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담]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연세대학교의 철학과 출신입니다. 60년 생이니 나보다 10년 여 늦은 80년 대 초에 학부생이었을 것 같습니다. 학교는 내가 다닌 70년 초중반 하고는 또 다른 풍경이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작품의 주 배경이 연세대학교와 학교 뒤 산이군요. 작가의 학창 시절 추억을 되살리면서 썼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작가보다 최소 30년 이상 먼저 태어나 다녔을 가공의 세 인물을 같은 대학, 학과 선배로 등장시켜 스스로 독립하지 못한 탓에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통해 느낀 기본적인 시선은 남쪽(보수)보다는 북쪽(진보)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성향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편향적이지는 않습니다. 통치계층에게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 민중의 경우에만 진보 편에 서 있는 정도로 보입니다. 그래도 보수 쪽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통치계층에 자리하고 있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평범한 민중(민초, 국민)의 입장에서는 보수니 진보니 이념 같은 건 지나가는 개에게나 주어버려도 좋을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원시별』은 회피하고 싶은 비극적 역사를 오히려 품 안으로 끌고 들어와 더욱 속속들이 들추어낸다. 서투른 꿈과 갓 피우기 시작한 사랑을 전쟁의 격랑 속으로 파묻어야 했던 인물들은 이제 스물을 넘긴 청년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가기 좋은 산책로쯤으로 알려진 연희동 궁동산 일대가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곳에서 벌어진 ‘연희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탈환의 최전선이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서사는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은 역사의 파도를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그러나 그 파도 속에서 세 명의 청년은 어둠 아래로 사라지면서도 결국에는 작은 빛 하나를 띄운다. 작가는 언제나 삶은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전쟁의 포성이 멎고 70년이 흐른 2020년대. 젊은이들이 사랑을 포기할 정도로 세상은 팍팍하다. 사회 전반에 각자도생의 살풍경이 넘실댄다. 그해 가을, 한국전쟁의 까만 어둠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는 연가(戀歌)일 수도 비가(悲歌)일 수도 있다. 그 사랑의 기쁨 또는 사랑의 슬픔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빛을 찾았다. 한탄강 남쪽도 북쪽도 밤이 깊어서일까, 아주 작은 빛이 찬란히 다가왔다.” -「작가의 말」 중에서
출판사서평
역사의 아픔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손석춘 소설의 미덕
정전된지 70년이 지났지만, 아픔의 기억은 여전하고 상처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안팎으로 작용한다. 작가 손석춘은 분단과 그로 인한 갈등을 깊이 천착해왔다. 손석춘의 리얼리즘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기억되지 않는 슬픔과 상실한 공동체, 잃어버린 철학과 언어를 되살리고자 하는 작가의 치열한 기록은 지금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해원과 호흡을 같이한다. 작가가 설정한 인물이 꿈을 품은 청년들인 것도, 그 배경이 동네 바로 뒷산인 것도, 언제나 우리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고집도 그러한 까닭일 것이다.
연희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두 남자와 한 여자. 스무 살 동갑 세 청년은 사랑과 우정을 키워가며 각자의 철학을 정립해간다. 맑스와 동학사상을 종합하려는 ‘진철’과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수철’, 불교철학에 가치를 두고 있는 ‘지혜’는 각자의 사유를 통해 시대를 통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곧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차례로 흩어진다.
수철은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주한미대사관에서 공보실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북한의 남침 직후 주한미대사관이 일본으로 옮겨 가고, 수철은 거기서 미국 군 기관지 〈성조지〉의 종군기자로 파견되어 전함에 오르게 된다. 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 수철은 그 한가운데에서 불바다가 되어가는 월미도와 소월미도, 인천항을 차례로 목격한다.
한편 진철은 의열단 단원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알게 된 약산 김원봉의 일을 돕는다.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약산은 수배자로 쫒기는 신세가 되고, 결국 진철은 약산과 함께 월북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들어서게 되고, 〈로동신문〉 기자로 있던 진철은 어느 날 인민군 제4사단과 함께 종군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야포의 함성이 터지면서 조선인민군은 한탄강 철교를 넘어 서울로 진입했다. 인민군 사단들이 연희대 문과대 건물(지금의 본관)을 사령부로 활용하면서 진철은 지혜와 짧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지만 곧 인민군을 따라 남하한다.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진철은 서울 방어전을 취재하기 위해 다시 지휘부가 자리한 연희대로 돌아온다.
