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友人
-宋浚吉
四月花林鸎亂飛(사월화림앵란비) 사월 꽃나무 숲엔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故人來告故園歸(고인래고고원귀) 오랜 벗 찾아와 고향으로 간다고 하길래
蓑衣贈別寧徒爾(사의증별녕도이) 도롱이 옷 주며 편히 가라고 했네
知子東陂有釣磯(지자동피유조기) 그대 동쪽 언덕 낚시터에 있을 것을 알고 있노라며
故園: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徒爾: 공연히, 헛되이, 쓸데 없이
송준길 (Song Jun-gil, 宋浚吉)
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일찍부터 김장생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다.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남인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었다.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딸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민진원, 민진후의 생모이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친척이며 류성룡의 문인인 정경세의 사위이다. 처수는 이의활의 딸로, 이언적의 증손녀다. 남인의 영수 허적과는 먼 인척간으로 사위 민유중의 외외종숙이 된다.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송이창, 김장생, 정경세(鄭經世), 김집의 문인이다.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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