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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아버지와 아들딸의 슬픈 전쟁

Bawoo 2014. 11. 10. 23:29

아는 선배의 아들이 직장을 구하고 있다. 세칭 명문 S대 경영학과 졸업반. 평균 학점 3.5를 넘는다. 선배 말로는 취업 걱정은 남의 일로 생각했단다. 그런데 웬걸. 몇 곳에 응시했다가 죄다 떨어졌다. 선배 아들에게 다른 문제가 있는지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자식 가진 부모 입장에서 충격을 받았다.

 출신 대학 보고 사람 뽑는 관행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배에겐 미안하지만. 하지만 주변을 보면 다른 젊은이들이 척척 취업하는 것도 아니다. 이공계는 그럭저럭 직장을 구한다지만, 인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금 나을 뿐이다. 소문 그대로 최악의 취업난이다.

 선배 아들의 낙방은 학벌사회가 깨졌다기보다는 일자리가 워낙 적어 벌어진 현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한국 경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매년 2~3%대 저성장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은 국내보다 비용이 싼 해외에 공장을 짓는다. 서비스업은 규제에 묶여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맨날 그 타령이다. 눈 씻고 찾아봐도 일자리 늘어날 구석이 별로 없다.

 요새 젊은이는 기성세대보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놀랄 정도로 똑똑하다. 인턴 같은 직무 경험과 스펙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고도 돌아온 건 취업 낙방이니 달리 위로할 말이 없다. 젊은이 입장에선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느냐’고 기성세대에 항변할 만하다.

 딱한 노릇이지만 기성세대도 할 말은 있다. 자식 사랑이 남 달라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내했다. 아들딸 교육을 위해서라면 세계에 유례없는 ‘기러기 아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기성세대는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다. 일자리가 없어지면 살 길이 막막하다. KB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가계마다 노후자금으로 월 218만원이 필요하다. 준비된 돈은 월 91만원.

 사정이 이러니 직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일하기를 원한다. 마침 법이 바뀌어 300인 이상 기업은 2016년부터 정년을 60세로 연장해야 한다. 그 아래 기업은 2017년부터 연장한다. 달리 호구지책이 없는 기성세대로선 더없이 반갑다. 정년 연장은 고령화를 겪는 전 세계 국가가 택하는 대책이기도 하다.

 공짜는 없는 법. 기업은 인건비 부담이 늘게 됐다. 그만큼 젊은이 채용을 줄이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50대 정규직 근로자(237만 명)가 사상 처음 20대 정규직(229만 명)을 앞질렀다. 올가을 취업난에는 기업이 정년 연장에 대비하느라 채용을 줄인 게 영향을 미쳤다. 부모의 정년 연장이 자식의 취업난으로 부메랑이 돼 돌아온 셈이다.

 정년 연장 못지않게 미묘한 게 연금이다. 기성세대가 연금을 지금처럼 받으면 자식들에게 남는 건 빚잔치다. 젊은이는 연금을 납입만 하고 받지 못하는 상황이 닥친다. 연금 개혁의 본질은 단순 명료하다. 먹고살기 힘드니 후세 생각 말고 지금 많이 타느냐, 아니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에게 좀 남겨주느냐 중의 선택이다.

 기성세대와 젊은이가 생존 문제를 놓고 벼랑 끝 줄다리기를 하는 우스운 꼴이 됐다. 과장해서 얘기하면 부모와 자식이 다투는 형국이다. 먹고사는 문제인 만큼 이념·지역 갈등보다 더 치열하면서도 낯 뜨겁게 흐를 가능성이 있다. 우울한 현실인데, 해법이 마땅치 않다. 예전처럼 경제가 매년 5~6%씩 쑥쑥 성장해주면 부모는 정년을 연장하고, 자식은 직장을 구하고, 모든 게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다. 불행히도 지금의 경제 구조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나눠먹을 게 많지 않다면 방법은 뻔하다. 쪼개서 아껴 먹는 수밖에. 기성세대는 정년 연장 대신에 임금을 덜 받는 수밖에 없다. 내 밥그릇을 채울수록 젊은이가 일할 기회를 잃는다. 그 젊은이 중에 내 아들딸이 포함될 수도 있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이번만큼은 자제가 필요하다.

 연금도 마찬가지다. 요새 시끄러운 공무원연금뿐 아니라 모든 연금이 부실하다. 더 내고 덜 받게 고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그러지 않고는 연금 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부모와 자식이 다투다가 다 함께 망하는 끔찍한 상황이 올 수 있다. 다들 한 발씩 물러서서 공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 출처: 중앙일보-고현곤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