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閑談]/<단상, 한담>

왕잠자리

Bawoo 2014. 10. 6. 12:52


왕잠자리

 

1.

어린 시절

단 한번도 잡아보질

못했었다.

그토록 잡고 싶었는데도

녀석은 늘,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날아 다니거나 앉아 있었다.

동네 작은 연못이나 방죽 물위 하늘을 

유유히 날거나 물가 풀들 위에.

 

맨손만으론 절대 잡을 수 없었고

나 혼자 힘으로는

 거의  넘어 갈 수 없는

물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애물도 있었다.

 

2.

 

날아다닐 때의

자태는 얼마나 멋있었는지,

 

한 여름이면

시골 할아버지 댁 마당에

늘상 널려 있던 보릿단 위에 앉아 있다,

내 손에 들려있는 댑싸리 빗자루 밑에 깔려

손쉽게 잡히던

쌀잠자리, 보리잠자리들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너무 쉽게 많이도 잡혀 

가둬 둘 마땅한 곳이 없어

별수 없이 내 양입술 사이로  

날개를 물어 포로로 만들어버린

쌀잠자리, 보리 잠자리들.

녀석들은 내게는 이미 큰 매력이 없는 존재였었다.

도저히 잡을 수 없었던 왕잠자리를 잡는 것이

어릴 적 내  꿈이었었다.

 

이룰 수 없는 커다란 꿈

 

3.

내가 그토록 잡고 싶었던

그 왕잠자리를 잡아들고

뽐내는 모습으로  의기양양해 하던

동네 또래 아이를 어쩌다 볼 때면

그 애가 얼마나 부럽고 대단해 보이던지.

 

그 동네 아이 손에는

잠자리채가 들려 있었다.

쉽지는 않지만

물위를 날아 다니거나

물가 풀 위에 앉아 있는 왕잠자리를

눈치 안 채게 잡을 수 있는 잠자리 채.

필경 엄마나 아버지가 사주었을

그 잠자리채

 

4.

나는 잠자리 채가 없었다.

가질 수도 없었다.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고

엄마도 사주지 않았다.

사주고 싶어도 사줄 돈도 없었을테고

설사 있었어도

사줄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늘 곁에 없었다.

살아 계셨으나

늘 다른 곳에서 사셨다. 

 

엄마는 사 줄 생각도 능력도 없었고

아버지는 아예 내 곁에 늘 없었다

 

나는  잠자리채를  든 아이가

마냥 부럽기만 했었다.

잠자리 채를 사준 엄마, 아빠가 있는 것이 부러웠고

'나도 잠자리채만 있으면,

얼마던지 잡을 수 있을텐데' 하고

생각하며 또 부러워했다.

 

5.

그 왕잠자리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시골에 살 때 본 이후로는 처음.

 

이젠 나이가 들어

날씨가 추워지면 못나간다고

 더 쌀쌀해지기 전에

따스한 가을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쏘이자고

아내와 함께 나들이 나선

살고 있는 도시 작은 공원 연못에서

아주 우연히.

 

6.

내 눈에 들어 온

잠자리 

이젠 더 이상 커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그토록 크고 멋있어 보이던

시골 고향에서 유일하게 기와집이던

종가집이

커서 고향에 들렀을 때

별로 커보이지 않았듯이,

녀석 모습은 여전히 멋있기는 하지만

어릴 적 보았던 만큼  멋있는 모습은 아니다.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연못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여전하지만

잡고 싶은 마음도 잡을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저 녀석

내 어릴 적에는

그토록 잡고 싶었었는데'하고

바라보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해본다.

 

7.

그런 내 곁에는

어느 새 귀밑머리가 새하얘진 아내가,

같이 살아오면서 별로 해 준 것도 없는 나를,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든든한 반려자로 생각한다는 듯이

내 팔장을 꼬옥끼고

같이

 왕잠자리를 바라다보고 있다.

 

8. 

그런 우리 노부부 뒤로

'아빠 나 저 잠자리 잡아 줘'하며

 그토록

왕잠자리를 잡고 싶어했던

 내 어릴 적

딱 그만한 나이로 보이는 아이가,

 

한 손은 아빠로 보이는

젊은 남자의 손을 꼬옥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 부부가 바라보고 있는

왕잠자리를 가르키고 있다.

 

아빠는 틀림없이 잡아주실꺼야 하는

믿음이  가득한 찬 눈빛으로

아빠일 젊은이를 바라보며,

 

 그 둘의 모습을

분명 엄마이자 아내일 젊은 여인이

그 둘 곁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품안엔 또 다른 자식으로 보이는

갓난 아기를 

꼬옥 보듬어 안고서.

 

 

2014. 10. 6 아침에

 전날 아내와 함께 월미도 공원에 가서 우연히 본 왕잠자리를 생각하며 써보다.

 

 

<시인과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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