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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정조 사후 63년

Bawoo 2014. 5. 25. 23:02

 

정조 사후 63년- 세도정치기(1800~63)의 국내외 정치 연구  / 저자 박현모 / 출판사 창비

정조 사후 63년 


 정조시대와 그 이후, 조선의 정치는 어떠했을까?

『정조 사후 63년』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의 대내외적 문제를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하였다. 공론정치의 변질을 주제로 조선왕조를 장기간 지속시켜온 정치메커니즘에 대해 고찰한다. 그리고 영조와 정조시대의 공론정치의 양상과 국왕들의 대응방식을 살펴보고, 국왕 정조의 공론에 대한 인식과 언관들의 관료에 대한 탄핵조치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세도정치기의 국내외 정치는 홍경래난, 황사영백서사건 등 중요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북소믈리에 한마디!
제9장 '쇄국의 논리와 대응: 대외관계'에서는 한국 학계에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세도정치기의 대외관계를 살폈다. 이 책에서는 정조시대와 비교해볼 때 순조ㆍ헌종ㆍ철종기의 대외관계는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및 일본의 경시, 서양제국의 배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의 대내외적 문제를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한 『정조 사후 63년: 세도정치기(1800~63)의 국내외 정치 연구』가

출간되었다. 같은 시기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이“부정적이기만 하고 내용이 거의 없는 것” 내지 “세도정치 자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 성격 규정에 머물러” 있었던 데 비해, 이 시기 조선의 정세 특히 거의 연구가 되어 있지 않던 당대 대외관계를 다루는 등 다양한 측면을 두루 살폈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획기적 연구서라고 평할 수 있다.

정조시대와 그 이후를 구획하는 선은 무엇인가 ?

이 책의 제1부 1장은 정조의 개혁조치들이, 조선왕조를 오랫동안 지탱시켜온 메커니즘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장기

지속의 근간이 된 ‘공론정치’의 특징과 구조를 다뤘다. 제2장과 3장에서는 세도정치기의 전사(前史)인 영조와 정조시대의 공론정치의 양상과 국왕들의 대응방식을 살폈다. 영조와 정조의 친민(親民)정치, 즉 국왕이 언관과 신료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백성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전 시대와 다른 소통방식을 볼 수 있다. 특히 제4장에서는 국왕 정조의 공론에 대한 인식과 언관들의 관료에 대한 탄핵조치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제2부는 이 책의 중심부로서 세도정치기의 국내외 정치를 다섯 장으로 나누어 살폈다. 먼저 제5장에서는 당시의 핵심 인물이던 국왕, 대왕대비, 외척 세도가의 말을 정치보복과 민생논의의 실종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했다. 그리고 침묵과 동원의 널뛰기라는 특징을 보인 그 시기 언론의 탄핵 내용을 통계로 살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이 부닥친 첫번째 도전은 대규모 반란이었다.

 제6장에서는 순조정권의 최대 위기라 할 수 있는 ‘홍경래의 난’이라는 119일간의 반란사건을 다루었다. 조정의 공론정치 메커니즘의 마비와 순조정권의 무능력, 그로 인한 민심의 이반현상 등 순조 정권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제7장에서는 세도정치기의 언론구조를 경색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황사영백서사건을 다루었다.

제8장에서는 정조시대와 순조시대를 관료이자 지식인으로 살았던 정약용이 진단하는 시대인식과 정치비전을 살폈다.


제3부에서는 세도정치기 이후의 조선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개의 글을 실었다.

 

먼저 제10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고종의 친정(親政)체제하에서 시도된 공론정치의 복원 시도가 몇가지 국내외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무산되고,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제가탄생하는 과정과 그 의미를 살폈다.

제11장에서는 1898년의 만민공동회에서 나타난 근대적 공론정치의 양상을 살핀다. 정조시대에 통청(通淸)으로 나타났고, 세도정치기에는

민란(民亂)의 형식으로 표출되었던 백성들의 저항과 목소리가 표출되는 만민공동회는 바로 직전의 철종시대까지와 전혀 다른 역동성과

근대적 공론장의 탄생을 보여준다.

마지막 제12장에서는 조선왕조가 일제에 의해 패망한 이후 등장한 복벽운동, 다시 왕정체제를 복구하려는 움직임과 그에 맞서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정치노선을 걸으려는 세력 사이의 대립과 충돌을 살핀다.

세도정치기의 대외관계, 그 닫힌 빗장을 열다

특히 제9장 ‘쇄국(鎖國)의 논리와 대응: 대외관계’에서는 한국 학계에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이 시기의 대외관계를 살폈다.

정조시대와 비교해볼 때 순조ㆍ헌종ㆍ철종기의 대외관계는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및 일본의 경시, 서양제국의 배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세도정치기의 대외관계는 그전의 정조시대와 비교해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갖는다.

