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戰後 출생 작가

[오디오 단편 소설] 박민규 -『근처』

Bawoo 2016. 6. 6. 22:19



박민규 의『근처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

중키의 나무들이야 일후에 심은 것들이고, 지금 눈앞의 버드나무가 그때는 유일했었다. 그래 이 나무다. 아마도, 라는 기분이 들 만큼 키가 작아진 느낌이지만 또 그것은 열두 살 소년의 아련한 기억일 테지. 우거진 녹음 속에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습필濕筆인 양, 늘어진 두엇 가지들이 뚝 뚝 젖은 그늘을 땅 위에 떨궈댄다. 번진다, 번진다.

번짐이 멈춰 선 저 근처다. 미소微小한 썰물처럼 출렁이는 그늘을 바라보며 나는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정도가 맞을 것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마련해 온 꽃삽을 장갑과 함께 꺼내든다. 무성한, 늘어진 가지에 가려 학교가 보이지 않는다. 겨우 세 걸음 자리를 옮겼을 뿐인데 강당도, 운동장 너머의 교문도 어느새 사라졌다. 지나온 세 걸음이 그래서 문득 30년처럼 느껴진다. 삼보三步든 삼보三報이든, 하긴 그것은 마흔둘 중년의 비루한 걸음이니까. 스산한 바람처럼 30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갈필渴筆인 양, 몸을 뒤집는 잎사귀들이 핏핏 바삭한 봄볕을 눈 위에 흩뿌린다. 반작, 반작이고 반작임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눈을 감는다. 곧 눈물이 차오르고, 그 물 속을 숱한 물벼룩들이 어지러이 떠다닌다. 볕과 그늘의 경계에 서 있음을 양 어깨의 체감으로 나는 느낀다, 느껴진다. 아마도 이, 근처임이 분명하다. 쪼그린 채 둘러앉은 아이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날 이 자리에 모두가 앉아 있었다. 아니, 이 자리가 아니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까마득한 옛날이다. 상관은 없다. 또 이미, 하면서도 나는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일전에 내린 비로 흙은 무르고, 나는 말없이 쉬운 삽질을 계속한다. 서넛, 가지들이 출렁이는 그림자가 볕과 그늘의 경계에 리아스식 해안을 만들고 또 만든다. 잠시 현기증이 인다. 일렁이는 볕과 그늘의 미소한 해안에 앉아 지금 흙을 파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나는 30년 전 의 소년이고, 나는 30년 후의 중년이다. 나는 그리고 툭 10분이 지났을까, 삽 끝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그늘의 출렁임이 일순 해일처럼 거대해진다. 있다, 있었다 하며 30년 전의 소년과 30년 후의 중년이 다함께 소리친다. 소년의 손길과 중년의 호흡이 다 같은 맥으로 그래서 빨라진다. 잠기고 깎여 나간 세월의 해안선이 툭, 한순간에 완만해진다. 나는 처음으로 그 해변에 다다른 소년이고, 유서를 품은 채 해안의 절벽에 몰래 선 중년이다. 나는 그리고... 땀이 흐른다. 물과 불, 공기와 흙...느끼는 모든 것들이 염분으로 충만해진다.

상자는 붉게 녹슬어 있었다. 혹 몰라 챙겨 온 페인트붓으로 나는 표면의 녹을 쓸고 또 쓸어낸다. 날리는 갈색의 미분이 시간의 시체를 갉아 먹은 미생물 같다. 지금의 나 역시 붉게 녹슨 30년 전의 소년이겠지. 그을린 상자를 바라보며 그만 소년도 중년도 숙연해져 버린다. 열어...볼까? 열어보고 싶지만 마른 침을 삼키듯 나는 상자를 챙겨 든다. 가방을 풀어 헤쳐 조심조심 상자를 내려놓는다. 수건을 깔고 그 위에, 다시 고이 몇 겹의 수건을 두른다. 꽃봉오리처럼 부푼 가방의 심연에서 언뜻 시간의 수술과 암술이 하늘, 돋아난 느낌이다. 무득 화사하다. 한 송이 비닐꽃을 흔드는 미풍과 5월의 볕...종아리 가득 화분을 묻힌 일벌처럼 나는 서둘러 그늘을 벗어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운동장이, 이제는 폐교가 된 낡ㅇ느 교정이,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녹슨 교문이 다시금 시야에 들어온다. 그 옛날 소년이 그랬듯, 운동장 어귀를 마구 뛰어다니고픈 봄날이다. 갑자기 통증이 밀려왔다. 가로질러야 할 운동장이, 교문이, 집으로 이어진 길고 긴 오솔길이 한순간 멀고 아득해진다.

딸각 눈을 뜬 것은 7시였고, 상자를 연 것은 자정이 넘어서다. 진통제를 먹고 오후내 잠을 잤고 눈을 떠서는...밥을 먹었다. 식당이 있는 모서리까지 차로 10분, 밥을 다 먹고는 식당 주인이자 친구인 호기와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특별한 얘길 나눈 것은 아니었다. 뉴스를보며 이런저런... 친구들 근황을 들으며 그런저런, 다들 한번 보자고 하더라. 그럼, 봐야지. 계산은 무슨 계산이냐는 호기의 주머니에 억지로 돈 만 원을 찔러넣고 나선 것이 10시였다. 달이 너무 크고 밝아 모북리 초입에서 차를 한 번 세워야 했다. 안구란 걸 지닌 모든 짐승을 얼어붙게 만드는 달이었다. 절로, 나도 모르게 차에서 내려섰고...아마도 인생의 마지막 장관이겠지. 오오래 그 달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그리고 이 삶은 얼마나 남은 걸까? 비좁은 두 눈에, 계산은 무슨 계산이냐며 만월이 억지로 달빛을 찔러넣었다. 아무도 없는 숲길이었다. 차오른, 차가운 몇 방울의 안약 같은 게 나도 모르게 뺨 위를 흘러내렸다. 아무도 없는 숲길이니까. 그래서 한동안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를 마시고, 서울서 걸려 온 두 통의 전화를 받고... 문득 상자를 떠올린 것은 자정을 조금 넘겨서였다. 불 꺼진 마루, 시든 꽃처럼 숨이 죽어 있는 가방을 챙겨 나는 다락으로 올라왔다. 30년 전의 내 방, 그때 그대로인 낡은 책상 위에...나는 조심조심 상자를 올려놓는다. 바삭하고 파삭한, 녹슨 양철의 모서리들이 오래 오십견을 앓는 노인의 축쳐진 어깨같다. 녹슨 어깻죽지에 부축이라도 하듯 힘을 가하자

