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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죽지사 (龍潭竹枝詞) - 신주재[申厚載]

Bawoo 2016. 12. 16. 23:04


용담죽지사 (龍潭竹枝詞)

                                                    申厚載

))))) [문전방초녹초비]문앞에 항기로운 풀은 점점 푸르러지고

籬外桃)))) [이외도화홍미희]울 밖에 복사꽃은 점점 붉어지누나

)))))) [파조귀래계로만]낚시 거두고 시내길 따라 늦게 돌아올 제

)一輪明))照羅) [일륜명월조라의]둥글고 밝은 달빛 얇은 비단옷을 비추네. 


[서예 습작]

[竹枝詞]

조선 시대, 가사() 하나. 민속악 요성() 가성 사용하여 우리나라 경치,

인정, 풍속 따위 노래한 작품이다.


)[羅)衣]얇은 비단으로 지은 옷/ 소나무겨우살이 라-원문이 어느게 맞는지 헷갈린다.


신후재[申厚載]

1636(인조 14)∼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신후재 영정

조선 중기의 문신 신후재를 그린 초상화. 비단에 채색.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규정영당 소장.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 신여길(申汝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신상철(申尙哲)이고, 아버지는 현감 신항구(申恒耉)이며, 어머니는 증 영의정 허한(許僩)의 딸이다.

[내용]  

1660년(현종 1) 사마시를 거쳐 같은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지평·홍문관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 왜인(倭人)이 왜관을 옮겨줄 것을 요구, 난동을 부리자 모두가 이를 피하였는데도, 그만이 이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무마시켰다.

그 뒤 1673년 부모 봉양을 위하여 안동부사로 나갔고, 1677년에는 병조참의·동부승지·지제교를 거쳐,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이어 1679년 (숙종 5)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제거당할 때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정원우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은 겸 진주주청사(謝恩兼陳奏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92년 도승지·강화유수·개성유수 등을 거쳐 이듬해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소론이 집권하자 여주에 유배되었다. 1697년 석방되었으나 충주오갑장(鰲甲庄)에 은퇴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저술활동 :저서로는 시문집 『규정집』 7권이 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청선고(淸選考)』
  • 『성호문집(星湖文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 정보-책:한국 한시 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