 

첫째,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순조시대까지만 해도 대명(對明)의리론과 대청(對淸)사대외교론이 공존하고 있었으나(이중적 중국관),

헌종시대에 접어들면서 ‘대청사대외교론’이 주류를 이뤄갔다(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둘째, 일본에 대해서는 종래처럼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서양선박의 잦은 출현에 대해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변방의 걱정을 함께 대응하려 했다.

셋째, 서양제국과의 관계는 순조 초기의 신유사옥 이후 현저히 축소되었다. 특히 서양의 큰 선박을 맞이하려 했던 황사영백서사건 이후 세도정권은 위기감을 느끼고 더욱 철저한 금압정책을 폈던 역사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정조 사후 63년’을 읽는다는 것은 복잡하고 우울한 심사를 품게 한다. 견제장치 없는 권력구조와 정치보복의 악순환, 각종 정치사회적 부조리와 민란의 도미노 현상, 거듭되는 기근과 질병, 대외관계에서의 실패 등…… 세도정치기에 등장한 이런 현상들은 특히 그 직전의 정조시대와 너무 대조적이어서 일반 독자와 연구자들이 그 복잡한 양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이 책을 통해 그 시대를 읽는 작업이 좀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조선왕조, 500년 장수한 비결은> [연합뉴스] 2011.03.01

 

 

조선왕조는 500여 년간 계속됐다. 평균 수명이 200∼300년밖에 안 되는 중국ㆍ일본ㆍ영국 등의 다른 왕조와 비교하면 두 배 정도 오래 유지된 셈이다. 비결이 무엇일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연구실장 최근 펴낸 책 '정조 사후 63년-세도정치기(1800∼1863)의 국내외 정치 연구(창비. 364쪽. 2만5천원)'에서 기존의 연구 성과와 문헌을 토대로 조선왕조의 장수 비결을 4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상유(相維)와 상제(相制) 또는 정당의 쟁의로 표현되는 상호 견제장치를 꼽는다. 큰 벼슬과 작은 벼슬이 서로 얽히고(相維) 견제함으로써 권세를 농간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 정당이 쟁의(爭議)를 통해 왕권을 제약하고 계급 간 대립을 완화시켜 백성들의 혁명을 막을 수있었던 것도 왕조 지속에 한 몫 했다.

둘째로 국왕이 정치를 잘못했을 때 왕조 자체를 바꾸지 않고 왕실 종친의 한 사람으로 대체하는 '반정의 정치'(反正之政)도 왕조의 수명을

늘린 요인이었다. 중종과 인조의 반정에서 볼 수 있듯이 정통성 시비와 반동의 위험이 뒤따르는 역성혁명이 아니라 성리학적 명분에 입각한 반정을 통해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국왕은 바꾸되 왕조는 유지했다는 것이다.

또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조선의 외교능력도 장수 비결로 꼽힌다. 자칫 조선에 치명적일 수 있었던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가 역설적으로

현실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조선은 반독립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의 사대질서에 적응하고, 중국의 세력 변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실용적이고 탄력적인 외교로 생명을 연장했다.

이런 요소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힘으로 만들어낸 통합의 메커니즘이 왕조를 500여 년 간 지탱한 핵심 요인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공론(公論)을 중시하는 정치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국(經國)의 사상을 잘 구현한 정치운영 방식인 공론정치는 특히 세종의 세제개혁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정조(1752∼1800) 이후 이어진 세도정치기는 조선왕조를 지탱해 온 공론정치가 마비되고 탄력적인 대외정책이 단절된 시기였다.

정조의 행정개혁으로 중앙집중적 구조였던 권력이 왕대비 및 외척 세도가에 의해 자의적으로 행사됐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자의적 지배,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 일본과 서양에 대한 폐쇄성으로 사회적 역동성과 변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위축됐다. 특히 조선왕조를 버텨 온 공론정치 메커니즘이 무너지면서 정치 비판과 창의적인 대안 논의가 이뤄지던 어전회의 풍토마저 사라졌다.

저자는 "세도정치기의 잘못된 정치는 개혁이 꼭 필요한 때에 현상유지 정책을 취하거나 권력과 지위를 사사롭게 이용하는 데 급급했던

김조순, 조인영, 정원용 같은 몇몇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며 "역설적으로 이들은 정치 리더십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세도정치·공안정국·언로차단… ‘조선 르네상스’ 몰락 불렀다 [국민일보] 2011.03.07

‘정조 사후 63년- 세도정치기의 국내외 정치 연구 ’

영·정조 시대(1724∼1800)를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정조가 죽은 것은 1800년, 18세기의 마지막 해였다. 그 후엔 어땠던가. ‘홍경래의 난’이 1811년 발발한 뒤 크고 작은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사대부 층의 역모가 아니라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들고일어난 민란이었다.

