거부하고 비구니가 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의 길, 최소한의 인간이기를 구했던 생존의 길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존의 노력도 다 수포로 돌아간다. 그녀는 지아비에게 복종하지 않은 이유 하나로 체포당하고 만다. 당대의 가부장제는 집을 나간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 강상윤리의 죄목을 덧씌우면서, 단순히 부부간의 사적인 문제로 은폐시킨다. 그리고 고을 원은 ‘일부종사’라는 근엄한 도덕율로 주인공을 설교하면서 지아비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이는 ‘가부장제의 메카니즘’이 주인공 여성의 삶을 지배한 결과이다.
그녀가 아버지의 利慾때문에 원치도 않은 결혼을 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으로부터 고통 당하고, 사회에서는 관가로부터 핍박당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권력형태가 그녀에게 가한 고통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가부장제의 메카니즘 속에서 그녀는 고난을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결국 절간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버린다. 살기 위한 마지막 방편인 셈이다. 당시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려면 이 방법이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가부장적인 메카니즘이 그녀의 이러한 행동을 여지없이 구속시켜 버린다. “시방 다시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는 길/저 아이 죽일지 살릴지 모를 일이라오.”라는 어머니의 피맺힌 하소연은, 이러한 저항적 행동에 대한 실패의 두려움을 드러낸 것이다.
29]이 시의 예술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임형택 교수가 ?이조시대 서사시?(창작과 비평사,1992)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으므로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시의 내용은 실제사실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詩眼은 향랑의 죽음이다. 사실 죽음이 지지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다. 향랑의 죽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인격마저도 실현시킬 수 없는 현실공간, 즉 가부장제의 사회구조가 빚은 비극이다. 그 비극적 삶은 가부장제 윤리의 확대로 정절의 고수가 일반 민에까지 파급된 당대 사회적 상황에 대한 반영이다. 여기에는 또한 남편에 의해 버림받은 여성은 남성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적 조건도 그녀의 죽음을 재촉하는 구실로 작용한다.
작자도 이러한 사회모순을 문제삼고 있다. “남자들은 아내 얻어 버릴 수 있지만은/여자들은 지아비 한번 두면 재가는 그만 이라오(男有婦可決去, 女有夫不再許”의 언급에서 확인 된다.
이 미덕은 시 앞부분의 작자의식에 연결된다. “친정에 돌아가 숙부를 뵈었더니/마음 몰라주고 재가하라 위협만(還歸家見猶父, 噫不諒以威)”이라는 묘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숙부의 발언과 그 이후의 향랑의 행동이다.
사실 숙부의 발언은 당시로서는 전혀 어긋난 것은 아니다. 향랑 또한 신분적으로 개가를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그는 죽음으로서 맞서고 개가를 거부한다. 여기서의 향랑의 죽음은 정절을 지켜 열부가 되리라는 행동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이에 항거하는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행위는 그것을 행하는 개인의 생명과 위험을 인내하는 한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인내할 수 없을 때, 곧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향랑의 죽음의 이면에는 ‘떳떳한 인간’이 되겠다는 주체적 자각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외면적으로는 현실에서 일어난 특이한 사건을 소재로 전편을 구성하고 있으나, 시인은 시종 향랑의 죽음이 지니는 맥락을 ‘떳떳한 인간’이라는 각도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니는 시적인 미덕으로 보여진다.
"尹尙書가 成川을 다스릴 적에 章臺는 15․6세로 그곳의 종이었다. 윤상서는 우연히 장대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는데, 장대 또한 상서에게 만 몸을 바치고 생을 마칠 것이니, 자기를 버리지 말 것을 말한다. 이에 윤상서는 버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몇 달을 지냈다. 얼마 후, 윤상서는 황해도관찰사로 나가면서 조금 뒤 장대를 맞이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또한 얼마 지난 뒤 遞職하고 만다.
윤상서는 그 뒤에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장대는 괴로운 나머지 병이 든다. 그 후 윤상서가 강화유수가 되었을 때 장대는 죽고 만다. 이 때 그녀의 나이 20살 남짓 되었다. 장대는 죽을 적에 “혹시 공이 지나다가 볼 수 있도록 官道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30]
30] ?李參奉集? 卷2 <章臺枝>
시인은 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인데, 모두 연작시 12수다. 작품은 사랑하는 주인이 떠남으로 구성된다. 주인의 떠남은 종의 신분으로서는 영원한 이별을 의미한다. 서로의 진정한 사랑도 만남의 약속도 미처한 종의 신분으로서는 법적․도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사랑이 진실했던 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한번 떠남은 대개는 영원히 버림받음을 의미한다. 이 여성의 비극은 신분을 넘어 사랑한 데서 출발한다. 신분차이가 사랑의 결정적인 장애로 나타나고, 이것이 서로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차이나는 근본적인 요인이 된다.
