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것을 따라다니다
김형영(1944∼)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
내가 꽃인데
꽃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내가 바람인데
한 발짝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울안에 갇혀 산다.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인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평생도 모자란 듯 기웃거리다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는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관통하는 화두는 기억과 정체성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1978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 상을 받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 기억을 잃어버린 퇴역 탐정이 낡은 사진을 단서로 삼아 과거의 자신을
추적하는 여정인데, 마치 다른 사람의 뒤를 캐듯이 내가 나를 찾아 나선다. 기억의 복원과 존재의
뿌리 찾기를 연계한 점에서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이 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라 표현했다.
김형영 시인의 새 시집 ‘땅을 여는 꽃들’에서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만났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는 첫 구절이 뜨끔하다.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풀어낸 작품이다.
설치미술가 서도호 씨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관심을 두는 작가다.
지금 서울 리움미술관의 개관 10주년 전에 선보인 신작 ‘우리 나라’는 역사 뒤에 숨은 평범한 사람들을 조
명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지도를 가까이 들여다보니 1.5cm 인물상이 촘촘히 밀집해 서있다. 개인이 집단을 이루지만 집단 속 하나란 정체성에 기대 나를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말하는 듯도 하다.
모디아노 소설에선 전쟁의 악몽에 떠밀려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 애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데 비해
한국 사회는 그 반대다. 남들 잣대에 따라 자신의 중심을 쉽게 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유명 인사의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얻은 정보와 의견의 편식에 탐닉해 자기 정체성을 끼워
맞추며 살아들 간다. 심리학의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처럼 개개인의 생각보다 집단의
의견은 더 극단적 방향으로 치닫곤 한다. 언제 어디서나 강경파가 득세하고, 유사한 의견을
공유한 집단에서도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아니라 철저한 동조와 순응을 요구한다. 남에게 기대어 사는 삶, 남 탓하며 살아가는 삶. 둘은 동전의 양면인 양 한국인의 정서적 특질을 이룬다면 과격한 표현일까.
스스로 헛것을 쫓아가다 나는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삶은 불행하다. 내가 안 보여서 혹은 나를 보기 싫어서, 자신이 속한 무리에 섞여 적당히 지내고 있진 않은가. 유통기한이 지났는지 요즘에는 소통이라는 말도 뜸하지만 무엇보다 자신과의 대화가 절실해 보인다. 단풍 여행만큼이나 내면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계절, 나와 잠시 마주 서는 시간을 가져볼 일이다. ‘나 없는 나’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면.
서도호의 ‘우리 나라(My/Our Country·2014년)’.
출처: 동아일보-고미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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