딸각, 힘없이 그런 소리가 울려퍼졌다. 금속과 목재의 중간쯤 되는, 그런 성질의 소리였다. 더없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스탠드의 각도를 조절하고, 나는 서서히 뚜껑을 열어젖힌다. 묻었던 소년과 이를 파낸 중년의 중간쯤 되는 목소리가 아, 하고 새 나왔다. 떼가 벗겨진 고분처럼 크고 작은 봉투들이 고스란히 그 속에 놓여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내 이름을 찾기 시작한다. 정. 호. 연...색 바랜 봉투의 겉봉 하나에 관연 눌러 쓴 소년의 필체가 남아 있다. 단단히 풀칠했을 봉투의 입구를 나는 조심, 가위로 절개한다. 잘렸, 다기보다는 바스라진 봉투에서 나온 것은 접이식 군용 나침반이었다. 그랬다...소년이 넣어 둔 것은 나침반이었다. 장례식의 기억도 떠올랐다. 호연아...하며 말을 잇지 못하던 외숙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얼굴은 잊었지만 그 목소리와, 커다란 두 손을 기억한다. 한 손은 거칠게 내 머릴 쓰다듬었고 또 다른 한 손엔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왜 이런 걸 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일곱 살 아이에게 다만 장난감으로 건넸을 수도, 혹 어머닐 여읜 조카에게 삶의 지표라도 일러주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월남을 다녀왔다는 외숙을 만난 것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곽...호기. 호기의 봉투를 뜯어본다. 맙소사 이게 뭔가. 커다란 매미의 허물이 들어있다. 녀석 하고는 실소가 나왔지만 또 열 두 살 호기에겐 더 없이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이다. 잠깐 부엌으로 내려가 나는 포트와 찻잔을 챙겨온다. 물이 끓을 때까지, 또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갈라진 허물의 등짝을 바라본다. 죽음도...저런 걸까? 행여 삶이란 허물을 벗고, 또 다른 삶을 갈아가는 게 아닐까. 저틈을 빠져나온...그리고 다시, 오래 전에 죽었을 매미의 삶을 나는 떠올려 본다. 수면이란 허물을 벗어던지고 잘 우러난 얼그레이의 향이 코끝까지 번져온다. 남은 삶이 문득 홍차가 되기 직전의 뜨거운 물처럼 느껴진다. 번진다, 번진다 번짐이 멈춰 선 그 순간에 삶도 끝날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 성질이 바뀔 것이다. 30년 전의 숲을 막연히 떠올리며 나는 맴맴, 스푼을 휘젖는다. 어디선가 그 여름의 매미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전원이 꺼진 포트에서 아직도 잔잔히 물끓는 소리 들린다. 삶은 죽음을 우려내기 위해 끓이는 물과 같은 걸까? 한순간 나는 벗어날 것이고, 한순간 나는...한 잔의 차를 비울 때까지 생각은 끝없이 맴을 돈다. 바삭한 허물처럼 가벼워진 찻잔을 나는 내려놓는다. 찻잔의 손잡이가...아직은 따스하다. 잠잠해진 포트의 물도 아직은 따스할 것이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나도 따스한 것이다.

순임이구나, 천으로 재단된 색다른 봉지에는 또박또박 6학년 1반 8번, 까지가 붙은 이순임이 적혀 있었다. 다섯 중 유일한 여자애였다, 라고는 해도 여름이면 우 몰려가 다 함께 멱을 감던 사이였다. 순임이가 지금 애가 둘이야. 큰 애가 중학생이지 아마? 이혼을 하고 혼자 애 둘 키우며 산다는 얘기도 호기로부터 전해들었다. 순임의 봉지에서 쏟아진 것은 아마도 잘 말린 꽃으로 보이는 것들의 바스라진 잔해였다. 로진백을 쥐었을 때처럼 한 때, 그래도 꽃이었던 것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향이 매캐한 먼지와 함께 피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순임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바스라지게 허드러지고, 허드러지게 바스라지고...꽃도 소녀도, 결국 모든 것은 잔해가 된다.

도형이의 글씨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남들보다 두 배는 큰...해서 1학년이 쓴 것 같은 6학년의 글씨다. 약간, 아주 약간의 정신지체가 있는 친구지만 말이 어눌할 뿐 공부나 생각이 뒤친 친구는 결코 아니었다. 텃세를 부리던 모북의 친구들 중 내게 처음 말을 건넨 것도 도형이었다. 진짜는 다다, 다...좋은 놈들인데...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놈들이 얼마나 다다, 다 좋은 놈들인가를, 봉투 속에는 두꺼운 한 장의 엽서, 같은 것이 들어 있고 색 바랜 사진의 뒷면에는 몹시도 힘들여 썼을 작은 글씨가 듬성 몇 줄로 적혀 있었다. 뭐지? 비스듬히, 스탠드 불빛을 반사시켜 나는 문장을 확인한다.

20년 후에 나는 순임이아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아들은 대통령 딸은 미스코리아

풋, 하고 웃긴 했지만 짐작도 못한 일이었다. 그랬구나, 도형이가 순임이를...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모서 너머 신평인가, 신도시에 산다는 것만 알 뿐 호기도 자세한 근황을 일러주지 않았다. 남은 봉투는 역시나 신평에서 꽃집을 열었다는 한동구의 것이다. 동구가 꽃집을? 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제법 크게 열었다는 호기의 말에 오호, 고개를 끄덕였었다. 동구는 한마디로...모북의 싸움대장이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쎘다기보다는, 모북에서 제일 못사는 집의 아들이었다. 또래에 비해 눈치가 빠르고, 정이 많은 만큼 근성이 강한 친구였다. 아니나 다를까 동구의 봉투 속엔 동전이 들어 있었다. 그해에 발행된, 아마도 가장 빛나는 동전이었을 것이다. 어린 동구는 부자가 되고 싶었난 보다. 동구는 돈을...벌었을까? 그러고 보니 동구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30년 전의 탑 하나가 문득 동전의 뒷면에서 허물어져 있다.

밤공기가 차다. 대문을 나서 한 5분, 인도천이 보일 때까지 나는 걷는다. 소년 잡지란 걸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울에 사는 호기의 사촌이 보내온 책을 ... 글자 하나 빠짐없이 돌아가며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둘어앉아 만화를 베끼고, 특집에 실린 시간여행이니 그런 이야기들로 해가 저무는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특집의 귀퉁이에 <타임캡슐>이란 것이 소개되어 있었다. 20년 후에 다 함께 모여 이걸 열어보는 거야, 그때까진 철저히 비밀을 지킨다...는 것이 눈을 반작이던 다섯 친구의 철석같은 약속이었다. 호기네 창고에서 찾은 양철상자에, 하여 각자의 소중한 것을 담아 땅속에 묻기로 했다. 나침반과 <풀루타아크영웅전> 중 어떤 걸 넣을까, 며칠을 고민한 기억도 새삼스레 떠오른다. 몹시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동구가 땅을 파고 두근두근, 버드나무 근처 깊숙한 곳에 각자의 비밀을 담은 상자를 묻었다, 묻어 두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여, 타임캡슐을 열기로 한 10년 전의 날짜도 두모지 떠오르지 않는다. 여즉 상자가 묻혀 있디는 것은, 그리고 모두가 그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리라.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주머니 속의 나침반을 꺼내든다. 희미해진 눈금의 야광이 달빛을 받아 더 희미해 보인다. 흔들리고, 흔들리고...흔들리던 바늘이 이윽고 묵묵히 북쪽을 가리킨다. 모서도 정확한 서쪽이 아니었구나, 어슴프레한 불빛이 번져 있는 모서의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 저물도 죽음을 우려내기 위해 저리도 살아 흐르는 건가. 어떤 물음에도 답하지 않은 채 등 돌린 달이 물 위를 걷고 있다. 느리고 단호한 걸음이다. 느려도 단호하게 이 밤이 진다.

