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文舜擧(기문순거)
- 백광훈(白光勳)
無紙亦無筆(무지역무필) : 종이도 없고 붓도 없건만
寫懷山竹枝(사회산죽지) : 산대나무 가지로 내 마음을 쓴다네.
君來不敢望(군래불감망) : 그대가 오기를 감히 바라지는 못하지만
此日勝常時(차일승상시) :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보고 싶다네.
백광훈(白光勳)
조선 중기의 문인.
최경창·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린다.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원래 관향은 수원이지만 선조가 해미(海美)로 귀양와 대대로 머물러 살았으므로 해미가 본관이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세인(世仁)이며, 〈관서별곡 關西別曲〉으로 유명한 광홍(光弘)의 동생이다. 이후백·박순에게 수학했으며 22세에는 진도에 귀양와 있던 노수신에게 배웠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書道)를 즐겼다. 그가 과거를 포기하게 된 구체적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미한 가문과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36세인 1572년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의 천거로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이 되어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하게 해 명성을 얻었다. 1577년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정릉(靖陵), 예빈시(禮賓寺),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내면서 서울에 머물렀다. 그에게 관직생활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토지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적 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에 유일한 호구책으로 계속 관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삼당시인으로 불리는 만큼 당풍(唐風)의 시들을 남겼다. 그의 시는 대부분 순간적으로 포착된 삶의 한 국면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전원의 삶을 다룬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안정과 평화로 가득 찬 밝은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과 관직생활의 불만에 의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정구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시대와 맞지 않아 생기는 무료·불평을 시로써 표출했다"고 하면서 특히 절구(絶句)를 높이 평가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1590년 강진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옥봉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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