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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淵泛舟示永叔[웅연범주시영숙] - 許穆[허목]

Bawoo 2016. 12. 13. 20:58


  熊淵泛舟示永叔[웅연범주시영숙] 웅연에서 배를 띄우고 영숙에게 보이다.

 

                                   許穆[허목]


山下春江深不流[산하춘강심불류] : 산 아래 봄강 깊어 흐르지 않는 듯 하고
綠蘋風動浪花浮[녹빈풍동랑화부] : 푸른 마름풀 바람에 밀려 꽃처럼 떠있네. 
草靑沙白汀洲晚[초청사백정주만] : 해 저무는 물가에는 푸른 풀과 흰모래 
捲釣移舟上渡頭[권조이주상도두] : 낚시 거두고 배 저어 나루로 올라서네.



[서예 습작]

 

汀州[정주] : 강, 내, 못, 호수,바다 가의 모래나 흙이 드러난 곳.

渡頭[도두] : 나루.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다 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



永叔[영숙] : 權脩[권수 : 1618~?]의 자. 미수의 종형 許厚[허후]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임.

仁祖[인조] 24년(1646) 생원시에 합격하고 顯宗[현종] 6년(1665) 문과에 급제

 숙종 1년 미수선생이 적극 천거하였다. 숙종 3년 승지가 되고 숙종 4년 황해감사가 됨.

그 후 승지가 되었다가 숙종 8년 노론이 정권을 잡자 화를 당하였다.

 


許穆(허목 1595(선조 28)~1682(숙종 8).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 )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0년(현종 1)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朞年服:만 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서인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대공복(大功服:만 9개월)의 모순이 지적되어 앞서 그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대공복은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75년(숙종 1)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宋時烈)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 편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했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시 정보: 책-한국 한시 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