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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중일록- 이민환

Bawoo 2015. 1. 20. 23:08



이민환 지음·중세사료강독회 옮김/서해문집/208쪽/1만1900원

 
< 이 책을 읽으려고 한 이유>
 
 50여 년 전 중학교 역사 시간에 책 내용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곳이 3군데 있었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이 나는 것이 '임진왜란 당시의 벽제관 전투'' "광해군 시절 명나라를 지원해 청나라를
치러 간 강홍립 지휘 하의 조선군"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최초로  참전한 오산 죽미령 전투"였는데  이 세 전투에 대해 당시의 역사 교과서는 승패를 애매모호하게 기술해 놔서 '이게 이겼다는거야, 졌다는거야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쪽이 참패한 전투여서 기술을 애매모호하게 해서 넘어간 것인데  '이것도 일종의 역사 왜곡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 3 사건 중에 광해군이 임금 시절에 명의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출병한 강홍립 지휘하의  조선군에 대한 기억은 '상황봐서 항복을 하라는 광해 임금의 지시가 있었고 항복을 했다'는 기록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 책-책중일록-인데 이런 기록이 이제서야 번역이 되어 나온 우리나라 학계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궁금하여 읽어보게 되었다.
내용은  앞부분을 잠깐 읽은 것만으로도 당시 조선군의 비참한 패전 상황을 알 수 있었는데-1만3천명 중 살아돌아온 이는 불과 3천 명 정도- 4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게 되어  너무 가슴이 아팠다. 고려 말 원나라의 일본 침공에 동참했던 기록과 함께 우리 조상들의 대외 원정 참패 기록-그것도 마지못해 지원, 참전한-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쓰여있을까 궁금하기 그지없지만 힘없는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이역만리에서 개죽음을 당한 당시의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 그지없다. 그러니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을까를 생각하니 어느 시대나 전쟁이 없는 한 시대를 태어나 살다 가는 것도 큰 행운이다 싶다.
 
 
<읽기를 마치고>
 
한마디로 가슴이 너무 아프다.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출병한 조선군 13,000 명이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7,000여 명이 누르하치군의 기마병에 의해 도륙을 당하고 4000 명이 포로가 되어 그 중 3000 명 정도가 살아남아 귀국을 했다는 것인데 일기체로 된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조선군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병참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미숫가루로 허기를 해결하는 정도였고 무기도 엉망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청의 기마군을 평야지대에서 맞닥뜨렸으니  패전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기껏 총 한번 쏘고 장전할 시간이 없어 그냥 청의 기마병들 칼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 이 당시 조선군 장수들은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가 다께다신겐군을 격멸시킨 3중 방책을 세우고 교대로 조총을 쏘는 방법도 몰랐던 것인지 에고. 마지못해 전장에 끌려나가 다른 나라에서 죽어간 400년 전 조상님들 얼마나 원통했을까?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무기도 빈약하고, 그냥 죽으러 가라고 보낸 당시의 조정 지배층놈들 아닌가? 그런데 포로 생활을 하던 조선병들이 강간을 하고 간음을 했단 기록은 또 무엇인지...포로 생활하면서 이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인데 4,000명이나 되는 조선군 포로들을 민가에 분산 수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대전의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찌됐거나 포로 생활을 하면서 성범죄라니 납득이 안 간다. 
 
중국-명-의 안보 그늘에서 200여 년동안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정권 탈취를 위한 정쟁이나 몰두하다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다시 병자, 정묘 호란을 당한  이후 급기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든 조선의 지배계층.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통이 터지지만 어쩌랴 내가 태어난 이 땅의 선조들이고 나를 비롯한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그 후손들이 우리인 것을.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전선으로 가야 할 평범한 국민의 입장- 나는 나이가 많아 해당이 없겠지만 젊은 시절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니-에서 바라보면 너무도 통탄할 일을 우리 선조들은 겪은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한 전투에서 7,000여 명이 죽은 전투는 현대전인 1950년 한국전쟁때도 없었던 일 아닌가? 에고 ㅠㅠ. 지금은 설사 전쟁이 일어나도 이런 억울한 개죽음-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무기도 엉망인-을 당할 상황은 아닌 것으로 큰 위안을 삼는다.
 
