宿嚴川寺
-金宗直
麥熟何妨省敎條(맥숙하방성교조) 보리 익는 것이 교조를 살핌에 어찌 방해 될까만
暫偸閑憩野僧僚(잠투한게야승료) 잠시 한가로움을 틈타 스님의 방에서 쉬다가
翛然午睡無人覺(소연오수무인각) 잠시 든 낮잠 깨우는 이 없고
只有林間婆餠焦(지유임간파병초) 숲 속에 떡 굽는 할미만 있구나
엄천사(嚴川寺):신라(883) 때 창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후 폐사된 절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이 그 터라고 말한다. 그러니 '엄천'은 신라 때부터 이 일대에 붙여졌던 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또 김종직의 <점필재집> '유두류록'을 살펴보면 1472년(성종 3년) 함양관아에서 엄천으로 가서, 고열암에서 1박 후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교조 [敎條]종교상의 신조
야승 [野僧]시골의 중
寮 벼슬아치 료 ① 벼슬아치 ② 동료 ③ 집 ④ 창문
翛然 ① 사물에 얽매이지 않은 모양 ② 자유자재한 모양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1]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과 남곤[2],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위키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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