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포비아
정연수
서독광부를 꿈꾸던 삼촌들 기억나세요?
불쌍해라, 엄마는 하숙비도 없이 재웠잖아요
저는 밥이 아깝다고 눈을 흘겼고
삼촌들은 돈 많이 벌어 갚겠다며 목말을 태워줬지요
1963년, 광부 오백 명 모집에 사만육천 명이 몰린
92 대 1 경쟁률
브로커들이 무슨 벼슬처럼 유세를 떨고
삼촌 하나는 돈만 떼이고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몇 며칠 술만 마시다
산판꾼을 따라나섰지요
장성 탄광촌이 지긋지긋하다며 누님은 서울로 갔지만,
동두천도 서울인가, 어른들은 미국 뒷골목이라고 쉬쉬 하대요
십여 년 사이에 팔천 명이 서독 광부 된 걸
남들은 모른다지만 저와 누님까지 어찌 잊겠습니까
누님도 이젠 많이 늙었겠습니다
달러 넘치는 서울, 흑인이 출입할 수 없는 식당도 생겨났다지요
튀기는 표준어인데
누님은 튀기 소리만 들어도 애간장이 튀겨진다 했지요
군대도 갈 수 없던 마이클, 그 녀석도 많이 컸겠습니다.
-『다층』, 2012년 여름.
강원도의 산
문 닫은 갱구로 불어오는 바람은 마른 수숫대 넘어지듯 산을 훌쩍 빠져나가 산비탈 밭에 풀썩 주저앉아 강냉이술에 취하고
불현듯 그가 보고 싶어 연애편지 쓰듯 태백선 열차는 영월 함백 사북 태백을 지나 도계로 치달아 달려도 따라잡지 못할 우리의 희망 심포리서 흥전서 팔리지 않는 석탄처럼 뒷걸음질만 해 늦가을 시린 꿈 불어오는 태백산 골짜기 동해바다에 장난감 같은 배를 띄우고 비린내 살 속을 슬금슬금 파고들다 기차가 터널을 나오면서 도시 사내 옆자리 앉은 광부 아내를 얕보고 치근거리고 있어 기차가 서고 나면 겁탈할지도 몰라 나는 눈길 마주치고 싶지 않아 창밖을 보는데 불륜처럼 빨강빨강 익어 가는 감이 주렁주렁
실직 광부들 부드러운 풀꽃 향기 가슴을 쓰다듬던 자리 피가 흥건해 미안해 미안해 그러다 마구 짓뭉개고 아아 가엾은 풀꽃 탄광 문 닫고 사택에서 쫓겨나 마른 풀꽃 한 아름 꺾어 들고 일어서면서 막장의 비장한 눈빛이 빛나고 있어 꿈을 갖고 싶어 아무도 꺾지 않는 꿈을, 그래도 강원도의 산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해.
-『다층』, 2012년 여름.
재생산
노자
날 때부터 늙은이도 있더니
날 때부터 노동자도 있더라
탄광촌 마다 공고가 세워졌고,
우리들은 밤을 새워 공부하여 공고로 갔다
국영수 대신 실습을 하며
‘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 주문처럼 읊었다
공고를 나와 탄광에 가는 것이 자랑스러운 아이들
시클리드 입 가득 새끼 광부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이십대 삼십대 그 강은
서러운 강인지도 모르고 건넜다
땅 깊은 곳에서 석탄불을 쬐며, 캐며
학문하듯 노동을 배웠다 노자, 동자
참 거룩한 이름들
공고 출신에게 인권(人權)은 너무 어려운 단어였다
야, 이 새끼야 생산량 못 맞춰!
탄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인권을 읽을 줄 몰랐다
생산량을 맞춘 날도
자식 성적은 오르지 않고
폐광, 사십대의 캄캄한 강을 건넌다
막장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캄캄하구나
앞으로 삼십년은 더 살 것을 생각하다
아들놈 등짝에 대고 대낮부터 고함을 지른다
야, 이 새끼야 고등학교까지 시켜줬으면
그놈의 컴퓨터 끄고 막일이라도 찾아봐야 할 것 아냐!
-『다층』, 2012년 여름.
개기일식
달이 해를 삼켰다.