 
 
아래는  책 소개 글(경향신문사외)
 

조선이 후금을 쳤다 대패한 ‘심하 전투’

포로가 됐다 풀려난 문인의 일기
‘조천일기’는 조공사절단 동행기

책중일록
이민환 지음, 중세사료강독회 옮김
서해문집·1만1900원

 
조선이 누르하치의 후금을 선제공격했다가 대패한 이른바 ‘심하(深河) 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해군 11년인 1619년 2월,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1만3000명의 군사를 보내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공격했으나, 그해 3월4일 허투알라 근처를 흐르는 심하의 부차(富車) 들판에서 후금의 기습을 받아 7000여명이 죽고 4000여명이 항복해 포로가 됐다.

 

<책중일록>은 심하전투 당시, 원수 강홍립의 종사관으로 출병했던 문인 이민환이 남긴 전쟁일기이자 포로수기다. 책은 1618년 4월 누르하치가 무순(撫順)을 함락한 때로부터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가 강화 협상의 성공으로 1620년 7월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만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건주(建州)여진의 작은 부족장이었던 누르하치(1559~1626)는 1583년 처음 군사를 일으켜 1616년(광해군 8년) 해서여진까지 병합해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한 상태였다.

 

무순은 심양에서 동쪽으로 45㎞ 떨어진 최전방 국경도시여서 명나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다. 이에 요동 경략(총사령관) 양호의 지휘 아래 후금을 치러 나서면서 조선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처지여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강성해지는 후금과 쇠약해지는 명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펴고자 했던 광해군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원군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는 군대를 동서남북으로 나눠 진격했으나 누르하치는 명의 주력군인 서로군에 집중해 먼저 격파한 뒤 차례로 나머지를 무찔렀다. 지은이 이민환은, 군량이 지급되지 않아 사나흘씩 굶으며 행군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 군량을 기다리기 위해 행군을 늦추려 했으나 명나라 제독 유정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상황, 정보에 어두워 후금의 승전보를 아군의 도착 포성으로 잘못 알아들었다가 기습을 면치 못하는 어리석음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지은이 등이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의 실리외교 덕분이었다. 누르하치는 여러번 조선에 사람을 보내 동맹을 맺어 명나라에 대항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사신도 보내지 않고 회신도 하지 않았다. 두 강대국에 낀 약소국의 남루한 처지였다. 두달 만에 광해군은 “후금의 국서에 회답하려 하지만, 명나라 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기 때문에 국서를 보내기가 어렵다”고 핑계를 댄 뒤, “두 나라는 전부터 원수진 것이 없으니 서로 화친하는 것이 좋겠다. 근래 조선에 투항해온 여진족을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돌려보낸다”는 구두 전갈을 보냈다. 누르하치는 크게 기뻐하며 이민환을 포함해 10명을 돌려보냈다.

1619년 심하 전투 당시 명군과 조선군의 행군 경로(왼쪽)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숭명배금주의자들이 득세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것은 잘 아는 바와 같다. 책 뒷부분에는 이민환이 따로 지은 <건주문견록>을 실었는데, 누르하치와 그 가족, 부하들의 용모와 행태, 성격을 비롯해 후금의 자연과 문물 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관찰기다. 패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 조련과 변방 대책에 대해 쓴 <월강후추록> 등 부록도 귀한 자료다.

조헌의 <조천일기>는 1574년 베이징으로 가는 조공 사절단에 질정관으로 동행한 기록이다. 책 제목의 ‘조천’(朝天)은 ‘황제를 배알하다’는 뜻이다. 질정관은 불명확한 한자의 뜻과 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국 현지의 학문 경향과 정치 현실을 살피는 자리였다.

조헌의 눈에 비친 명나라 변방의 관리들은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파렴치한들이었다. 특히 요동의 도지휘사 진언(陳言) 등은 원하는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사사건건 꾸짖고 욕을 했다. 조헌은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적었다. 현지 백성들이라고 편안할 리가 없었다. 한 일꾼에게 “순천 부윤이 돈을 요구합니까?”라고 물으니 “지금 관원이 된 자 중에 돈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올 정도였다.

후금의 초기 도성인 허투알라 성. 서해문집 제공
조헌은 이렇게 혀를 찼다. “다행히 변경에 근심이 적은 것은 다만 오랑캐 가운데 웅대한 계략을 가진 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임금이 된 자가 어찌 저들에게 호걸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방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며 “우리 동방의 평안도와 함경도 등의 지역은 방비가 이(명나라)에 미치지 못하고 군민을 약탈하는 놈들은 도적 같은 오랑캐뿐이 아니다. (…) 묘당에서 정사하는 자가 깊게 생각해 미리 방어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적었다. 이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누르하치가 “웅대한 계략”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니 조헌의 예지력은 가히 미래를 꿰뚫는 것이었다.

