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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노래한 한시 3 수

Bawoo 2014. 9. 28. 22:05

 

秋夜(추야)

                                                          박영(朴英)

 

 

西風吹動碧梧枝(서풍취동벽오지) : 서풍이 불어 벽오동 가지 흔드는 밤

落葉侵窓夢覺時(낙엽침창몽각시) : 낙엽이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깨였네

明月滿庭人寂寂(명월만정인적적) : 밝은 달 뜰에 가득하나 사람은 적적하고

一簾秋思候蟲知(일염추사후충지) : 주렴속 정념을 저 벌레가 아는지 물어보리

 

 

 

박영1471(성종 2)~ 1540(중종 35). 조선 중종 때의 주자학자.

본관은 밀양.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딸이다. 무예에 뛰어나 1491(성종 22)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참여했다. 이듬해 9월 무과에 합격해 선전관이 되었다.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성종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대학〉 등의 경전을 배웠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는 조방장(助防將)을 거쳐 강계부사·의주목사·동부승지·내의원제조 등을 거쳤다. 15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옴으로써 기묘사화를 모면하고, 다음해 영남좌절도사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붕의 영향을 받아 김굉필의 학통을 이었고, 천문·지리·성명(性命)·산수 등에 박학했다. 또한 의술에도 뛰어나 〈경험방 經驗方〉·〈활인신방 活人新方〉 등을 저술했다. 문하에서 이황(李滉)·박운(朴雲)·김취성(金就成)·김취문(金就文)·신계성(申季誠)·박소(朴紹) 등이 배출되었다. 저서에 〈백록동규해 白鹿洞規解〉·〈송당집〉 등이 있다. 황간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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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書懷(서회)

                                                                                金宏弼(김굉필)

 

處獨居閒絶往還(처독거한절왕환) : 홀로 있으며 한가한 곳에 사니, 오가는 이 드물고

只呼明月照孤寒(지호명월조고한) : 오직 달을 부르니, 가난하고 외로운 나를 비추네

憑君莫問生涯事(빙군막문생애사) : 그대 생각으로, 나의 생애 묻지 말라

萬頃煙波數疊山(만경연파수첩산) : 넓은 바다 안개 낀 물결, 첩첩한 산들이 가득하니라. 

 

 

金宏弼(김굉필)1454(단종 2)~ 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실천하기에 진력했으며, 그의 도학 실천 의지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경기도의 성남(城南)·미원(迷原)과 야로(冶爐:처가)·가천(伽川:처외가)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時事)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一身)의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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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悲秋(비추)

                                                              신종호(申從濩)

 

月子纖纖白玉鉤(월자섬섬백옥구) : 하얀 옥 갈구리에 가는 달이 걸려 있고

霜風露菊滿庭秋(상풍노국만정추) : 서리 바람에 이슬 국화 가을 뜰에 가득

天翁不辦埋愁地(천옹불판매수지) : 시름 묻을 곳을 하나님은 마련 못한 채

盡向寒窓種白頭(진향한창종백두) : 모두 타향에다 흰 머리만 심었다오.

 

 

신종호(申從濩)1456(세조 2)∼1497(연산군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차소(次韶), 호는 삼괴당(三魁堂). 도승지 장(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숙주(叔舟)이고, 아버지는 봉례랑(奉禮郎) 주(澍)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약관으로 성균진사시에 장원을 하고, 1480년 식년문과에 다시 장원을 하였다. 그 해 감찰에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듬해 천추사(千秋使) 홍귀달(洪貴達)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그 때 명나라 역관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수료병(水潦病)에 걸려서 돌아오지 못하고 고생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나라 예부(禮部)에 건의하여 그들을 치료하게 한 뒤, 모두 귀환하게 하였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뒤 수찬(修撰)·교리를 역임하였다.
1486년 부응교로 있을 때 또다시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세 번이나 장원을 한 것은 처음이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해에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으로 초배(超拜:차례를 뛰어넘어 제수됨)되었고, ≪여지승람≫을 정정하여 ≪동국여지승람≫으로 다시 찬술해내는 데 참여하였다.
이듬해 그 공으로 왕으로부터 녹피(鹿皮)를 하사받았으며, 왕명으로 요동(遼東)에 가서 한어(漢語)를 습득하고 돌아왔다. 1488년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부승지가 된 뒤 예조참의·좌승지·우승지·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91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북쪽 오랑캐 침입 사건에 관한 어전회의 중에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면되었으나,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예조·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94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년(연산군 2) 병환을 무릅쓰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인 1497년에 돌아오던 중에 개성에서 죽었다. 관후(寬厚: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함.)한 장자의 풍모를 지녔으며, 문장과 시·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 ≪삼괴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매계집(梅溪集)』
  • 『해동잡집(海東雜集)』

* 자료 출처: 시-카페 '한시 속으로 및 검색/ 프로필- 다음백과 및 민족문화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