세도가의 권력이 왕권을 능가했고, 가뭄과 기근이 잇따랐으며, 소위 ‘삼정의 문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무리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헌종이 무능했다 한들 이렇게 급속도로 조선이 쇠퇴한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군이 죽자마자 이토록 모든 일이 엉망이 되는 게 가능할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연구실장의 저서 ‘정조 사후 63년-세도정치기(1800∼1864)의 국내외 정치 연구’(창비)는 이 같은 의문에 답하는 연구서다.

◇어린 왕, 없어진 왕권=순조 1년 2월 9일자 ‘조선왕조실록’엔 상징적인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노론 벽파는 선왕인 정조의 총신(총애 받는 신하)이자 영의정이었던 남인 채제공(1720∼99)에 대한 탄핵을 시도한다. 채제공은 정조 생전에도 반대파의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는데,

이 때문에 정조가 “상소에 ‘채제공’을 언급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 ‘채제공을 삭탈관직하라’는 요구를 받은 순조가 ‘채제공에 대한

상소는 언급하지 말라’는 정조의 명을 근거로 항변하자 승지들이 즉각 대꾸했다. “무릇 대간의 계사(啓事·임금에게 아뢰는 말이나 글)에 속한 것은 일찍이 비답(批答·임금이 상주문의 말미에 적은 가부의 답)없이 이렇게 도로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400년의 가법을 지키소서.”

이때 순조의 나이는 12세. 대왕대비였던 영조 계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하는 4년 동안 정조의 총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노론 벽파 독재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탕평책을 무위로 돌렸다. 천주교는 남인들을 쓸어내는 좋은 명분이었다.

 

박 연구실장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및 신유사옥 등 계속되는 ‘공안정국’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일종의 ‘자연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수렴청정이 끝나자 순조의 장인인 노론 시파 계열의 김조순이 실권을 잡았다. 이른바 ‘안동김씨 60년 세도’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국정최고

기구인 비변사는 반남박씨(순조 생모 수빈 일가), 경주김씨(대왕대비 일가), 안동김씨 등 외척들이 번갈아가며 장악했다. 순조 치세 후반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가 일시적 반격을 가했지만, 그마저 요절하자 왕권은 다시 땅에 떨어졌다.

◇정조의 언로 탄압이 불씨 제공=34년 동안이나 재위한 순조가 무능했던 건 사실이다. 8세부터 23세까지 왕위에 머물렀던 헌종도 자기 뜻을 펼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구축했던 ‘시스템’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정조가 내린 ‘금령(禁令)’과 묵살한 탄핵상소 숫자를 분석해가며 이 시기 언로 탄압이 심각했었음에 주목한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제압하기 위해 언관(言官)을 무시했다. 언관들을 각 당파의 대리인쯤으로 인식했던 정조는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언로를 억눌렀다는 것이다. 일을 추진할 때 신하들의 반대 상소가 많을 것 같으면 ‘금령’을 내렸다. 금령이란 ‘이 일에 대해서 언급 자체를 말라’는 것이다. 박 연구실장에 따르면 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금령은 모두 163건인데, 즉위 원년엔 0건이었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많아져

재위 24년째에는 11건을 기록했다. 노론의 거두인 심환지는 “사람들이 입을 열고 의논하지 못하게 해서 국가 체모가 구차해지고 공론이 위축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조선왕조 특유의 활발한 공론정치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국학자 안확(1886∼1946)은 ‘조선문명사’(1923)에서 “정조 중엽에 이르러서는 영영 당의(黨議)가 끊어지고 침묵이 주를 이루매 소위 세도라 하는 것이 생기고 문벌로의 제약이 혹심하여 필경 국정이 크게 쇠퇴함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순조가 즉위할 무렵에는 이미 ‘권력독점 및 부패를 방지하고, 정책 아이디어와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조선왕조의 공론정치체제가 형해(形骸)화된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정조 체제’ 조기붕괴는 정조 탓? [서울신문] 2011.03.09

 

 

알려진 것과 달리 성리학적 세계관이 북학파와 개화파를 품고 있을 정도로 유연했다면, 조선이 망한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백성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남는 것은 ‘임금 탓’이다. 성리학 자체도 유연하고 우국충정 가득한 유학자들도 넘쳐났다면, 이를 잘 가려 쓰지 못한 왕의 잘못이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의 ‘정조 사후 63년-세도정치기의 국내외 정치연구’(창비 펴냄)다. 정조의 리더십을 연구했던 저자가 정조 이후 63년간 지속된 세도정치를 분석한 책이다.