잘 살고 있어. 아침엔 민 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10시쯤 눈을 떴으니 민과장에겐 아침회의를 끝내고 난 오전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그렇게 밖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나도 얘기는 들었는데...하고 말을 흐렸으므로 그렇지 뭐, 내가 말끝을 이어야 했다. 또 무슨 얘길 나눴던가...잘 아는 목사님이 계시다는 얘길 들었다, 들었으므로 나는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고맙다,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또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통증도 없이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는 생각이다. 차를 끓이고, 몇 장의 시디를 뒤져 바흐를 듣고, 세수를 하고, 카메라의 베터리를 교체하고...했다. 분명, 잘,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생활이다. 돌이켜보면 외로운 삶이었다. 모북리에 들어온 것이 일곱 살 때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곳 숙부께 나를 맡기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사고로 숨졌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직도 알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남은 몇 장의 사진 때문이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 장의 결혼 사진도, 두어 장의 스냅 사진도 모두가 경직된 표정이었다.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그래서 도무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결국 삶이란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는 것인가, 두 분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오피스텔을 정리하며 뒤젂인 나의 사진도 대부분 그런 얼굴이었다. 생로병사를 겪으면서도 인간은 대부분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표정한 얼굴을 이 땅에 남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숙부는 인품이 너그러운 분이었다.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도 나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주었다. 2층을 올릴 정도로 넉넉한 살림이었지만, 살림이 넉넉하다 해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세명의 사촌형들이 모두 공부를 잘 했다. 워낙 터울이 커쓰으므로 어울려 큰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모북에서 대학을 가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차례차례, 게다가 막내 형이 명문대학에 합격했을 땐 정말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잔치를 열었었다. 모북의 또래들 중 대학을 간 것도 내가 유일했다. 그리고 점점 나는 이곳과 멀어졌다. 실상 인근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므로 친구들과는 일찌감치 멀어진 셈이었다.잘 컸다, 이제 알아서 살 길을 찾아라...취직을 하고 첫월급을 들고 이곳을 찾은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잘 못고른 치수가 커 헐렁한 내복을 입어보고는 숙부가 중얼거렸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비음섞인 목소리였다. 장대했던 숙부는 생각보다 왜소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야, 점심 먹으러 안 올 거냐? 호기의 목소리다. 그렇잖아도 움직이려던 참이야, 짧은 통화를 끝내고 나는 양말을 신는다. 약을 챙기고 또 문단속을 한다. 잠깐 국도를 빠져 기름도 넣어야지 생각을 한다. 시동을 건다. 스물일겁 되던 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중간에 한 번 이직을 하고 줄곧 지금까지 일해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건조하다 싶을 만큼 성실한 편이었다. 그리고 아직...결혼을 하지 않았다. 피한 것도, 여자를 싫어한 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변명이긴 해도 결혼을 할 시간이 없었다. 기획부서란 게 늘 그렇듯 끝없이 중요한 업무가 이어져 왔다. 접촉 사고로 라이트 한 쪽이 함몰된 적이 있었는데 겱구 수리를 미루다 새 차를 산 적도 있었다. 그런, 생활이었다. 오피스텔과 직장을 오가고, 밤을 새고,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작성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돌아와 빨래를 하고, 간단한 요리를 만들거나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고,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오디오를 바꾸고, 외국으로 현지답사를 떠나고, 돌아오고, 그때그때 트랜드에 맞는 옷을 구입하고,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연봉협상에 임하고, 미용실을 바꾸고, 회식을 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잠을 자고, 일어나 샤워를 했을 뿐인데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었다. 어쩌다 업소 같은 델 출입하며 섹스를 해결하고, 한해 한해 미뤘던 결혼을 심각하게 모김해야 할 마흔 살의 독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멍하니 사무실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뭐 먹을래? 오늘은 돈 내면 안 된다 하고 호기가 묻는다. 아무거나, 하고 나는 아무렇게난 대답해버린다. 모북에 비해 모서는 오히려 번창한 느낌이다. 신도시에 접한 시골이라 줄줄이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이어져 있다. 군데군데 골프웨어를 차려입은 중년의 커플들도 눈에 띈다. 호기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쌈밥과 두부가 적힌 입간판에 끌려 왔는데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나도 모서에 터잡은 지가 꽤 됐지. 지척인데도 이제 갈 일이 없어. 그리고 나는, 휴직을 하고 고향에 잠깐 머물 참이라는 급조된 변명을 늘어놓았다. 머리 식히러 왔구나. 호기가 말했다. 그런 셈이지. 내가 대답했다. 둘 다 듬성 새치가 보이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어딘가 벗어 둔 소년의 허물들도 이미 서늘한 잔해가 되었을 것이다.

토요일날 말이다. 괜찮으면 애들 한번 모였으면 하는데. 도형이도 그날 대전에서 돌아온다 하고, 나야 언제든 좋고...참, 도형인 뭐하냐?

말해주지 않았냐? 신평에서 컴퓨터대리점 한다고...규모는 작은데 그러저럭 벌이는 괜찮나봐, 그런데...도형이 말이다, 혹 어릴 때 순임이 좀 따라다니지 않았냐? 뭔 소리냐, 걔들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데. 어, 그래? 아마 돈을 좀 떼였을 거야...아니 나중에 갚았다던가? 아무튼 순임이 그것도 늘 코가 석자여서...작년 추석 때 동구가 그러다라고 순임이가 신문을 돌리더라고. 신문?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가는데 바로 아파트 현관엣 신문 카트를 밀고 있는 순임일 봤대지 뭐냐. 자존심 쎈 년인 거 다 아니까 동구가 얼른 자릴 피했다고 하더라고. 그랬구나. 그년도 남편 복이 지랄 같아서...남편이 왜? 내막을 어찌 알겠냐 암튼 위자료도 거의 못 받고 그랬나 봐. 남편 놈은 그 여자랑 또 갈라서고 새 여자랑 산대나 어쩐대나.