이후 이 세 사람의 재회는 서울 수복을 위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만남은 결국 역사의 비극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설레고 반가워야 할,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들의 재회가 이루어진 장소는 연희동의 나지막한 능선, 어미산 중턱의 숲길, 이들이 이름 지은 ‘철학의 길’이 더 이상 아니었다. 104고지, 68고지, 216고지의 포화 한가운데였다. 손석춘은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무대는 많은 이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곳”이라며 “한국전쟁의 가장 격렬한 전장 가운데 하나임을 대부분 모른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역사의 상처가 그러할 것이다. 지나치는 곳곳이, 스쳐가는 누군가가, 단지 지나치고 스쳐가지 않는 한 이야기는 언제까지 살아서 이어질 것이다.
원시별로 다시 태어나는 죽음들 하나 하나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종전이 아닌 휴전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며, 저자의 말대로 “우악살스런 괴물”을 끊임없이 낳고 있다. 홀로 남겨진 지혜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결국 맞서기로 다짐했다. 진철이 남긴 취재 수첩에 유난히 꾹꾹 눌러 쓴 ‘곰’이라는 글자 때문이었다. 신화적 의미로서의 곰은 흔히 새로운 생성을 의미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는 지혜가 품은 태아를 뜻하겠지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결국 그것은 “생을 마치려던 충동”을 떨쳐내고 “우악살스런 괴물에 맞설 힘”이 되고, “마음놓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일궈내고 싶은 욕망”이 될 것이다.
“어슬렁거리는 곰이 시나브로 작아진다 싶더니 아장아장 다가온다. 총상을 보들보들 핥아준다. 쑥 내음이 향긋하다. 몸도 날아갈 듯 개운하다. 푸근함에 젖어들던 진철은 아기 곰이 하도 어여뻐 자꾸만 감기는 눈을 부릅뜬다. 아기 곰이 이끄는 대로 지혜가 진달래꽃 뿌려놓은 철학 강의실을 사뿐히 지르밟아 걷는다. 문밖에서 돌아보니 문학관은 돌비알이다. 암벽 아래 작은 동굴과 고만한 바위가 보인다. 조금 전 밀고 나온 바위다. 마주친 세상은 별빛으로 총총 눈부신 별숲이다. 잔별과 잔별이 그들 사이로 숲길을 그린다.” (407~408쪽)
손석춘 소설의 미덕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우리말 사용의 능수능란함이다. 손석춘에게 소설을 쓰는 행위는 우리말로 우리 민중의 가슴에 남은 상처를 제대로 밝혀내 진단하고, 그 상처를 “보들보들 핥아”주는 주는 치유 과정이다. 상처의 치유는 결국 새로운 살을 돋게 하는 생성의 힘이다. 그것이 “작은 동굴” 속에서 “고만한 바위”를 밀고 나온 아이에게서 “쑥내음이 향긋”하게 풍기는 이유일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이 “한국전쟁의 까만 어둠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는 연가(戀歌)일 수도 비가(悲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별이 탄생하는 초기 단계라는 “원시별”도 “까만 어둠에서” 더욱 빛난다는 것이리라.
목차
프롤로그
1부. 사랑의 오솔길
1장 ‘너 자신을 알라’ 뜻 아는 사람?
2장 신성한 철학에 웬 계급
3장 우아한 건배 ‘새로운 철학을 위하여’
4장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괴물
2부. 불타는 섬으로
5장. 자유의 여신이 망치와 모루를
6장. 삶이란, 역사란, 우주란
7장. 소나무 아래서 붓다와 예수를
8장. 서쪽의 맑스, 동쪽의 수운
9장. 너희들 세상 온 것 같지
10장. ‘작은 스탈린’ 아래 살래?