두 작품을 들어 둔다.
①良家는 부부가 있지만, 천한 사람들 부부도 없답니다.
천한들 사람이 아니오리까, 죽어서라도 절개는 지키겠나이다.
(良家有夫婦, 賤家無夫婦,
賤家亦有身, 滅身方見守)
②목숨바쳐 그대를 사랑했소, 지금까지 이몸 깨끗하였소,
갈수록 이내 몸 아픈 것은 종으로 태어난 신세랍니다.
(抵死與夫君 如今全此身
去去傷此身 不作良家人)
제9수와 10수로 여성화자의 수법을 차용하여 형상화하였다. 두 작품 모두, 진정으로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비관하는 비극적 정조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만을 믿고 행동하는 장대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신분적 정체성에 대한 극도의 회의를 표출한다.
작품 속의 장대는 정말로 자신이 좋아서 주인을 사모하고, 주인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 없어서 죽는 것으로 나타난다. 장대는 주인에 대한 사랑을 사회적 규범을 빌어 ‘절개’로 자위하고 있다. 그녀는 절개를 지키면서 ‘열’이념을 실천하지만, 그 실천의 이면에는 ‘열’의 왜곡에 따른 그녀의 참담한 삶이 스며있다. 그러므로 장대의 ‘수절’은 일회성의 로맨스 차원에 머문 사랑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행하는 ‘수절’의 행위도 곧 그의 독립적 인격체를 인정하고 性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이조 후기의 ‘열’이념은 改嫁禁止라던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넘어, 급기야 미혼여성에게까지 확산된다. 열을 표방하면서 죽는 미혼여성의 경우, 열녀담론이 당대 여성의 삶에 얼마만큼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점을 심각하게 보여준다. 李安中(1752-1791)의 <花江女兒曲>가 대표적이다.
그 서사줄거리는 이러하다.
“화강에서 태어난 劉氏家의 處女는 집안에서 곱게 자란다. 그녀는 여성이면 으레 하던 누에치기며 수놓기 등의 일들을 하면서 부모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생장한다.
그녀는 엄격한 부모님의 가르침에 문지방을 넘지 않을 정도록 정숙하게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강가에 뽕 잎을 따러갔다가 우연히 서울로부터 온 한 年少者를 만난다. 그는 자기 집이 서울에 있으며 돈도 많고 집은 화려하게 이를 데 없다고 하면서 이를 미끼로 뽕나무밭으로 처녀를 유혹하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 詩․書는 물론 여자의 도리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禮儀와 貞烈도 알기 때문에 방탕한 여성과는 다르다고 항변한다. 그리고는 뽕나물 밭에서 희롱 당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 年少者에게 어머니께 유언을 전해달라고 하고 강에 빠져 죽는다.” 31]
31]?담정총서? 30권, 「丹邱子樂府」
"아름답기로는 저 秦羅敷처럼 하고, 義와 烈로는 魯나라 추호의 부인처럼 해야하느니./
베틀에 올라 부지런히 베를 짜고, 시를 외워 禮와 儀를 알아야 하느니라/
배우지 않은 방탕한 女兒들이나, 요염을 떨며 동네를 다닌단다/
이를 가지고서 첩의 마음을 다잡아, 進退를 감히 스스로 다스렸지요/
어찌 官道의 뽕나무밭에서, 첩의 한평생 몸이 잘못될 줄 알았으리?/
저는 溱水가의 여자가 아닌지라, 뽕나무에서의 희롱을 감히 견딜 수 있겠으리오?" 32]
32] “阿女秦羅敷, 義烈冠秋胡.
入機勤作織, 誦詩知禮儀.
無學蕩女兒, 發艶照里閭.
以此小心妾, 進退敢自專.
豈知官道桑, 誤妾百年身.
妾非溱上女, 可堪桑中戲.”
작품에는 劉氏家의 處女가 미소년에게 어떠한 희롱을 당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유혹을 받았던 지 겁탈을 당했던 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문면에는 다만 유혹은 받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 주인공 劉氏家의 處女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스스로의 마음가짐으로 보아, 그녀는 유혹을 당한 그 자체를 죽음보다 못한 수치로 여겼을 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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