천변에는 잔뜩 나비떼가 날고 있었다. 호기의 식당을 나와 이리저리 나도 떠돌다 인도천에 이르렀다. 개금산을 돌아 모서에 이른 개천은 모북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폭이 넓고 물이 깊었다. 근처에서 두 명의 낚시꾼이 조곤조곤 들리지 않는 대화를 담배연기와 섞어 나누는 중이다. 바람이 좋다. 힐끗, 입질을 하듯 낚시꾼 하나가 나를 보기에 찌처럼 흔들, 고개를 숙여준다. 두툼해 보이는 손을 들어 남자가 답례를 표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삶 속으로 돌아간다. 남자는 낚시를, 그리고 나는 말없이 천변을 걸을 뿐이다. 그런 서로의 근처를 나비떼가 섞인 바람이 머물러, 머무르고, 머물다 흘러간다. 아름답다. 간암 말기란 얘기를 들은 것은 3월이었다. 우선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의사가 물었고 뜨거운 물 속에 티백을 담그듯 너무 늦었습니다, 라고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삶이 더는 한 잔의 물이라 말할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변해버렸다. 담담하지만 단호한 변화였다. 몇 차례 더 검사를 받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의사는 제시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죽음에 끝까지 저항애 보는 것.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그냥 이 상태론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겁니다. 수술시기는 이미 놓쳤구요. 항암치료로 얼마 더 연장할 수 있을지도...어떤 면에서 더 큰 도통만 겪을 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도는 없습니까? 기적... 말고는 바랄 게 없지요. 와아, 하고 낚시꾼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멀리서도 떡붕아냐? 아니 참붕어야, 소리가 들려온다. 두툼한 손의 그 남자가 환한,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받아들인 걸까, 혹은 끝까지 죽음에 저항하는 걸까? 멀리서도 파닥이는 붕어의 몸부림이 선연하다. 몇 차례의 상의 끝에 결국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담담할 수 없는데도, 담담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한참을 파닥이더 붕어가 누워, 아가미만을 들썩인다. 점차 그것은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해진다. 그런 서로의 근처에서 바람은 잠잠해진다.

낚시를 해 본 적은 없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맥주 한 컵이면 족한 주량이었다. 거르지 않고 회사에서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다. 특별한 문제는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발견되지 않거나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지금 저리 발 아래 풀은 밟혀 있고 누워 붕어는 죽어간다. 늘 누군가 그렇게 죽어간다. 알아서 죽고 모르고 죽고 믿고 살고 자고 그것도 모르면서 벌고 자시고 끊고 잡고 들쑤시고 두드리고 떠들고 달리다...죽는다, 내가 죽는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멍하니 내 눈을, 혹은 통과해야 흰 벽을 응시하듯 부장은 나를 쳐다보았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톡 톡 톡 톡 부장의 검지가 데스크의 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 참, 하고 이마를 짚으며 부장이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몸을 파닥이던 붕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 몸부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고통과 진통, 투약과 불면...스스로의 혈관을 찾아 링거를 꽂는 일상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살아 있는 내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모습이겠지만 더없이 풍만한 감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연두와 초록, 노랑의 저 색채를 음미하고 기억하려 한다.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검정이 되듯 소소한 삶의 순간들도 결국 죽음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물이 흐른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이 넓고 깊은 삶이 흐르고 있다. 나는 기쁘고, 기쁘지도 않다. 나는 슬픈데 슬픈 것만도 아니다. 나는 화가 나지만 어째서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부분도 있다. 나는 즐겁고, 실은 즐거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모르겠다. 느끼는 모든 감정을 추스르고 섞으면 결국 체념이 된다. 그것은 캄캄하고, 끝없이 깊고 풍부하다. 인간이 이를 곳은 결국 체념이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나절이었다. 잠을 자고, 잠깐 일어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피곤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다. 어둠 속에서 문득 집의 냄새가 느껴진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오래전의 냄새였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맡았던 나무의 향이다. 아니, 장판지의 냄새다. 혹은 장롱에 치해진 도료거나, 마루를 닦던 숙모의 걸레...에서 풍기던 비릿한 물냄새다. 근처의 사람들, 즉 친척의 체취다...아니, 그 모두가 뒤섞인 체념의 냄새다. 체념한, 집의 냄새다. 일어나 앉아, 나는 기다린다. 넌 저 방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속모의 손에는 아직 젖은 물기가 그대로였다. 모북의 집으로 들어온 것은 열흘 전이다. 오피스텔을 급매로 처분하고 정리가 끝나는 대로 이곳을 향했다. 의사도 그렇고...다들 시골 생활과 유기농 채식을 권하더군요. 막내 형의 집을 찾은 것은 소옴소옴 밥 짓는 향이 풍겨오던 저녁나절이었다. 멍하니 거실의 티브이를 응시하던 형이 푹 고개를 떨구었다. 호연아...하고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형은 길고 긴 한숨을 쉴 뿐이었다. 거칠고 주름진 형의 눈가에 송진처럼 진득한 물기가 어려, 맺혀 있었다. 이 불쌍한 놈아...하고 형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2년 전 숙부가 돌아가시고 모북집을 관리해온 것은 막내 형이었다. 서먹한 저녁식사였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는 조카들의 안부를 물었고, 이런저런 대답을 한 것은 형수였고, 형은 묵묵히 갈치 토막을 바라보며 밥을 곱씹을 따름이었다. 갈치가 맛있네요. 내가 말했다. 마지못해 형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골생활과 채식에 실낱같은 기대를 건 것도 아니었다. 기적을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고, 이제 와 신앙을 가질 만큼 여민한 성격도 못 되었다. 그저 돌아갈 곳이 모북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혼자이고 싶었다. 여섯 개 정도...개인 파일이 담긴 폴더를 휴지통에 삭제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삶의 대부분이라 믿었던 직장생활이 그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저기...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말일세...하고 부장은 부탁했었다. 일주일 정도라도...어떻게 인수인계를 ... 살아온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그래서 들었다. 천수를 누린다 해도 어쩌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딸칵 이곳의 문을 여는 순간 그때도 아버지의 말이 새삼스레 떠올랐었다. 넌 저 방에서 기다리고 있거라...어쩌면 그 말은 아버지의 마지막 인수인계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결국 각자의 죽음을 기다리기 위해 견디고 견뎌 온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그 방에 짐을 풀고서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그때의 젖은 물기가 아직 손에 그대로 남은 느낌이다. 처연한 달이 스스로를 깎고 있는 깊은 밤이다.