 

조헌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청주성 등을 수복했으나 금산에서 전사했다. 조헌이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이 흘러, 그의 제자 안방준이 스승의 글을 엮어 ‘조선에 돌아와 주상께 올리는 글’이라는 뜻의 <동환봉사>라는 책을 펴냈다. 명나라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조헌과 이민환의 시대를 앞선 조언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임진왜란과 두차례의 호란으로 이어졌다. 무릇 충신의 고언을 귓등으로 흘리는 위정자는 스스로 불행을 면할 수 없고, 백성까지 도탄에 빠지게 하는 법이다.

* 한겨레신문-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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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이나 굶은 군졸들은 초조함이 극에 달했는데, 도망가려 해도 퇴로가 끊겼고 싸우려고 해도 사기가 무너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두 원수와 여러 장수들은 화약 상자를 가져다 앞에 두고 분사하려 했고, 나는 적을 죽이고 나서 죽고자 별장 신홍수 등과 함께 적을 사살하기로 약속하고 진의 동편에 섰다.”

17세기 조선 관료 이민환(1573~1649)이 1619년 3월 4일에 쓴 일기 중 일부다. 이민환은 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을 때 도원수 강홍립의 종사관에 임명돼 심하로 출병했다. 그러나 1619년 3월 4일 조선군이 패하고 강화가 성립되자 강홍립 등과 함께 후금으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7월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책중일록>은 이때 그가 겪은 일들은 적은 일기다. 이번 책에는 <책중일록> 이외에 그가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 지은 <건주문견록>과 <월강추후록>도 함께 번역돼 실렸다.

< 책중일록>은 이민환이 출병을 준비하던 1619년 2월 16일부터 시작한다. 1618년(광해 10)년 4월과 7월,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명나라의 최전방 요충지 두 곳을 잇달아 함락시켰다. 명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조선은 도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병력 1만3000명을 파병했다. 조선군은 평안도 창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군과 합류한 뒤 후금의 수도를 향해 진격했으나 그해 3월 4일 심하의 부차 들판에서 후금군의 습격을 받아 7000명이 죽고 4000여명이 포로가 됐다. 심하전투(사르후 전투)는 뒷날 청 태종 홍타이지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됐다.

이민환은 포로가 된 지 1년 4개월이 지난 1620년 7월 17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날 일기에서 그는 “당초에 포로로 잡힌 군졸이 거의 4000여명이었는데, 두 차례에 걸쳐 살육된 사람이 500~600명이나 되었다”며 “도망쳐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지나온 산과 계곡에 굶어 죽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이민환은 일기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드러내기보다는 중요한 일들만을 건조한 문체로 기록했다. 그의 견해는 포로생활 중 자신이 관찰한 후금의 전력에 대한 보고서인 <건주문견론>에 드러난다. <건주문견록>에서 그는 후금 방어 대책으로 산성수축, 군마육성, 군사의 정예화, 변방 군사 육성, 무기의 정예화, 무예 장려 등을 꼽고 “착실히 준비하여 거행할 수 있다면 족히 적을 막을 수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역사가 입증하듯 조선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채 참혹한 전란을 맞는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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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저자 이민환 선생 약력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시호는 충간공(忠簡公). 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이광준(李光俊), 어머니는 인의(引義) 신권(申權)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 할아버지는 참봉(參奉) 이여해(李汝諧),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세헌(李世憲), 처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와 군수(郡守) 홍귀상(洪龜祥)의 딸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알려져 있다. 형이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한 이민성(李民宬)으로 함께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이민환(李民寏)[1573~1649]은 1573년(선조 6) 출생하였다. 8세에 독서를 시작하였는데, 10세에 아버지 이광준이 『춘추(春秋)』 읽기를 시험하니, 크게 통하였다고 한다. 형 이민성과 더불어 젊은 시절 김성일(金誠一)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장성한 이후로는 장현광의 문하에 있으면서 퇴계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민환은 형 이민성과 더불어 부친의 강릉 부사(江陵 府使) 임지에 있었다. 일본군이 강릉 지역을 침범하자 형과 더불어 군대를 결성하여 이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전란 도중 이민환은 부친의 임지를 시종하며 여러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승정원(承政院)과 예문관(藝文館)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601년(선조 34) 예문관의 대교(待敎)와 봉교(奉敎)에 제수되었다.
 
