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白雲復至西岡-백운동에서 다시 서강에 이르러
- 李書九
家近碧溪頭 (가근벽계두) 푸르고 맑은 시냇가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데
日夕溪風急 (일석계풍급) 어스름 저녁 되니 시내에서 부는 바람 빠르고
脩竹不逢人 (수죽불봉인) 대나무 숲에는 아무도 없는데
水田鷺影立 (수전로영립) 논에는 해오라기 그림자 비치누나
碧溪:푸른빛
日夕:해가
이서구 (李書九)[1754(영조 30) ~1825(순조 25)]
본관은 전주.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강산·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아버지는 덕흥 대원군의 후손으로 영의정을 증직받은 원(遠)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이다.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을 거쳐 지평·초계문신에 선발되었고, 1786년 홍문관에 들어갔다. 모역사건과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한때 유배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대사성·대사간·이조판서·호조판서·대사헌·우의정을 지냈고, 1825년 판중추부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16세 때부터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문장을 배웠는데, 사가시인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도 박지원을 따르며 배웠다.
이서구는 사가시인 가운데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했다. 박지원의 고문관을 계승하여 한층 발전시켰는데, 과거의 고문만을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당대의 문장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고의를 찾았다. 문장은 간단하고 쉬운 것을 귀하게 여기고 복잡한 것은 천하게 여겼다. 고문은 요약하여 기술했으나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지금의 문은 번다하여 막혀 있다고 했다. 정조가 문제삼은 문체의 타락은 세도(世道)의 타락과 직결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의(理義)와 사실(事實)을 통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는 혁신적이거나 현실적이기보다는 대개 관조하는 자세로 주위의 사물을 관찰하며 고요함을 얻으려 한 것들이 많다. 문집으로는 〈강산집〉·〈강산초집〉·〈척재집〉이 있으며, 편서로는 〈여지고 輿地考〉·〈규장전운 奎章全韻〉·〈장릉사보 莊陵史補〉가 있다. 시호는 문간이다.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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