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 夏
-郭預
天枝紅卷綠初均(천지홍권녹초균) 온 가지에 꽃 지자 신록이 파릇파릇한데
試指靑梅感物新(시지청매감물신) 청매실 가리켜보노라니 감흥이 새롭구나
困睡只應消晝永(곤수지응소주영) 긴 낮을 보내기는 곤한 잠이 제격인데
不堪黃鳥喚人頻(불감황조환인빈) 꾀꼬리 자주 우는 소리에 잠들기 어렵구나
1232(고종 19)∼1286(충렬왕 12).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왕부(王府). 자는 선갑(先甲), 호는 연담(蓮潭). 문하평장사 곽날(郭埒)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55년(고종 42)에 급제해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었다. 1263년(원종 4) 왜구가 웅신현(熊神縣: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 물도(勿島)에 침입해 공선(貢船)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로서 대관서승(大官署丞) 홍저(洪泞)와 함께 화친첩(和親牒)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도둑질을 금할 것과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다.
1270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林惟茂)가 주살되자 내원령(內園令)으로서 중승(中丞) 홍문계(洪文系), 장군 송분(宋玢)과 더불어 왕에게 하례하고 곧 수도를 강화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재능이 있었으나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승진하지 못하다가, 사관(史館)의 추천으로 예빈주부(禮賓注簿)로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였다. 충렬왕이 즉위하자 곽예의 인물됨을 듣고 발탁해 판도정랑 보문서대제 지제고(判圖正郎寶文署待制知制誥)로서 필자적(必闍赤)으로 삼았다.
그 뒤 국자사업 전법총랑 위위윤 춘궁시강학사(國子司業典法摠郎尉衛尹春宮侍講學士)를 역임하였으며, 우부승지가 되어 소·말의 도살을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1282년(충렬왕 8)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제수되자 전법판서 김서(金㥠)의 직위가 자기보다 높으므로 사양하였다가 마침 김서가 죽었으므로 시험을 주관하였다.
좌승지 국자감대사성 문한학사(左承旨國子監大司成文翰學士)에 올랐고, 1286년에는 지밀직사사 감찰대부(知密直司事監察大夫)가 더해졌다. 원나라에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55세로 죽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해 높은 지위에 이르러서도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글을 잘 짓고 서법(書法)에도 능해 독특한 서체를 이루었다.
곽예가 한원(翰院)에 있을 때에 비가 오면 맨발로 우산을 쓰고 홀로 용화지(龍化池)에 가서 연꽃을 감상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 풍치를 높이 샀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지산집(志山集)』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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