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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시(일본)/ 마쓰오 바쇼

Bawoo 2014. 11. 25. 07:39

세계의 명시/ 마쓰오 바쇼

하이쿠 4수

오랜 못이여

개구리 뛰어들어

물 치는 소리

古池や蛙飛こむ水のおと

(ふるいけや かわずとびこむ みずのおと)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閑さや岩にしみ入る蟬の聲

(しずかさや いわにしみいる せみのこえ)

말을 하려니

입술이 시리구나

가을 찬바람

物いへば脣寒し秋の風

(ものいえば くちびるさむし あきのかぜ)

재 속 화롯불

사그라드네 눈물

끓는 소리

埋火も消ゆや涙の烹ゆる音

(うずみびも きゆやなみだの  にゆるおと)

*하이쿠에는 제목이 없다. 한 수가 너무 짧아 사계절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네 수를 골랐다.

시를 말하다-정끝별 l 시인

 

하이쿠(俳句)가 하이쿠인 까닭은 그것이 짧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정형시가 아닐까 싶다. 5·7·5로 읊어지는 총 17음절에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인데 그 여백이 가져다주는 울림이 만만치 않다. 짧은 시임에도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季語’)가 들어가야 하고, 5·7·5 사이에서 한 번 끊어줌으로써 영탄이나 여운을 주어야(‘切字’) 한다. 바람을 타듯 온몸을 활짝 열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인간을 꿰(貫)뚫고 삶과 통(通)하여 소리 없는 일갈처럼 ‘치고 빠져야’ 한다. 그러나 설명하거나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바쇼(芭蕉)는 이러한 하이쿠의 정신을 파초(芭蕉)에서 발견한다. 38세의 봄, 한 제자가 파초 한 포기를 보내와 심었더니 날로 무성해져 암자 전체를 덮게 되었다. 파초에 둘러싸인 그는 도우세이(挑靑)란 호를 바꾸어 바쇼라 했으며 자신이 사는 암자를 ‘바쇼우안(芭蕉庵)’이라 부르게 했다. ‘파초를 옮기는 말’이라는 산문에서 바쇼는 파초를 사랑하게 된 까닭을 ‘무용의 용(無用之用)’에서 찾고 있다. 봉황의 꽁지깃처럼 화려하지만 찢겨지기 쉽고, 꽃이 피지만 화려하지 않고, 줄기가 굵지만 목재로는 쓸 수 없고, 온갖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도록 하는 넓은 잎은 대신 넓은 잎그늘을 선사해주기에 바쇼는 파초를 사랑한다고 했다. 파초 본래의 그러함 속에서 바쇼는, 하이쿠는 물론 삶의 비의(秘意)까지를 발견해내고 있는 셈이다. ▶이와테 현 히라이즈미에 있는 바쇼의 상

첫째 시부터 보자. 우수(雨水) 지나면 경칩이다. 놀랄 경(驚), 숨을 칩(蟄)! 그러니까 삼월 초순의 경칩은 겨우내 얼어 있고 숨어 있던 모든 것들이 놀라 뛰쳐나오는 무릇의 봄, 바야흐로 봄을 예고한다. 오래 묵은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들며 내는 물소리를 떠올리다보면 이 경칩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봄이 오는 소리, 그 들리지 않는 소리를 바쇼는 개구리의 몸으로 듣고 있다. 생명의 살갗과 정지된 물의 심연이 맞닥뜨리며 울리는 찰나의 소리, 촌음(寸陰)의 개구리 시간이 유구(悠久)한 연못의 시간을 일깨우는 생생과 상생의 소리이다. 하이쿠를 대표하는 시이다.

