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閑談]/<단상, 한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은인-군 복무 시절 부대장님-에 관한 이야기

Bawoo 2013. 3. 31. 15:54

여러분은 태어날 때 좋은 부모를 만나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원초적 행운 말고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행운이란 것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저는 그것이 크건 작건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고 있고,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실제로 제가 직접 겪은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기막힌 행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좀 더 자세히 말하면 제가 군 복무를 할 당시 3개월간 직접 모신 부대장님  덕분에 지금의 제 삶이 있게 되었다는 저의 행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첫눈에 반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주로 이성에 대하여 쓰지만 동성간에도 이성에게 느끼는 그런 정도는 아니어도 첫 눈에 호감을 갖게 되어 가까이 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제대할 때 까지 3개월간 모신 부대장님이 제게 있어  그런 분이셨는데  고등학교  2학년 반 편성에서 같은 반이 된  동창한테 첫눈에 호감을 느껴  적극적으로 접근, 친구를 만든 것이  처음이니까 두번째인가요?^^그렇다고 해서 부대장인 그분과 하사관으로 의무 복무중인  저와 현실적으로 접촉이 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단지 영내  순시중일 대  어쩌다 뵙게 되는게 고작이었는 데 그때마다 뭔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은 있었습니다.

 

부대장님은 당시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으로 보여지는 데 이유는  제가 복무한 부대는 교육부대라 피교육생을 교육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으로 부대운영을 했기 때문에 전투부대와는 달리 기간병이 많지를 않았습니다.지금 기억으론 많아 봐야 100여명 정도였던 것 같으니 부대장님으로선 사병들 신상  모두를 알고 계셨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다 저의 경우는 열명 남짓한 하사중 최 선임이었고  학력도 대학 재학중  입대한 73~74년 당시는 고학력에 속하는 편인데다 다닌 학교가  사회적으로 꽤 인정을 받는 학교여서 그것만으로도 부대장님이 관심을 가지셨을 만 한데 거기다 부대내  중사 이상 직업 군인들 간에 평판도 꽤 좋은 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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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저를 알리는 계기가 된 건 당시 전 부대원을 상대로 치른 한자 소양 평가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을 치룬 나중에  부대원들 사이에 출제자가  서강대 남광우 교수고 부대장님 고향 친구분인 것으로  알려졌는 데 문제가 꽤 어려웠었습니다.앞 뒤 문장도 없이 다짜고짜로 단어만 주고 한자로 쓰라는 것이었는 데 처음엔 어찌나 어렵던지...지금도 한 문제는 분명히 기억이 나는 데 "어조원"을 한자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답을 알기 전까진 어조원이란 낱말 자체가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고 나중에 답을 알고 나서야 "魚고기어,鳥 새조,院 집원"인 것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너무 형편없는 시험 결과에  실망한 부대장님은 답을 다 알려 주고 재 시험을 보게 했는 데 이때 유일하게 저만 만점을 맞았다고 합니다.한문을 워낙 좋아해서 중학교 때도 90점 이상을 놓쳐본 적이 없는 제게 답을 알려주고 치른 시험은 누워서 떡먹기 였는 데 다른 부대원들은 아마 그렇지 못했었던 모양입니다.

제 일방적인 생각이지만 이때 부대장님은 역시 "이름있는  학교 출신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만 "하시지 않았을까요?^^

부대장님과의 인연은 앞의 글 "맞아도 싼 놈"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피교육생 담당 학생대대로 발령이 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당시 학생대대 선임하사와 피교육생 내무반장들이 피교육생들로 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었는 데 부대장님은 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저와 군복무 기간은 짧으나 집안이 풍족하여 부정을 할 소지가 없는 일병 3명을 발령내게 됩니다.

 

학생대대로 발령나기전  군수과에서 주,부식을 담당할 당시 과장 지시로 관사로 쌀을 보내 드려보니 이를 되돌려 보낼 정도로 청렴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선임하사와 내무반장들의 금품수수 사건은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학생대대에서 피교육생 내무반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광주로의 부대 이전을 준비하게 되는 데 당시 저의 피교육생 지도 방침은 "교육받는 동안 만큼은 철저히 완벽하게 받으라"는 원칙하에 피교육생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어서 피교육생들이 무척 무서워 했었다고 합니다.구타나 부정이 없는 상태에서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는 지도를 하다 보니 나중에 탈영하는 못난 친구도 하나 나오게 되는 데 아무튼 이때 피교육생들은 정말이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피교육생들 식사 인솔을 하고 있는 저를 부대장님이 갑자기 불러 세우시더니 "우하사!부대장실로 와서 근무 할 생각 없나?"하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당시 제대 3개월 정도 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던데다  청소까지 해야 하는 부대장실 근무는 계급도 하사인 제가 하기에는 적절치 않을 수도 있는 자리여서 머릿속으로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입에서는 "네.알겠습니다"가 자동적으로 튀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부대장님은  나중에 제 밑으로 한명을 보강하신 걸 봐서는 장성이 아닌 영관 계급이라 장교급의 부관은 둘 수 없고 해서 하사관인 저에게 부관에 준하는 역할을 맡기실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