1602년(선조 35) 아버지 이광준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로 부임하자, 형 이민성과 함께 휴가를 얻은 뒤 임지로 가서 배행하였다. 이듬해 아버지 이광준, 형 이민성, 간성 군수(杆城 郡守) 최립, 흡곡 현령(歙谷 縣令) 한호(韓濩) 등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그때의 기록이 『유금강산권(遊金剛山卷)』으로 남아 있다.
 
1603년(선조 36) 명나라에서 파견된 장수를 선조가 접대하였는데, 이때 이민환은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입시하였다. 선조가 명나라 장수의 고향을 물으니, 금화부(金華府)라 하였다. 선조가 금화부는 백운거사(白雲居士)가 사는 곳으로 그 상세한 거주지를 주위에 물으니, 사관 중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으나 이민환이 답을 말해 줌으로써 모두 그 박식함에 감복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 司書),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병조 좌랑(兵曹 佐郞)에 제수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평안도 암행어사(平安道 暗行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때 왕자궁(王子宮)의 노(奴)들이 권세를 믿고, 평안도 일대에서 온갖 작폐를 저지르고 있었는데, 이민환이 이들을 잡아 장폐(杖斃)시키니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1608년(선조 41)에는 영천 군수(永川 郡守)로 부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충원 현감(忠原 縣監)[충청도 충주목이 강등되었을 때 두어졌던 관직]으로 부임하였는데, 수령으로의 행실과 다스림에 문제가 있다고 사간원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강경 북인(北人)들은 사간원을 이용해 이민환을 배척한 것이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후금(後金) 공략을 위해 원병을 요청해 왔다. 이에 1619년(광해군 11) 2월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원병을 파견했는데, 이민환이 종사관(從事官)으로 따라 갔다. 3월 마가채(馬家寨)에 도착하였으나, 군량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3월 4일 명나라 군사들을 따라 부차(富車)에 도착했으나, 명나라 군사들은 모두 패퇴하고 말았으며, 조선군도 곧 후금 군사들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강홍립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광해군의 뜻에 따라 후금에 투항하였으나, 이민환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투항이 결정되자 이민환은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후금의 포로가 되어 건주(建州)에서 17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에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박엽(朴燁)이 의주로 돌아온 이민환을 4년 동안 붙잡아 두었다. 박엽은 원병 파견 당시 군량미 보급에 대해 이민환의 질책을 받아 사감이 있었으며, 마침 북인 세력들의 강경한 입장에 따라 광해군이 물러 갈 때까지 관서(關西) 지방에 억류되었던 것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민환은 한성으로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33년(인조 11) 대동도 찰방(大同道 察訪), 1635년(인조 13)에는 홍원 현감(洪原 縣監)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군비 강화를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고, 이번에도 이민환은 영남호소사 장현광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38년(인조 16)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군자감 정(軍資監 正)을 거쳐 동래 부사(東萊 府使)가 되었다. 동래 부사 재임 시절 사대부 자제를 모아 『소학(小學)』을 강론하기도 했다. 이 중 특출한 이는 추천하는 등 교육과 교화에 힘썼다.
 
1641년(인조 19) 장예원 판결사(掌隷院 判決事)에 임명되었다. 당시 공신 세력들이 수외(數外)의 노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장예원의 누적된 장부를 정리하여 공신들이 부당하게 늘린 노비를 본역(本役)으로 돌리기를 인조에게 청하였다. 하지만 공신세력 등의 반발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643년(인조 21)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조 참의(戶曹 參議)에 제수되었다. 1644년(인조 22) 호조 참판(戶曹 參判)에 제수되어 다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1645년(인조 23)에는 경주 부윤(慶州 府尹)으로 부임하였다. 노쇠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향촌의 교화를 위해 매월 알성례(謁聖禮)에 몸소 참여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복했다고 한다. 1646년(인조 24)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이민환의 문집으로 8권 3책의 『자암집(紫巖集)』이 전한다. 『자암집』은 이민환의 후손 이수태(李秀泰)와 이덕룡(李德龍)의 주도로 1741년(영조 17)에 간행되었다. 『자암집』에서 주목할 것은 후금의 포로로 있을 때 작성한 글들이다. 권5 잡저(雜著)에 수록된 「책중일록(柵中日錄)」은 1619년 강홍립의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심하(深河)에서 패전한 후, 목책 속에 17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적의 실정과 견문을 지은 것이다. 한편, 권6의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은 당시 후금의 상황을 기록하고 끝에 방비책을 기록한 것이다. 그 외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후금 관련 기록들은 17세기 초반,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후금과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60년(철종 11) 영남 유생들이 증직과 시호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 吏曹 判書 兼 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이어 1871년(고종 8)에는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