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은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이기철
시월의 맑고 쓸쓸한 아침들이 풀밭 위에 내려와 있다
풀들은 어디에도 아침에 밟힌 흔적이 없다
지난 밤이 넓은 옷을 벗어 어디에 걸어놓았는지
가볍고 경쾌한 햇빛만이 새의 부리처럼 쏟아진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 온다
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
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
여윈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
낙엽 위에 눕는다
낙엽만큼 쓸쓸한 생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나뭇잎들이 몸을 포개는 기슭은 슬프고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흘러가버릴 것들, 부서질 것들만 그리워해야 한다
이제 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 때이다
새들과 들쥐들이야 몇 개의 곡식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망각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기억은 밀폐된 곳일수록 조밀해진다
이제 가을바람이 남겨놓은 것들만이
내 것이다
시월은 또 작년의 그 자리에서
오래 참으며 나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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