둘째 시. 여름의 깊은 초록에 둘러싸인 산사는 적막할 것이다. 이 적막한 정적을 날카롭게 울리는 매미 소리가 더욱 서슬 푸르게 한다. 짝짓기 상대를 부르는 수매미 울음소리에 여름 절집의 고요와 한적이 대비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초록이 짙고 매미 소리가 짙어 그 짙음이 뚝뚝 배어나는 듯하다. 배어나서는 커다랗고 메마른 바위에 스며드는 듯하다. 사랑의 소리, 생명의 소리는 그렇게 수천만 년을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바위를 적시고 깊숙한 바위의 마음에까지 가 닿는 것이리라.

셋째 시. 하이쿠는 감각의 향연이다. 들리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아이러니의 노래다. 이 감각의 향연 속에 통찰과 사유와 깨달음이 새겨져 있다. 바쇼는 가을을 입술 끝에서 시린 촉각으로 읽어낸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는 말이 있다. 욕망이 담긴 말일수록 그 말이 나오는 입술 끝은 촉촉이 젖어 있기 마련이다. 말보다 침묵을, 머리보다는 감각을, 인위보다는 자연을 먼저 헤아려볼 일이다. 입술 끝에 맺히는 욕망의 뜨거운 말을 제어하는 것은 입술 끝에 와 닿는 가을 찬바람이다. 그러니 말을 내뱉기 전 가을 찬바람 먼저 들이쉬고 볼 일이다. 다급히 말 먼저 뱉고 나면 가슴까지 시리게 될 것이다. 말하려는 입술은 늘 젖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넷째 시. 한겨울이다. 재 속의 화롯불은 사그라지고 눈물은 끓어오른다. 슬픔의 눈물이 떨어져 화로의 불을 꺼뜨리기라도 하듯, 아니 떨어진 눈물이 화로의 불 속에서 끓기라도 하듯, 마음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기 때문에 화로의 불이 점점 사그라지는 것일까. 화롯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화롯불을 바라보며 슬픔을 가누고 있는 감각적 표현이 압권이다. ‘끓는 소리’는 무엇인가 끓어오르는 모양과 그 소리를 환기하는데, 그것도 ‘눈물 끊는 소리’라는 탁월한 표현을 통해 그 슬픔이 가누기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점점 꺼져 가는 화롯불은 소멸을 향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지표인바, 이 시는 친지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의 유가족에게 보낸 조문의 시로 알려져 있다. 하루 종일 화롯불 앞에 앉아 달래야 했던 애끓는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을 것이다. 이 뜨거운 슬픔 때문에 겨울이 더욱 춥게 느껴진다.

“나그네라고/ 이름을 불러주오/ 초겨울 가랑비”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바쇼는 삶을 여행이라 여겼다. 일본 전역을 떠돌았으며 특히 46세 때 감행했던 동북부 지역으로의 긴 여행은 유명하다. 이때의 여행을 기록한 책이 <오쿠노호소미치(奧の細道)>인데, 바쇼는 그 여행길마다 명품의 하이쿠를 남겼다. 오고는 떠나고, 떠나서는 다시 오는 세월이 바쇼에게는 여행이었고, 그 여행 자체가 바쇼의 길이자 수행이자 하이쿠였다. 바쇼는 나가사키로 가던 중 오사카에서 객사했는데, 죽기 전 51세의 바쇼가 남긴 사세구(辭世句, 세상을 뜨며 남기는 시) 또한 이러했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

말을 타고 여행길에 나서는 마쓰오 바쇼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11.28) 1644년 이가우에노(현재의 미에 현)에서 하급 무사이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662년 무사이자 하이쿠 시인이었던 도도 요시타다(藤堂良忠)의 수하에서 일했다. 1666년 요시타다가 죽자 바쇼는 무사의 길을 단념했다. 1673년 에도로 간 이후, 1677년 하이쿠 선생으로 간판을 내걸고 하이쿠에 심취했다. 1680년 후카가와 암자에 은거하며 중국의 두보와 장자에 심취했다. 1684년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1690년 고향과 오오미지방에서 하이쿠 세력을 확장시켰다. 1694년 오사카에서 타계했다.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ㆍ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 출처: http://cafe.daum.net/music7694/C9Au/1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