천로역정의 1부를 다 읽어 갈 무렵 호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토요일이었다. 묻어 둔 상자가 떠올랐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 하고 두근했다.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혹 모르지 예전의 명함을 주섬주섬 챙기다...내던지고 차에 올랐다. 대신 뒷자리에 상자를 실었다. 모두를 놀라게 해 줄 심산이었는데 막상 식당에 도착하자 호기의 말이 생각났다. 걔들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데. 결국 빈손으로 내려섰다. 도형이도 순임이도 어떤 인간이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중년의 손님 서넛이 귀퉁이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어, 하고 그 속에서 호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모북의 친구들이었다. 아아, 하고 나는 잠시 멈칫했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순임이는 아닌데...순임이 같은 중년의 여자가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마련된 자리에 착석을 하며 나도 모르게 실례합니다...라는 말이 새 나왔다. 실례해라! 하고 고함을 친 것은 동구였다, 자세히 보니 동구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든지 나도 실례를 하고픈 밤이다. 친구들은 변하지 않았고, 변해 있었다. 글쎄 호연이 이놈이 아직 미혼이란다, 나 참. 호기의 발언을 필두로 너나 할 것 없이 이 얘기들을 쏟아 놓았다. 동구가 어떻게 좀 해 봐라. 알고 보니 동구는 안마시술소를 차리고 있었다. 혼자 하는 건 아니고 동업이다. 애들도 크는데...좀 그렇잖아, 그래서 누가 물으면 아 꽃집합니다 라고 말하지. 오늘 2차는 한동구씨가 운영하는 꽃집에서! 그러니까 꽃집에서 성~대하게...호기가 딴죽을 부리자 다들 웃음을 터트린다. 그럼 순임이 안마는 누가 해주뇨? 동구의 딴청에 또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도형이는 여전히 말을 더듬었고 그, 그, 그래서...나는 니가 우, 우릴 다 이, 이,잊은 줄 알았다라고 했다. 야 임마, 돌아볼 정신없기는 전부 매한가지야. 우리도 고향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냐? 동구의 말을 들을 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모서야 말할 것도 없고 신평도 고작 서울과 수원 정도 거리에 불과하니까. 실은 근처에서, 그들은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왁자지껄한 그들의 삶이

일순 부러워진다. 동구와 호기는 노래를 부르고, 맥주 한 잔을 놓고서 나는 제사를 지내고, 미미, 미치겠네. 자꾸만 걸려 오는 전화에 도형은 정신을 못차리고, 순임은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야, 물이 좋아 그런지 이 피부봐라 피부! 호연이 이새끼 서울 사람 다 됐네. 그럼 서울사람이지, 주소도 서울인데. 동구와 호기가 너스레를 떨었다. 난데없이...하면서도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릴 다 이,이,잊은 줄 알았다. 그런, 도형의 말과도 일햄상통한 표현일 것이다. 부잣집에서 자라고...도시로, 대학으로, 서울로 떠난 내 삶을 아이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나도 전에...몇 년 전에 에버랜드 한번 갔었잖냐, 애들 데리고. 동구가 말했다. 에버랜드는 서울이 아니라 용인이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제대하고 2년 정도, 호기는 광명에서 샷시일을 한적이 있다 했다. 그때 연락처라도 알았음 서울에서 술 한 장했지, 이 나쁜놈아, 광명은 ...용인보다는 가깝지만 역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문득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대학엘 붙고 갓 상경해 막내 형의 집에 머물 때였다. 하루는 큰 형이 점심을 사겠다고 직장이 있는 광화문 쪽으로 나를 불렀다. 그래, 전철타고 을지로 입구에서 내려. 거기서 전화하고, 알았지? 생명줄처럼 지하노선도를 움켜쥐고 을지로입구역을 찾아가던 그 길이 떠오른다. 점심을 먹고 곧장 돌아왔어야 하는데, 막상 큰형과 헤어지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명동, 명동이란 곳을 꼭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쉘부르란 곳이 있고 젊음과 낭만이 가득하다는 명동...노선도를 보며 나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골똘히 가늠하기 시작했다. 을지로입구역에서 2호선을 타고 시청으로, 시청에서 1호선을 갈아타고 서울역으로,서울역에서 4호선을 갈아타고 명동역으로...아니면 반대 방향의 을지로3가로. 거기서 3호선을 갈아타고 충무로역으로, 충무로에서 4호선을 갈아타고 명동역으로...나는 결국 보다 공신력 있게 느껴지는 시청과 서울역방향을 선택했었다. 그리고 과연 명동을 거닐 수 있었다. 촉촉한 봄비가 우산을 타고 흐르던 기분 좋은 봄날이었다. 그리고 문득, 눈 앞에 서 있는 을지로입구역 푯말을 볼 수 있었다.

그 봄으로부터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도 문득 에버랜드...같은 곳을 떠돌다 온 기분이다. 20년이다. 20년씩이나...그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그곳은 또, 어디 근처였을까? 나도 지금 애들 교육은 서울에서 시켜야지 생각중인데...고민이 많다. 야, 이왕 보낼 거면 미국엘 보내야지. 아이고 이 새끼 식당해서 돈 좀 벌었냐? 야, 임마 세상 부모는 다 기러기야, 기러기! 기러기는 날고 배는 떨어지고...졸다, 마시자. 마시고 죽자. 까, 까 까마귀지 이바, 바보야. 30년 전의 소년들은 이미 취해 있었다. 동구는 눈이 풀린지 오래고 화장실에 간다면 일어선 호기가 어이쿠 쥐가 났다며 주저 앉는다. 뜨지, 못하고 앉는다. 동구와 호기와 아이들은 또 어디로 갈까. 서울은, 또 미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곳은 또 어디의 근처일까. 삶은 결국, 끝나지 않은 천로역정인가.

동구와 호기는 누워 코를 골고, 도형이는 대리운전을 불러 돌아가고, 안채에서 이불을 가져온 호기의 처에게 인사를 하고, 결국 순임과 둘이서 식당을 나서야 했다. 짙은 안개로 달이 보이지 않는 자정이었다. 같은 방향일 텐데...혼자 신평으로 건너간 도형일 생각하니 호기의 말이 사실인 듯 싶었다. 어떻게 갈려구? 기다리면 막차가 올 거야. 순임이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막차가 올 리 없는 캄캄한 시골 국도다. 이 시간에 차가 있니? 오...겠지. 괜찮다는 순임을 태우고 결국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초행에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려, 안개등을 켠 차체가 낚시등 하나 걸린 나룻배처럼 느껴진다. 나아가고, 나아간다. 어디로? 흐르고 흐른다, 어디서? 나 많이 늙었지? 문득 얼굴을 숙인 순임이 물었다. 글쎄,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나이든 소녀를 위한 마땅한 표현이 나는 떠오르지 않았다. 늙었다,와는 다른, 그러나 늙었다 근처의 그 어떤.

