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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노래한 한시 몇 수

Bawoo 2014. 9. 22. 21:19

重 陽(중양)

                                                       한용운(韓龍雲)

 

九月九日百潭寺(구월구일백담사) : 설악산 백담사에 오늘은 구월 구일

萬樹歸根病離身(만수귀근병리수) : 온 나무 잎이 지고 내 병도 낫네.

閒雲不定孰非客(한운부정숙비객) : 구름이 흐르거니 누군 나그네 아니며

黃花已發我何人(황화이발아하인) : 국화 이미 피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

溪磵水落晴有玉(계간수락청유옥) : 시냇물 말라 돌이 구슬 같고

鴻雁秋高逈無塵(홍안추고형무진) : 하늘 높이 기러기 나는 곳 먼지와 멀어

午來更起蒲團上(오래강기포단상) : 낮 되어 다시 방석 위 일어서니

千峰入戶碧嶙峋(천봉입호벽린순) : 첩첩한 천봉만학(千峰萬壑) 문으로 들어오네

* 참고 *

 

중양절(重陽節)은 한국, 중국,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매년 음력 9월 9일에 지내는 세시 명절로, 시를 짓고 국화전을

먹고 놀았다.

1년 중 홀수가 두 번 겹치는 날에는 복이 들어온다고 하여 음력 1월 1일, 5월 단오(5일), 7월 칠석(7일) 등을 명절로 지내왔다.

중양절이 되면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시를 읊거나 산수를 즐기기도 하였다. 또한 가정마다 화채를 만들어 먹고 국화전을

부쳐 먹기도 하였다. 이날 제비들은 따뜻한 강남을 향해 떠나고 뱀과 개구리는 겨울잠을 자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간다.

 

유래는 옛날 중국의 어느 마을에 신통력을 지닌 장방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어느날 장방이 환경이란 사람을 찾아와 “9월 9일 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니 식구들 모두 주머니에 수유꽃을 넣었다가 팔에 걸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환경이 장방의 말대로 식구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놀다가 이튿날 집에 내려와 보니 집안의 모든 가축들이 죽어 있었다. 그후부터 중양절이 되면 산에 올라가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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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이라는 말은 9가 양수이기 때문에 양수가 겹친 것을 뜻한다. 9가 2번 겹치므로 '중구'라고도 한다. 속설에는 제비가 3월 3일에 왔다가 중양절에 강남으로 간다고 한다.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9를 양수의 극이라 하여, 이것이 겹쳤기 때문에 이날을 쌍십절(10. 10)과 같이 큰 명절로 삼아왔다. 이날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며 고향생각을 했다고 전한다.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명절로 정하여 잔치를 베풀어 군신이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봄(3. 3)과 가을(중양절) 2차례에 걸쳐 노인잔치를 크게 베풀어 경로사상을 드높이는 동시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다.지방에 따라서는 이날 성묘하고 시제를 지내기도 한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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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聽秋蟬(청추선 : 가을 매미 소리)

                                                                     강정일당(姜靜一堂)

 

萬木迎秋氣(만목영추기) : 어느덧 나무마다 가을빛인데

蟬聲亂夕陽(선성난석양) : 매미 소리 석양에 어지럽네

沈吟感物性(침음감물성) : 계절의 변화를 깊이 느껴서인가

林下獨彷徨(임하독방황) : 숲 속에서 혼자 방황하고 있네.

 

* 강정일당 [姜靜一堂] 1772(영조 48)~ 1832(순조 32). 여류도학자(道學者).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재수(在洙),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며 윤광연(尹光演)의 아내이다. 시아버지 타계 후 집안이 더욱 어려워져 남편이 생계 마련에 분주하자 이를 만류, 다시 학문의 길로 들게 하였으며 독학하던 남편을 타일러 당대의 학자 송치규(宋穉圭)의 사문(師門)에 들어가게 하였다. 항상 남편과 학문적 자세를 가다듬는 편지를 나누었는데, 이를 보면 한 남자의 아내라기보다는 학덕인(學德人)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실덕(實德)과 의(義)를 중시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이 완성된 때 성성성현(成聖成賢)에 가까워짐을 주장하였다. 또한 옥은 옥이고 돌은 돌이 듯 남이 알아주든 말든 실덕에 힘써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上不愧干天下不愧干地)고 역설했다. 그녀의 학문과 덕을 기리어 남편 윤광연은 〈정일당유고 靜一堂遺稿〉를 출간했다.<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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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秋景(추경)

                                                최석항(崔錫恒)

 

 

秋山樵路轉(추산초로전) : 가을 산 숲길은 구비돌아

去去唯淸風(거거유청풍) : 가도 가도 맑은 바람 뿐

夕鳥空林下(석조공림하) : 잠자려는 새 빈 숲으로 날아들면

紅葉落兩三(홍엽락양삼) : 붉게 물든 잎 두셋 떨어진다.

 

최석항(崔錫恒)1654(효종 5)~ 1724(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 할아버지는 영의정 명길(鳴吉)이며, 아버지는 후원(後遠)이다. 후량(後亮)에게 입양되었다. 형은 소론의 거두 석정(錫鼎)이다.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선 후 부수찬·경상도관찰사·개성유수·형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721년(경종 1)과 그 이듬해에 걸쳐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좌참찬으로서 경종으로 하여금 세제(世弟:후에 영조)의 대리청정을 철회하게 하여 소론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재임중에 죽었다. 1725년(영조 1)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몰려 관작이 추탈되었고, 그후 여러 번 복관과 추탈이 반복되다가 노론정권이 안정된 정조 때 최종적으로 추탈되었다. 몸집이 작았으나 관찰사 재직시 뛰어난 판단으로 전국에서 제일이라는 평을 들었고, 1723년 실록청 총재관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손와유고〉는 노론에 대해 소론의 정당성을 주장한 중요한 정치사 자료이다.<다음백과>

최석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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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출처: 시- 카페 /한시 속으로, 프로필 및 용어-다음 및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