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歲月)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다가
이제 그만 쉬어야 해, 더 이상 하다간 다쳐라고
몸에서 신호를 보내주면
마지못해 붓을 놓고 시간을 보며
갈수록 작업 시간이 줄어들고 있구나
흐르는 세월을 몸은 도저히 못 이기는구나라고 탄식을 하며
거실로 나와 TV를 켠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인 취침자세를 하고서
잠시 보는 가 하다가
이내 깊은 단잠에 빠져들기 위하여
군 복무 시절 하사관 학교에서
20킬로 완전군장을 하고
100리를 야간행군해서 유격장 갈 때
1시간을 걷고 10분간 돌아온 휴식 시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달콤한 잠
그땐 그 10분간의 잠이
이 세상에 부러운 거 아무것도 없을 만큼 소중하고 행복했었지라는
그 기억을 이따금 떠올리면서
내 맘대로 눕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누울 수 있는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생각도 하면서.
근데 이 놈의 TV는 왜 이 모양인가?
내 살아낸 세월 탓이겠지만
이젠 어지간한 일은 다 시큰둥해지는
내일모레면 70인 나이 탓이겠지만
봐달라고 유혹하는 곳은 엄청 많아졌는데
정작 볼 곳은 왜 이리 마땅한 데가 없는지.
마치 젊은 시절 호기심에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기웃거렸던
붉은 등들이 쭈욱 늘어서있는 골목길 술집을
순례하듯 한 바퀴 돌아만 나오던 마음일 때와 똑같은 심정이다
어쩌다 TV를 켤 때마다 늘.
그래도 행여 잠시라도 볼 곳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돌려본다
손가락으로 리모컨을 까닥까닥 눌러서
혹여 눈에 번쩍 뜨이는 아가씨라도 있을까 싶어
어쩌다 한 번씩 기웃거리던 골목길 붉은 등 켜진 집들을 스쳐 지나가듯
이젠 리모컨 숫자판 누르는 것조차 귀찮지만
잠이 들 때까지 수면제 역할 해 줄 곳을 찾기 위해서
문득 한 음악프로그램이 잠깐 눈에 들어온다
서른이 되어있는 늦동이 내 아들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세 명의 남녀가 사회를 보고 있는 모습이.
그 모습에
내 젊은 시절 즐겨봤던 음악프로그램 사회자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임**하고 이**였었지 아마,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 턱이 없지만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이젠
그들에 대해 뭐 별 의미를 부여 안 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남들이야 어떻게 보고 생각하건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냈으니 그걸로 되었다라는 생각에
그리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나만큼 늙어있는 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나 힘들었던 젊은 시절엔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과 함께 더욱 힘을 내어
낙오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지라는 추억에 젖어들기도 한다.
지금 저 젊은 사회자들을 보며
내 젊은 시절처럼 그러고 있을
이름모를 수많은 젊은이들
자기에게 주어진 삶
열심히 살아내려 애쓰고 있을 젊은이들
이 젊은이들
나 이세상 뜨고도 세월 한참 흐른 뒤
내 지금 나이만큼 늙어져 있는 때가 되면
그들도 지금 나처럼
TV에 혹 나올지도 모를 이 젊은 사회자들을 보며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 아마,
내 젊은 시절엔 그랬었지
세월은 참 무상하기도 하구먼이라고...
2017. 12.11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