늙었다기 보다는 지친 느낌이었다. 식당의 훤한 형광등 아래서도 늘 그런 기분이었다. 해서 나보다 몇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얼굴이다. 결혼 안 했다는 얘기 듣고 깜짝 놀랬어. 다들 상상도 못했거든, 응...그냥,하고 나는 답변을 회피한다. 산다는 게 참 어려워...그지? 전방을 보면서도 창 쪽으로 고갤 돌린 순임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글쎄...어려웠던가? 이제 그런 것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않지만...그렇지 뭐라며 나는 미소를 띤다. 얼마나 있을 거니? 그냥 몇 달 쉬다 가려 해. 말을 던지고 보니 적절한 표현이다. 아마도 쉬다, 갈 것이다. 수ㅟ는 듯 조는 듯 신ㄴ평에 들어서기까지 순임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도 말없이 전방을 응시한다. 줄지은 가로등들이 오늘따라 지쳐보인다.

여기서 택실 탈게, 몇 번이고 말하던 순임을 정말 다 왔다니까, 집의 근처란 곳에 내려주었다. 고마워 하고 내려선 순임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조심해서 가, 나도 손을 흔들어 준다. 그리고 달그락, 흔들ㄹ리는 상자의 소리를 10여미터쯤 앞 보도에서 유턴을 하다가 듣게 되었다. 그랬다. 참, 상자가 있었지. 안개 속에서 나는 중얼거린다. 결국 누구에게도 상자를 보여지 못했다. 힐끗 순임이 사라진 쪽을 돌아보고는 나는 말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열린 차창 너머로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추ㅟ객 두엇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흘러왔다 흘러간다. 가로수들이, 가등에 물든 밤의 공기가 스쳐오고 스쳐간다. 누군가 무당횡단을 하고, 멈칫 중앙선에 서 있던 낯선 얼굴이 다가왔다 사라진다. 나도 사라진다, 사라질 것이다. 정말 다 온 것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정말 다 왔다니까, 아직 모북의 푯말을 보지도 못했는데 아픈 육신이 서둘러 대꾸한다. 달그락, 흔들리는 상자 속에서 30년 전의 소년 하나가 소릴 죽여 울고 있다. 나는 넣어 둔 것은 누구였을까. 나를 꺼내려는 것은 또 누구일까. 나는 왜 이곳에 무단으로 놓여 있었던가. 스스럼없이, 하여 스스럼없이. 저 길 자욱한데

눈을 떴다. 웬일인지 새벽녘까지 울거나 책을 읽거나 했으므로 꽤난 늦게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괜한 일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건조해진다. 별 생각없이 그저 이 상태로 무미건조한 죽음을 맞고 싶다. 다락의 책상 위에 다시 상자를 내려놓는다. 되돌려...놓는다. 마음 같아선 다시 운동장의 그 나무, 그 근청에 묻어 두고 싶다. 다 무의미하다. 간밤의 모임이 오래전의 일처럼 멀게 느껴진다. 결국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짐이 되기 싫고, 위로를 받기도 싫다. 위로의말을 궁리하는 누군가의 눈빛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주섬 아침을 챙겨 먹고 나는 독서를 시작한다. 오늘은 꼼짝 않고 집에서만 머물고 싶다. 진한, 간밤의 안개가 훈체시킨 아까시아향이 마루 위로 쏟아진다. 고갤 돌리면 휑한 마루의 한켠을 걸레질하는 젊은 숙모의 모습을 보게 될 듯한 봄날이다. 나는 책장을 넘긴다.

천로역정의 2부는 주인공을 찾아 떠난 처와 네 자식의 이야기다. 아내가 있다면 어땠을까?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한다. 보다 행복했을까? 혹은 불행했을까? 아이가 있다면 내 삶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통증이 시작되었다. 서둘러 약을 먹고, 나는 한동안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문득 지난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어느 밤길과, 문득 길을 막고 껌 한 통을 내밀던 노파가 어른거린다. 가판에서 울려퍼지던 캐롤도 생각난다. 얼맙니까? 2천원.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 그때의 내 삶은 지금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먼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노파는 여전히 그곳에서 껌을 팔고 있을까? 출퇴근을 하며 근처를 매일 오간 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얼맙니까? 2천 원. 돌이켜 보면 그 껌은 얼마나 사소하면서도 달콤한 것이었던가. 그럼에도 나는 ...사라진다, 이대로 사라지면 그만일까?

사는 것보다 서 있는 게 더 힘든 저녁나절이다. 겨우 샤워를 하고 옷을 걸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순임이었다. 안 받아서...번홀 잘못 적었나 생각했어. 별 말은 아니었다. 어제 고마웠고, 언제 자기가 밥을 한 끼 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하고 통화는 끝이 났다. 얼마 안 있어 호기와 동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밥 먹으로 안 오냐? 또 보자...말하자면 그런 내용의 통화였다. 그리고 막내 형수의 전화를 받았다. 형과 형수는 매일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한다. 안부의 성격이 반, 확인의 성격이 절반이다. 어떠냐, 힘들지 않냐, 검사일이 언제냐, 혼자 있으면 어떡하냐, 차라리 전문 시설을 알아보자, 간병인이라도 있어야지...한결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꼭, 형수는 기도를 덧붙인다. 전화기를 든 채 어쩔 수 없이 찬송을 따라부르고, 기도가 끝나면 아멘 한다. 그리고 나는 혼자다. 혼자인 것이다. 찾아 나설 아내도 없다. 설사 네명의 자식이 있다고 해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문득 혼자서, 혼자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 세계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서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인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간다. 잠깐 검사를 받으러 서울을 다녀오고, 종종 호기의 식당에 들러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고, 을지로입구에서 시청과 서울역을 둘러 명동을 가듯 모북과 모서의 곳곳을 둘러본다. 정말 희귀하다 싶을 만큼 복수가 차지 않았군요. 신의 배려라고 생각하십시오. 아무튼 의사의 위로 아닌 위로도 들었다. 약간 더 나뭇잎은 무성해졌고, 약간 더 고통의 숲도 무성해졌다. 약간 더 하루하루가 빨라진 듯하고 약간더 내 삶은 짧아진 듯하다. 그리고 약간 더, 나는 가벼워졌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네? 어느 날 순임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무작정 왔어. 전화를 걸까 하다 갑자기 모북도 한 번 둘러보고 싶고 해서...그랬구나, 라고밖에는 말 할 수 없었다. 이 근처에 대추나무가 많았는데 싹 없어졌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이 근처엔 확실히 대추나무들이 있었다.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날 고마웠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듣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계곡 쪽에 위치한 통나무집 스타일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천체망원경이 설치된 작은 전망대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가격이 비싼 이유인 듯했다. 예의는 아니지만 화장실을 다녀오는 척 몰래 계산을 해 버렸다. 밥값은 원래 남자가 내는 거야, 당황해 하는 순임에겐 그런 식으로 얼버무렸다. 그럼 차라도 사게 해 줘. 결국 2층의 바로 자릴 옮겨 주스를 마셔야 했다. 순임은 주로 아이들 얘기를 했고 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나 많이 늙었지? 정류장에서 내리기 전에 순임이 다시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순임은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하루는 덧없이 짧거나

더없이 길었다.

