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일본 총리는 소비세를 올리기 3주 전인 3월10일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를 도쿄에서 만났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실러는 “(아베노믹스를) 혁명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일본인의) ‘야성적 충동’을 부추기려면 시대정신을 붙잡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야성적 충동’은 실러가 쓴 책(공저)의 제목이다. 원래는 대공황의 위기에서 자본주의를 구출한 경제학자 케인스가 1936년에 내놓은 명저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사용한 용어다. 한때 “케인스는 죽었다”고 했던 세계는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고 합창하고 있다.
케인스는 불확실성을 감수하고도 투자를 결정하는 기업가의 직감을 ‘야성적 충동’으로 표현했다. 그는 “만약 ‘야성적 충동’이 둔화되거나, 자생적인 낙관이 주춤거리게 됨으로써 수학적 기대치 이외에 우리가 의지할 것이 없어진다면, 기업은 쇠퇴하고 사멸하게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20년 장기침체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베에게 용기를 준 실러의 충고는 박근혜 정부에도 약이 된다. 최경환 부총리가 이끄는 경제팀은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기업·수출 의존에서 탈피해 가계·내수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를 위해 “기업 사내유보금이 투자와 배당, 임금 분배를 통해 가계소득으로 흐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부동산을 살리기 위해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도 높였다. 좌·우파 정책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시장심리를 움직였고 7·30 재·보선에서 여권 완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현금을 움켜쥔 기업은 규제를 이유로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 ‘야성적 충동’은 그저 새 경제팀의 머릿속에서나 어른거릴 뿐이다. 기업의 ‘야성적 충동’ 부재(不在)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기업인들을 향해 ‘야성적 충동’을 가지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기업의 위험회피 성향이 증대되면서 97년까지 연평균 9.6%에 달하던 설비투자 증가율이 외환위기 후 4.3%로 떨어졌다”고 개탄했다.
돌이켜보면 창업 1세대는 뭔가 달랐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13년간 적자를 보면서 반도체 사업을 밀어붙였고, 현대 정주영 회장은 포기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동차 독자개발을 추진했다. 기업의 명운을 건 위험한 투자였다. 두 창업자가 주판알만 굴리다 편한 길을 택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 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케인스도 『일반이론』에서 창업자가 활동하던 ‘옛날’에는 투자를 계산에 의존하지 않고 ‘혈기와 충동’에 의존했다고 자기 시대의 풍조를 비판했다. 지금 박 대통령의 심정도 비슷할 것이다.
경제 주체들을 움직이려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TV 카메라 앞에서 경제 혁신의 큰 그림을 제시하고 어려움을 솔직하게 호소해야 한다. 기업이 화끈하게 투자하고, 서민의 가계소득이 늘어나 소비가 살아나게 하려면 먼저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이 정부는 집권 초 1년반의 골든 타임을 흘려보냈다. 이젠 기업의 투자 본능을 살리기 위한 규제완화의 특급 처방이 나와야 한다. 대통령이 최고경영자와 만나 툭 터놓고 속 깊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 야당 의원과도 틈만 나면 무릎을 맞대고 경제활성화법안의 신속한 처리를 설득해야 한다.
1200조원의 가계 빚을 줄이는 파격적인 대책이 나올 때가 됐다. 저소득층은 한계소비성향이 상대적으로 높다. 빚이 줄고, 소득이 늘면 소비 대열에 합류해 내수에 바로 온기가 돌 것이다. 노사 간 대타협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화와 임금인상도 유도해야 한다. 사회를 병들게 만든 비정규직 문제는 국민통합의 차원에서도 근원적 해결이 불가피하다. 노사정의 치열한 토론과 타협이 연중무휴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케인스는 기존 경제학의 금기였던 비합리성을 투자의 동기로 연결시켰다. 이론에 현실을 억지로 맞추지 않고 거꾸로 현실에 이론을 맞춘 셈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19년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책을 썼다. 국제정치학자가 아니었지만 가혹한 배상금을 물게 된 패전국 독일이 또 다른 대전(大戰)을 일으킬 가능성을 경고했다. 당면한 현실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치열함이 20년 후의 제2차 세계대전을 예견한 비결이었다.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한국경제를 건져내려면 대통령은 민심이 소용돌이치는 현실의 광장으로 달려 나와야 한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가장 현실적인 결정을 제때 내려야 한다. 대통령이 먼저 꿈틀거리는 ‘야성적 충동’을 보여줘야 기업도, 국민도 믿고 고난을 견뎌낼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이하경 논설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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