해를 삼킨
독한 달
시발(始發), 도시 개발
달을 쳐다보며 풀벌레들이 울부짖었다
철거민들의 밥그릇이 개집에서 나뒹구는 사이
법과 집행, 그 행간으로 빛이 스러지고
어떤 비명들이
진압봉의 그림자 뒤편으로 무릎을 꿇는다
달이 대낮을 점령한 것은 잠깐이지만
새로 집을 짓기에는 너무 어둡다
그날 밤
독을 품고 있는지
달빛마저 침침하다.
-『다층』, 2012년 여름.
오십을 향하여
오십견, 팔이 공손해졌다
하늘을 향해 마구 삿대질하던 손
가슴 아래 모은 합장이 더 편하다
내 몸을 남이 관리할 때부터 알아봤다
입만 살아 세상을 다 후리다가도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2년에 한 차례씩 종합 정기검진
안과에선 노안이라지만
하늘을 봐도 바다를 봐도 그저 푸른 걸
꿈은 여전히 먼 곳까지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걸
아직, 예쁜 것들을 보면 가슴이 뛰는데
옷 집 아줌마조차
원색은 너무 밝다고 나를 꺼리니
앞차가 미적거릴 때마다 꽥꽥 소리 지르던
자동차마저 얌전하게 굴러가고
똥배가 커지면서 등이 자꾸 둥글게 휜다
지구는 둥그니까 등도 둥글게
늙어가는 몸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다워라
비문증, 몸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리는 저 꽃잎들.
-『다층』, 2012년 여름.
아름다운 수당
날 버린 여자의 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
아들을 광부로 만들지 않는 게 꿈이라던
돈을 벌면 고향땅 풍기에다 밭을 사겠다던
땅 많은 남자를 사위로 맞고
그는 모처럼 갱구 같은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
그녀가 시집가던 날에도
나는 휴일 수당을 위해
지하 750미터 갱도에서 펌프를 돌렸다
눈물이야 있었겠지만
힘 좋은 펌프가
웬만한 지하수 정도는 바닥이 드러나도록 퍼냈다
캄캄한 막장 속의 등불이 나를 용서했다.
-『다층』, 2012년 가을.
새길
끝도 시작도 없는 캄캄한 사막
막장은 낙타가시풀을 씹는 낙타의 입이다
고독한 사막을 건너는 갈증의 걸음 사이로
불의 가시를 씹고 또 씹는다
철철 흐르는 제 피를 삼키며
불끈, 사막의 해는 솟는다
막장은 다시 뜨거워지고
길은 결코 나타날 줄 모른다
가끔 앞을 막아서는 벽을
막장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새길을 본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은 안다
사막은 걸어가는 만큼 길이 되고
막장은 삽질만큼 길이 되는 걸.
-『다층』, 2012년 가을.
연탄재 일기
갱구를 나오면 눈부신 햇살
걸음은 구운 삼겹살 속에서 비틀거리고
구울수록 싸늘해지는 세상
우리는 얼마나 뜨겁게 살았던 걸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은 차가워졌던 거지
폐광 보상금 받고 부천으로 간 선산부 장 씨
자리 잡고 부른다던 세월이 벌써 오 년
그도 모르게 얼어붙은 게지
삼겹살을 다 굽고 난 우리는
연탄재처럼 꺼진 것일까?
-『다층』, 2012년 가을.
고드름
어느 별에서 길을 나선
눈물이던가
아득한 허공을 지나
추락을 거듭하던 날개
허물어져가는 처마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다니던 탄광이 문을 닫고부터
집안은 빙판길이었다
동생들은 집을 나갔고
나는 애초부터 집에 없었다
가족사진첩을 보는 순간
슬픔이 멈췄다
더는 무너질 것도 없는
주춧돌
어머니의 눈물이
콧잔등 위에서
멈추었다.
-『다층』, 2012년 가을.
동해안
작달비의 자맥질
무슨 종교 의식처럼 바다에다 몸을 던지고
파도는 이미 습관 굳어진 푸른 살 속으로
방어에 지친 상처투성이의 알몸을 까 넣는다
왕족을 파견하던 길은
신화처럼 동해바다에 기대어 푸른 녹이 슨다
녹슨 철조망과 마주선 어부들
바다는 뼛속까지 시원하다
열려라, 바다여
은빛 비늘을 떨어뜨려라
-『다층』, 2012년 가을.
정연수 약력
1963년생. 『다층』2012년 가을호로 추천. 저서 『탄광촌 풍속 이야기』, 편저 『한국 탄광시전집』(1~2권) , 현재 강릉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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