그리고 자주

순임이 찾아왔다.

마침 모북을 지날 일이 있었거나, 문득 바람을 쐬고 싶었다거나, 약밥을 만들었는데 생ㄱ각이 나서...였다. 싫지는 않았다, 라기보다는...의외로 기분이 좋아졌다. 지난번 거기서 우리 별을 못 보고 왔잖니, 실은 별 보려고 간 곳인데...해서 하루는 가서 별을 보았다. 어디, 어디? 어머...벌갈아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또 하늘을 바라보고 돌아왔었다. 거기 서 봐, 내가 찍어 줄게. 뭐해 안 웃고...웃으란 말이야...치즈...웃으라니까...정말 안 웃을 거야? 자 웃는다. 하나 둘 셋...찰칵. 그렇게 활짝 웃는 나 자신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작은 액정 속에 마치 행복한 듯한 남자 하나가 팔짱을 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순임이 종업원을 불렀다.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바싹, 자연스레 팔짱을 낀 것은 순임이었다. 순임의 전화기가 울렸다. 응. 그래 엄마 곧 갈 거야. 숙제 하고...순간 가정을 잠시 이룬 듯했던 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순간이지만, 순간인데도 순간이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그 기분이 나는 싫지 않았다. 기울었던 달이 스스로를 살찌우는 밤이었다. 돌아와 그 밤, 나도 스스로를 살찌우듯 깊은 잠을 잤다는 생각이다. 아니 실은 오래 뒤척였고...해서 더, 깊이 잠든 밤이었다. 흐르는 인도천의 물소리를 따라, 물옥잠 같은 꿈 여러 편이 둥실 온밤을 떠다녔었다. 이 사진은 꼭 한 장 뽑아 주면 좋겠어. 걱정 마. 크게 뽑아줄게. 아니, 그냥 작게. 거 봐 웃으니까 잘 나왔지? 그리고 사진을 접어 만든 종이배가 둥실, 물 위를 떠다니는 꿈속이었다. 웃으며 종이배의 갑판 위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배는 한 척이 아니었다. 어느 가까운 배 한 척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고 계셨다. 숙부와 숙모도 웃고 계셨다. 배들은 무릴 이루어 곧 커다란 은하수가 되어 흐르고 또 흘렀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기분 좋은 며칠이었다. 순임이 사진을 뽑아다 주었고, 고마워...참 좋다...읽고 있던 명상록의 책갈피에 나는 사진을 끼워 두었다. 함께 차를 마시고 우리는 산책을 했다. 오솔길을, 그리고 이어진 인도천을 걷다가 문득 순임이 물었다. 넌...좋아했던 여자 없었니? 웃기만 했을 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걸어도 좋을 천변을 따라, 5월 끝자락의 숲들이 녹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완연하고도 완연했다. 그리고 완강하게 순임이 내 손을 잡았다. 인도천이 이리도 긴 가이었던가? 설사 바다에 이른다 해도 나는 이 강의 끝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즘 왜 이리 뜸하냐? 호기의 전화였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고 남자들끼리 한 번 더 모이자는 것이었다. 별다른 생각없이, 그러자고 했다. 이상하리만치 몸도 예전보다 좋아진 느낌이었다. 저녁 무렵 식당에 도착하니 셋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이미 거나하게 술조 몇 잔 걸친 얼굴들이었다. 오늘 고도리는 못 잡았지만 오리는 한 마리 잡았다. 푸짐한 오리탕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으로 술판이 시작되었다. 죽겠네, 힘들어 못 살겠네 잡다한 얘기 끝에 말문을 연 것은 호기였다. 너 말이다...요즘 순임이 만나냐? 맥주 한 모금을 머금은 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골은 보는 눈들이 많거든. 그나저나 다 좋은데 말이다... 또 다들 친구 아니냐, 그래서 나도 자세한 얘기는 못하겠다만 ...호연아, 내가 말하고픈 건 말이다...순임이도 닉 알던 옛날의 그 순임이는 아니다...이 얘기다. 그것만 알고 있어라. 나도 거기까지만 얘기할게. 호기의 말뜻을 잘 알 수 있었다. 나, 나도 얘기 좀 해, 해 줄까? 도형이가 나서자 동구가 가로막았다. 임마, 호연이는 세상 공짜로 살았냐? 됐으니 술이나 마시자.

겨우 한 모금 넘긴 맥주의 맛이 더 없이 쓰다. 습관인지 폭음을 한 호기와 동구가 일찌감치 뻗고 또, 또 집에는 다다, 다 갔네. 시간도 채 10시가 되지 않았는데 도형이와 독대를 하게 되었다. 도형의 말투 때문에 시간이 더, 더더, 더뎌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기분이었다. 말없이 손을 쥐던 순임의 손, 그 검지나 약지의 느낌이 떠올랐지만...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간단하고, 식상하고, 간단하고, 식상하다...나, 나도 뭐 거, 걱정은 안 한다. 니, 니가 똑똑하니까! 그, 그거 아냐 호연아? 니, 니니, 니는 우리한테 여, 영웅이었다. 심하게 취한 건 도형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처지를 알면 도형이는 어떤 표정이 될까, 나는 웃음이 나왔다. 기기, 기억하냐 그그, 그거! 갑자기 버럭 도형이 외쳤다. 뭐? 타,타임캡슐! 유, 육학년 때 우, 우리 같이 무무, 묻었잖냐. 오,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형이는 상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알고말고, 암. 나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가 입가로 번져 나왔다. 니, 니들은 다다 잊었겠지만...나나, 나는 수첩에 저,적어 놓고 있었다. 그, 그때는 서, 서로 연락도 안되고, 내, 내가 혼자서 파파, 파 봤잖냐 큭큭. 그럼...그걸 다시 뭍은 거냐? 다, 다시 왜 묻어. 우, 우리집 어, 어디 굴러다니지. 그럴 리가...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지는 느낌이었다. 여, 역시 저저, 정호연이 그걸 넣었드만. 뭘? 하고 내가 물었다.

프프, 플루타이크 영웅전.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자리 그대로 상자는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스탠드를 켜고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내용물들도 담겨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먼지 자욱한 책상에 앉아 나는 돌똘히 상자의 심연을 바라보고 바라본다. 도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내 눈앞의 이 상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확실히 나침반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플루타이크영웅전을 넣을까도 생ㄱ가했었다. 막내형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아끼고 아끼던 책이었다. 그렇다, 나는...도형이 말한 친구들의 내용물도 눈 앞의 것들과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스탠드를 껐다. 어둠 속에서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캄캄한 상자의 미로를 나서듯 나는 불꺼진 다락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온다. 문득 현기증이 인다. 일직선인 계단의 난간이 오른쪽으로 심하게 휘어진다. 그 난간을, 나는 꽉 붙잡는다.