 

부대장님은 아마 제가 학생대대로 가면서 달라진 피교육생들을 군기잡힌 모습을 보면서 저를 부대장실에 데려다 놓으면 기간병들까지 잘 통제하지 않겠나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는 데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보좌를 잘 못해드렸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관 역할이라는 것이 부대장의 눈과 귀가 되어 줘야 하는 데 그냥 어렵게만 생각하고 근처에도 잘 안갔으니 부대장님이 얼마나 실망하셨을지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합니다.에그.못난 놈...

 

암튼 말년을  부대장실에 근무하는 중에 지금은 모 지방대학 교수로 있는 친한 동기로 부터 제가 낙제 처리 되었다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깜작 놀란 저는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몇몇 과목 교수들이 F학점 처리를 해버려 평량평균이 이수학점 미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71년도는 워낙 휴교한 날이  많아 시험도 제대로 못 치른데다 12월 초에 입대를 하는 저는 담당교수들을 찾아가 개별 시험을 보거나 리포트로 대체를 했었는 데 이의 결과가 낙제 처리 된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노래진 저는 "억울하다"는 편지를 총장님 앞으로 썼고 이에 대한 회답이 교무처장 명의로 "등록금은 입대전 납부한 것으로 대체할테니 1학년2학기를 9월 언제까지 재수강 신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복학해서 재수강 신청하라는 최종날짜가 제 제대 날짜보다 보름이나 앞선 날짜여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방법은 사전 출발이라는 부대장 직권의 편법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당시에는 부대 검열 중에 제일 쎄다는 "지휘검열"이 부대에 나와 있어서 아무리 부대장이라도 쉽게 병력을 빼내긴 쉽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그러나 저에겐 일생의 명운이 좌우될 수도 있는 일이어서 밑에 있던 상병 계급의 후배에게 자초지종을 잘 말씀드려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부산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나 구김살없이 당당한 성격의 그 친구는 부대장님에게 잘 말씀을 드렸다고 했고 얼마뒤 부대장님은 정확한 날짜에 저를 부르시고 출발을 하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덕분에 무난히 복학신청을 하고 예비사단에 들어 갔다가 전역을 한 다음 날 부터 까까머리 고등학생 모습으로 등교를 하여 은행에 들어가는 78년 초 까지 책과의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책에 관련된 얘기는 책과의 인연 쪽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때 만약 부대장실에 근무하지 않고 그냥 학생대대에서 피교육생 내무반장으로 있었다면 일신은 편했을지 몰라도 아마 사전 출발이 불가능하여 지금의 제가 되는 기반은 만들기 어려웠을 껍니다.직접 데리고 있지 않은 사병을 부대장이 보름이나 일찍 출발 시켜주는 배려는 아마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복학을 하기 위해서는 1년을 더 기다려야 됐는데 당시 이미 기운 집안 형편은 1년 동안을 기다려 복학하기 보다는 취업이 더 절실했었기 때문이었죠.설사 취업을 하게 되더라도 아무래도 조건이 나빴을 터이고 내 성격상 어떻게 해서라도 이런 핸디캡은 극복해 내는 과정을 밟았겟지만  어렵사리 들어간 학교를 겨우 1년 다니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부딛치게 되면 이는 자칫하면 일생의 한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잘 모시진 못했지만 저를 잘 보아 당신 방으로 데려다 쓰신 부대장님 덕분에 남보다 유독 잘 난 인생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남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지금까지 잘 살아 온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줄 수 있는 좋은 분을 만나는 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속상한 것은 이분-부대장님께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복학하여 한창 사회진출 준비 공부를 하고 있던 시절에 우연히 서울 시내에서 만난 부대장님의 아드님 말로는 제가 제대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역을 하시고 모 기업에 고위 간부로 입사해 계셨는 데 거기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 제 상황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을 정도로 힘들어 부대장님의 묘소가 어딘지 조차 못알아 두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대장님을 위해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안좋은 일이 생길라 치면 꿈속에서 노한 얼굴로,좋은 일이 있을라 치면 웃는 얼굴로  모습을 나타 내 주시곤 하는 데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마음만 아파하고 있는게 고작입니다.

 

이젠 저도 60 중반이 되어 있으니 설사 살아 계셨더라도  80 후반의 연세여서 기력도 안 좋으실 테지만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분이 저 세상에서 편히 잘 지내고 계시길 빌어 드리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제 처지가 너무너무 속상합니다.

 

제 삶의 은인이신 부대장님의 명복을 가슴 속 깊이 울어나는 진심으로 삼가 빌어 봅니다.

 

                                                                                                     2013.3.31 밤 10시 반에 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