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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노래한 우리 한시

Bawoo 2014. 9. 26. 22:13

                              秋日(추일)

                                                                          權 遇(권우)

 

竹分翠影侵書榻(죽분취영침서탑) : 푸른 그림자 나눠 책상 맡에 스며들고

菊送淸香滿客衣(국송청향만객의) : 국화는 맑은 향기 보내 나그네 옷 가득해라

落葉亦能生氣勢(낙엽역능생기세) : 지는 잎도 또한 능히 기세를 일으켜서

一庭風雨自飛飛(일정풍우자비비) : 뜰 가득 비바람에 절로 날려 가누나.

 

권우(權遇, 1363년 - 1419년(세종2년)는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자 세종대왕, 학역재 정인지의 스승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처음 이름은 권원(權遠), 처음 자는 중려(仲慮)였고 뒤에 자를 여보(慮甫)로 바꾸었다.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뒤에 포은 정몽주의 제자가 되었다. 1385년 우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를 거쳐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는 예문관 제학에 올랐으며,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빈객이 되어 세종에게 경사를 가르쳤다. 호 매헌(梅軒).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권희(權僖)의 아들.

 

 

어려서는 형 권근에게서 배웠고, 자라서는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학하고, 1385년 우왕 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박사를 거쳐 공양왕 말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스승인 정몽주나 동문인 길재, 이숭인 등과는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역성혁명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교육에도 적극성을 보여 정인지 등의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한 뒤에도 계속 관직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교서감승(校書監丞), 군기감승(軍器監丞) 등을 거쳐서 예문관제학에 올랐으며, 1418년 태종 18년 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빈객(賓客)이 되어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세종의 즉위를 본 후 1419년에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성리학과 주역에 밝았다. 저서로 《매헌집》(梅軒集), 글씨로 충청북도 충주에 소재한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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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秋閨詞(추규사) 4首

                                                                    김삼의당(金三宜堂)

 

夜色迢迢近五更(야색초초근오경) : 밤 깊어가니 새벽이 가까워 오고

滿庭秋月正分明(만정추월정분명) : 가을 달은 뜰에 가득 밝게 비추네.

凭衾强做相思夢(빙금강주상사몽) : 이불에 기대어 님의 꿈을 꾸려 해도

纔到郞邊却自驚(재도랑변각자경) : 님 계신 곳 가자마자 놀래서 잠을 깨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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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秋閨詞(추규사) 5首

                                                                    김삼의당(金三宜堂)

 

五更明月滿西城(오경만월만서성) : 새벽녘의 밝은 달은 서쪽성에 가득한데

城上何人弄笛行(성상하인롱적행) : 그 누가 성위에서 피리 불고 가는가.

可憐孤獨深閨夜(가련고독심규야) : 가련한 촛불 하나 규방을 비추는 이 밤

正是愁人夢不成(정시수인몽불성) : 이 생각 저 생각 근심으로 잠 못 이루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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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夜汲水(청야급수) - 맑은 밤에 물을 긷다가

 

 

                                         

                                                                   김삼의당(金三宜堂) 

 

淸夜汲淸水(청야급청수) : 맑은 밤에 물을 길러 갔더니

明月湧金井(명월용금정) : 밝은 달이 우물 속에서 떠오르네.

無語立欄干(무어입난간) : 말없이 난간에 서 있자니

風動梧桐影(풍동오동영) : 오동잎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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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 / 영조 45년-순조23년)

삼의당은 전라도 남원의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났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2-1498)의 후손인 김인혁(金仁赫)의 딸이며,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笠)의 부인이다. 삼의당은 어려서부터 재예에 뛰어나 여공의 틈틈이 책을 놓는 일이 없어 일찍이 중국의 시문집을 비롯하여 경서며 사기류를 널리 섭렵하였다. 삼의당과 하립은 남원 출신인데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두 사람의 집안은 존경받는 학자 집안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데다가, 하립이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자 서른 살이 넘어서 낙향하였다. 부부는 진안(鎭安)에 땅을 마련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고 시문을 화답하며 살았다. 삼의당은 평생을 유교적인 규율과 부도(婦道)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그녀의 시집인 「삼의당김부인유고(三宜堂金夫人遺稿)」에는 253편의 시와 22편의 문이 실려 있다. 그녀의 문집에서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그녀의 평생소원은 남편이 과거에 등과하는 것이어서 산사에서 독서하고, 서울로 유학하는 일을 철저히 권장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였기 때문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머리자락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기까지 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등과하지 못하였으며, 그는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고,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남긴 조선의 여류시인이었다.

 

 

* 출처: 시- 카페' 한시 속으로'/ 프로필-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