박 실장이 보기에 조선의 최후는 이미 정조 시대에 잉태되어 있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박 실장이 거머쥔 키워드는 ‘공론정치’다.

공론정치는 사림의 여론정치로 조선 성리학이 드러나는 형식이기도 하거니와 이 때문에 당쟁으로 격하되기도 하고 붕당으로 부활하기도 한 개념이다.

조선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공론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정조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가 바로 이 공론정치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박 실장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다. 정조실록을 토대로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고위 공직자에 대한 대간(臺諫·고위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대관과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는 간관을 합쳐 이르는 말)의 탄핵 활동을 통계치로 뽑아봤다. 그 결과 재위 20년이 중요한 분기점으로 나왔다.

이때를 고비로 매해 7~40회에 이르던 탄핵 건수가 1~5건으로 급격하게 감소한다. 동시에 이 시기 이후 탄핵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0건이 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 자체를 금지시키는 금령(禁令)도 빈번하게 행사됐다. 재위 기간 동안 정조는 모두 163건의 금령을 내렸는데 이 가운데 109건(66%)은 특정 사안에 대한 상소나 언급을 금지하는 등 공론정치에 관련된 내용이다.

널리 알려졌듯 정조는 조선의 개혁을 꿈꿨다. 왕과 백성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사림 세력이라 불리는 중간 세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체계를 수립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때문에 신하들의 목소리를 당쟁에 빠진 목소리라 규정해 국정에서

배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박 실장은 정조 사후 ‘정조 체제’가 그렇게 빨리 무너져 버린 이유를 정조 자신에게서 찾는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린 것은 결국 “권력 독점 및 부패를 방지하고 정책 아이디어와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조선 왕조의 공론정치 체제가 형해화된 상태에서 견제받지 않은 소수의 외척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위 글은 'mooncourt'란 필명을 쓰는 분의 '모두 아름답게 사세요'라는 블로그에 실린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내용 중 본인이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일부 내용-언론사의 책 소개 글-은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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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신라, 고려와 마찬가지로 매우 수명이 길었던 왕조다. 그 수명은 중국. 일본. 영국 등 다른 왕조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다.

 중국만 보더라도 한 왕조의 수명의 길어봐야 ‘청’의 경우 267년이었고 ‘수’의 경우는 39년이 고작이었는데 조선은 500여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렇게 수명이 긴 왕조는 600여년이나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던 오스만투르크 왕조를 제외하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보통 왕조는 백 년 이상이 되면 보수적으로 변하며 침체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또 그녀는 “어떤 체제도 수명이 있다. 어떤 체제도 동맥경화증을 피할 수 없다. 긍정적인 기능을 하던 것이 환경변화 때문에 부정적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임스 팔레는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조선왕조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역설적인 주장을 했다. 그만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의 조선 왕조는 어느 편이냐에 따라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뉘는 붕당정치가 판을 쳤다. 선조임금에게 붕당을 예언했던

이준경이 상소에서 “붕당을 깨어버리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이는 붕당의 기원과 관련해서 붕당의 불가피성과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런 붕당이 국왕의 전제나 외척. 권신의 전횡을 방지하는

역할을 외면하고 분쟁을 일삼은 것은 부정적 기능에 해당될 것이다.

붕당의 반대되는 개념은 탕평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탕평론자는 숙종 때의 박세채였으나 적극적으로 탕평정치를 추진한 국왕은 영조와 정조였다. 이 가운데서도 정조는 집권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 등의 견제장치를 혁파하고 왕의 통제력이 미칠 수 있는 대신권을 강화했다.

그 결과 국가개혁과 탕평은 어느 정도 성공했을지 모르나 국정운영을 위임받은 외척의 세도정치기가 도래하도록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런 ‘정조 사후 63년’은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공백기를 가져온 시기였다.

사실 ‘국왕의 지우를 받은 세도가에 의해 자행되는 권력농단’이라는 뜻의 세도정치는 정조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사실 조선왕조를 오래 지속시킬 수 있었던 힘은 정치세력 간 견제장치와 반정의 정권교체방식, 사대교린이라는 외교 때문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정치세력 간 견제장치가 약화됨으로써 조선 왕조는 쇠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의 말미에서는, 이런 시대에서 어린 임금의 보필에만 그치라는 ‘선왕의 당부’나 ‘성학의 공부’의 중요성만 강조하는 것이

책임 있는 재상의 태도라 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묻고 있다.

저자는 또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던 때에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세도정치기의 주요 인물들은 역설적으로 정치 리더십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배’에는 ‘국가’라는 배도 있고 ‘가정’이라는 배도 있다. 〈정조 사후 63년〉은 배가 항로를 잃고 난파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 위 글은 '김박사'라는 필명의 블로거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