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閑談]/<단상, 한담>

지렁이

Bawoo 2014. 8. 9. 10:58

지렁이

 

며칠만에 운동을 나선 길

점점 나빠지는 심장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리 힘마저 없어지면 안되니

걷기라도 열심히 해야된다는 생각으로 나선 길

 

아직은 튼튼한 다리에 감사하며

동네 앞산을 부지런히 걷는다

최소 두시간은 걷기로 하고

 

목적했던 반환점을 돌아 한숨을 돌리고

도서관 뒤 약수터로 근력운동을 하러 가는 길

그 길 가는 중

콘크리트 포장 인도에

지렁이 한마리 나와 꿈틀거리고 있다.

 

징그러운 놈

녀석은 언제봐도 징그럽다.

어릴 적

가재잡겠다고

약수터 도랑에 있는 큰 돌 들쳤다가

가재는 없고

커다란 지렁이만 꿈틀대고 있는 것에

어찌나 놀랐던지...

 

근데 왜 나와있담

습기도 없고 그늘도 없어

그냥 있으면 틀림없이 죽을텐데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람

 

둘러보니

길 한 쪽은 산을 막은 콘크리트 담이니 아니고

차도와 인도를 구분해 놓은 곳에

화단이 있는걸 보니

 

녀석 거기서 나온 것 같다.

 

근데 도대체 왜 나왔담.

나와봐야 콘크리트 바닥 뿐이라

살만한 곳이 전혀 없는데

그걸 모르고 나왔을까

사는 곳이 너무 어둡고 답답해서

좀 더 나은 곳이 있나 하고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이미 죽은 녀석들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기들끼리 한바탕 전쟁이라도 한 것인가

 

암튼 살려주기로 했다

그냥 놔두면 틀림없이 죽을테니

보기에만 징그럽지

사실 나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는 동물이다

 

근데 방법이 없다 

손으로 잡을 수는 절대 없는 일

두리번 거리며 

녀석을 화단으로 다시 밀어낼

나뭇가지 같은게 있나 찾는다.

 

다행이

 부러진 나뭇가지 한개

눈에 들어온다

간밤 비에

산 위에서 내려온 것 같다

 

옳타꾸나 얼른 집어들고

녀석을 화단 쪽으로 밀어낸다

 

녀석 진저리치듯 꿈틀거린다

내 마음도 녀석의 징그러운 모습에

진저리가 나지만

녀석은 이런 내 마음과 관계없이

자기를 살려주려는 것인지는

전혀 모르고 진저리를 친다

 

몇 번의 밀어내기 끝에

드디어 화단 위에 녀석을 올려놓았다

 

그곳은 아늑하다

습기도 있고 그늘도 있다

녀석이 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 좋은 곳을 마다하고 

습기도 그늘도 없는 콘크리트 바닥인 인도로

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곳에서 자칫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

나를 만나 목숨을 건진 건 천만다행인 일 

 

녀석 나에게 감사하고 있을까

 

뭐 그러지 않아도 된다

 

어린 시절 녀석 모습만 보고도

질겁을 한적이 한두번이 아닌

정말 싫은 짐승이고 지금도 그렇지만

녀석도

한 세상 잘 살다 가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일이니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콘크리트 바닥에서 온몸이 말라가며 죽는

그런 비참함으로

삶을

마치는 것을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리네 인간의 삶도

노년까지 순탄하게 살다

큰 병 앓지않고 큰 고통없이

언제까지일진 몰라도

그렇게 살다가야 가장 큰 복이고

 

나도 그런 삶을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세월동안

  살다 가고 싶은 것을...

 

 

2014.8.9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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