아주 아팠고, 비가 왔다.

나는 꿈을 꾸었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종이배 한 척이 인도천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따. 깊은 물 속이다. 하지만 이 물은 어린 시절 내 무릎을 간질였던 얕은 물이다. 그 장소다. 나는 보이지 않고, 나는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분명 나는 어딘가에 있다. 침몰한 배의 근처에, 바닥에, 혹은 녹색의 햇무리 어려 있는 저 수면에, 아니 그 위로 뻗어 오른 어린 허벅지와 어린 육체에, 연결된 팔로 물장구를 치는 저...꺅, 와아...함성소리에...들리지만 보이지 않는 그 근처에...

달력을 넘긴다. 머리를 감고 나와 막내형과 통화를 하고, 통화를 끝내고, 달력을 넘긴다. 성큼, 죽음이 다가온 느낌이다 성큼, 들이친 비가 마루의 일부를 적시고 또 적신다. 그 비를 걸레로 닦는다. 이틀 격심한 통증을 겪었지만 병원엘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와라, 언제나 문은 열어 두고 있었다. 형이나 형수... 혹은 신고를 받은 누군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것이다. 언젠가 신평을 지나오다 본 119의 불 켜진 창이 떠오른다. 나를 발견한 누군가가 그때 그 속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어떻게 나를 일으키고, 그는 어떻게 나를 옮길까? 그 모습을 나는 그 근처에서 보고 있을까? 볼 수 ...있을까? 비가 또 들이친다. 나는 더 이상 비를 닦지 않는다.

찾아와 미음을 끓여 준 것은 순임이었다. 맙소사. 전화를 건 것은 순임이지만 와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은 나였었다. 감기 몸살이야. 맙소사 라고 하는 순임에게 나는 근근이 그렇게 얘기했다. 잠깐 잠깐 세상으로 돌아오면 순임이 또 곁에 앉아 있었다. 애들은 어쩌고? 잘 아는 언니에게 며칠 맡겼어. 눈을 뜨진 않았지만 가만히 이마를 쓰다듬던 순임의 손, 그 느낌을 나는 기억한다. 이틀 진통이 지나가자 마치 거짓말처럼 몸이 멀쩡해졌다. 괜찮아, 이제 살 것 같아. 요즘 감기가 사람 잡는다고 하더라. 저녁을 먹고 나서도 순임은 돌아가지 않았다. 함께 티브이를 보며 차를 마시기도 했고, 그리고 스르륵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것은 언제였을까. 선명한 빗소리가 못내 귓속으로 흘러들었고 곁에는 순임이 누워 있었다. 일어났니? 어둠 속에서 순임이 속삭였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단지 숨소리와 괜찮아, 안에 해도 돼. 순임의 목소리를 기억할 따름이다. 허무를 채우는 빗소리 속에서 순임이 가만히 내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거 아니? 순임이 속삭였다. 뭐? 나 어렸을 때 너 좋아했다는 거. 설마...바보 정말루...기억나? 왜 그때 우리 같이 묻었던 상자 말이야. 상자,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 내가 뭐 넣었는지 알아?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로, 저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나 그때 너한테 쓴 편지 넣었는데...너 좋아한다고...웃기지? 지금 보면 얼마나 유치할까? 그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도형의 얘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순임의 말을 거짓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네. 아직도 거기 있을텐데...우리 내일 운동장에나 가 볼까? 라고 순임이 물었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순임은 또 그곳에서 자신의 상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어머, 몸을 일으킨 순임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물소리가 들리고...별일이네, 다시 돌아와 순임이 누운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나 작년에 그게 사라졌는데...갑자기 다시 시작된 거 있지. 후둑 빗줄기가 두들기는 지붕과 처마의 진동이, 문득 이 집을 밤의 어둠에 묻힌 작은 상자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 상자의 심연 속에서 그리고 조용히 순임이 속삭였다. 그런데 호연아...나 말이야...한 가지만 부탁 좀 해도 될까? 뭐? 하고 내가 물었다. 있잖아...그러니까...

나 돈 좀 빌려 줘.

걸레를 개켜 두고 나는 지긋이 마루를 적시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저 문은 열려 있고, 나는 혼자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여름을...무더운 여름날을 꼭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생각이고...그저 그런 소망이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겨울을 볼 수 있을지도. 그저 그런 의사의 위로를 듣기도 했지만 순간 잠시 귀에 담았을 뿐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순임이었다. 돈은 잘 찾았고? 내가 물었다. 신평에 작은 김밥집 하나 차렸으면 하는데...정말 좋은 자리가 났거든, 얼마쯤? 3천 정도...내가 꼭 갚아 줄게. 어둠 속의 목소리와는 다른, 순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온다. 뭘...괜찮아, 그래 그래. 전화를 끊고도 나는 한동안 자세를 유지한다. 개켜 둔 걸레처럼 말없이 꼼짝 않고 마당을 지켜본다.

아무 일 없는 순간이 아무런 일 없는 공간 위에 머물러 있다.

언뜻, 그렇다. 나도 언뜻 이곳에 머물렀지 않았던가. 지긋이 책을 집어 들면서도 마치 죽은 이처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빗줄기가 그리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무수한 연잎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간다. 기쁜 일도...슬픈 일도 아니다. 아울렐리우스는 또 뭐라고 얘길 했을까. 책을 펼치자 한 장의 사진이 깃들어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오오래 그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는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이 근처近處일 것이다.

[원작 출처:http://blog.daum.net/kbkjyoung/17133564]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주인공의 낙향기(?).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삼촌에게서 키워져 나름대로

성실히 살아왔는데 40초반에 덜컥 암에 걸린 설정이다. 술, 담배도 안 하고 일 때문인지 결혼도 안 한 상태인데. 고향에 돌아가 동창들을 만나고 그 중에 자기에게 접근하는 여자 동창과 듯하지 않은 잠자리까지 하게 된다.남자 동창들은 이 여자 동창을 주의하라고 그랬건만 3천만원이라는 거금도 빌려준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펼쳐지는데 감동적이라는 말로 작품을 평하고 싶다.

아나운서와 대담하는 평론가의 작품에 대한 평이 아주 일품이다.]


◆박민규 약력

▶1968년 울산 출생 ▶2003년 문학동네신인작가상·한겨레문학상 받으며 등단 ▶장편 『지구영웅전설』(200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핑퐁』(2006)『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2009) ▶소설집 『카스테라』(2005) ▶신동엽창작상·이효석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