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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노래한 한시 몇 수

Bawoo 2014. 10. 2. 23:42

                       落葉(낙엽)

                                                      김시습(金時習)

           가을 낙엽 사랑

落葉不可掃(낙엽불가소) : 지는 잎 쓸어버릴 수 없네

偏宜淸夜聞(편의청야문) : 궁벽한 곳 맑은 밤 듣기 좋으니.

風來聲慽慽(풍래성척척) : 바람 불면 우수수 내는 소리

月上影紛紛(월상영분분) : 달 뜨면 그림자 어지럽도다.

鼓窓驚客夢(고창경객몽) : 창을 두드려 나그네 꿈을 놀라게 하고

疊砌沒苔紋(첩체몰태문) : 섬돌에 쌓여 이끼 무늬 덮는다.

帶雨情無奈(대우정무내) : 빗물 젖은 정을 어이할이거나

空山瘦十分(공산수십분) : 빈 산 너무 야위었어라.

 

1435(세종 17) 한성~ 1493(성종 24) 충청 홍산.

조선 초기의 문인.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신라 알지왕의 후예인 원성왕(元聖王)의 동생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무반 계통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나아가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李季甸)·김반(金泮)·윤상(尹祥)에게서 수학하여 유교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색인 : 생육신).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사랑(자비)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저(遺著)로는 〈금오신화〉·〈매월당집 梅月堂集〉·〈매월당시사유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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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秋雨夜(신추우야) 

                                                                                변계량(卞季良)

 

忽忽逢秋意易悲(홀홀봉추의역비) : 갑자기 가을 되자 생각이 슬퍼지고

坐看楓葉落庭枝(좌간풍엽낙정지) : 앉아서 바라보니 뜰 나뭇가지에서 단풍잎 떨어진다

算來多少心中事(산내다소심중사) : 마음 속 괴로운 심사 가만히 생각하는데

月暗疎窓夜雨時(월암소창야우시) : 달빛 어두워진, 성긴 창가에 밤비가 내린다.

 

변계량(卞季良)1369(공민왕 18)~ 1430(세종 12). 조선 초기의 문신.

정도전·권근의 뒤를 이어 조선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蘭)이며,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과 권근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 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 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편찬했다. 저서에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 거창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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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送秋(송추)

                                                                  김익정(金益精)

 

西風吹欲盡(서풍취욕진) : 서풍이 불어 다하려는데

白日向何歸(백일향하귀) : 여름은 어디를 향해 돌아가는가

砌下蛩音斷(체하공음단) : 섬돌 아래 벌레소리 끊이고

天涯雁影稀(천애안영희) : 하늘가에는 기러기 그림자도 드물다

山應臨別瘦(산응임별수) : 산은 응당 가을을 보내기에 파리하고

葉爲送行飛(엽위송행비) : 나뭇잎은 가을을 보내고 나르는구나

來往光陰變(래왕광음변) : 오가는 세월이 변해가니

衰翁也獨悲(쇠옹야독비) : 쇠한 늙은이 홀로 슬퍼하노라.

 

김익정(金益精) ?∼1436(세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비(子斐). 구(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목(成牧)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 휴(休)이며, 어머니는 김효신(金孝信)의 딸이다.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 뒤 헌납(獻納)·직제학(直提學)·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관찰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承政院知申事)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자료 출처: 시-카페 ;한시 속으로'/ 프로필-다음 및 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