3부. 넘나든 한탄강
11장. 남과 북이 모두 선망할 나라
12장. 얼마나 많은 동상을 세울까
13장. ‘조국’이 불러올 혼란
14장. 그 길에 마주친 젊은 주검
15장. 외침에 늘 강인한 생명력
16장. 낙동강 잠긴 피바다
17장. 집단학살에 살스런 대갚음
18장. 소년을 묻을 때 또 쌕쌕이가
19장. 첫 입맞춤, 몸에 기록해두셔요
4부. 어미산 불바다
20장. 찢어진 치마에 놓인 따발총
21장. 해원과 상생 가능하려면
22장. 뭘 해주었다고 애국하오
23장. 청상 될 아내의 탐스런 자태
24장. 참호 늘어선 사색과 사랑의 길
25장. 0.1초라도 망설이면 죽소
5부. 문학관 덩굴손
26장. 이글이글 화톳불, 어른어른 물안개
27장. 전쟁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28장. 간도특설대 놈들이 국방군에
29장. 철학의 길에 포탄이 소낙비처럼
30장. 외세에 휘둘린 역사 지나친 죄
31장. 불천지가 삼킨 ‘소나무 언약’
32장. 부엉이 성찰에 수탉 울음
33장. 어떤 독재도 계급도 없는 나라
에필로그
작가의 말 | 한국전쟁의 빛을 찾아서
책 속으로
1950년 9월 15일. 먼동이 부유스름 텄다. 수철은 수평선 군함에서 월미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생은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걸까. 삶은 숨과 다음 숨 사이에 있다던 지혜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동트는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삶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을 것인가.
--- p.64~65.
차창 밖 산하는 눈물겹도록 푸르렀다. 이윽고 기차가 사리원역에 멎었다. 38선 코앞으로 사단 병력을 데려갈 군용 트럭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도착해 살펴보니 주둔지가 연천이다. 수철의 고향 아닌가. 주상절리 절벽에서 한탄강 여울을 바라보며 친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짚었다. 수철에게 전면 남침은 용납될 수 없을 듯했다. 그렇다면 국방군으로 나설까, 전장에서 수철과 마주칠 수 있을까,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일까, 단둘이 만난다면 얼싸안겠지만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여러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 p.185.
진철이 성주로 물러서는 길도 참담했다. 낙동강 주변만이 아니다. 산자락과 맞닿은 밭이나 숲정이 곳곳에서 인민군 주검을 발견했다. 피범벅 송장은 예사다. 길옆의 논두렁에 얼굴 묻은 시신엔 울컥했다. 동무를 묻어줄 겨를도 없을 만큼 다급했을까. 시신이 지천에 깔린 채 방치되었다.
--- p.217.
어미산은 조선왕조의 태조 때부터 봉수대가 자리 잡을 만큼 중시된 산이다. 서쪽과 남쪽으로 여러 산등성이가 여트막이 뻗어 있다. 어미산이라 불린 까닭이 있다.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 인수봉이 아기를 업고 밖으로 나가는 꼴이다. 이를 달래어 막고자 선인들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렀다. 산 이름에 민중의 지혜와 소망이 담긴 셈이다.
--- p.292.
“이 전쟁에서 자신이 본 그대로 진실을 밝힐 기자가 있을까요? 나는 회의적입니다. 미군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더군요. 실성한 사람이 발작을 일으키듯 초로의 민간인들까지 마구 죽이더라고요. 상대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요. 원숭이처럼 취급해요. 정말 끔찍이도 한국인을 싫어하더군요.”
--- p.343.
총을 맞고도 일본 형사와 조선인 앞잡이를 끝내 사살했다는 사진 속 아버지가 살아난다. 당신도 총상에 이렇게 고통스러웠을까. 그때 아버지는 어린 나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에 힘을 주었다. 미군이 38선을 넘을 때 잿빛 전망을 적었다. 소련이나 중국이 가만가만 있겠는가. 자칫 전쟁이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옴나위 없는 불바다에 수많은 민중의 생때같은 생명이 던져지리라. 살천스런 예감을 적으며 염원했다. 전쟁이 38선 이북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38선 원점에서 평화를 되찾기를…….
--- p.382~383.
문학관 담쟁이는 포탄으로 팬 구렁에 뿌리를 맞대고 무성히 자랐다. 이윽고 문학관을 에워쌌다. 그 초록 이파리와 넝쿨 손이 지혜에겐 구렁에 잠든 두 철학도의 넋과 손처럼 다가왔다. 가을을 맞으면 더 그랬다. 덩굴손은 핏빛이 되었다. 스무 살의 세청년이 ‘철학의 길’을 언약하며 밤하늘 잔별이 숲을 이룰 때까지 이야기 나눈 그 가을이 사무쳤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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