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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풍암(高山九曲楓岩)-권상하(權尙夏)

Bawoo 2016. 12. 18. 20:54



고산구곡풍암(高山九曲楓岩)

                                                                                                               권상하(權尙夏)

七曲楓岩倒碧灘 [칠곡풍암도벽탄] 일곱굽이 풍암 푸른여울에 거꾸러져

 錦屛秋色鏡中看[금변추색경중간]비단병풍 가을 빛깔을 거울 속에 바라본다

悠然獨坐忘歸路 [유연독좌망귀로] 유연하게 돌아갈길  잊고 혼자 앉아

一任霜風拂面寒 [일임상풍불면한]서리바람이 얼굴을 닦게 맡기노라


[서예 습작]



   

수암 권상하


권상하(權尙夏, 1641년 - 1721년 9월 2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교육자로 효종, 현종, 숙종 때의 성리학자였다. 송시열, 송준길의 문하생이다. 한성부 출신. 호는 수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통이자 그 지도자로서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다.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였으며, 그의 유언을 받들어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웠다. 자신의 동생이기도 한 성리학자 겸 문신 권상유의 형이자 스승이었다.


일찍이 유계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에서 배웠고 특회 송시열의 총애를 받았다. 1660년(현종 1년) 진사(進士)가 되고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1672년 스승 송준길의 임종을 지켰고, 1689년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가다가 사사당할 때는 스승 송시열의 임종을 지켰다. 두 스승이 죽은 뒤에는 3년상을 마쳤다. 대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의정부좌의정까지 역임하였다.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화양동(華陽洞)에 만력제숭정제를 모신 사당인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두 황제를 추모하였다.


어려서부터 송시열,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로 자칭타칭 송시열의 적통이라는 평을 들었다. 만년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송시열의 저서를 보급하며 송시열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노력하였다. 한편 회니시비의 주역이자 소론의 영수인 윤증과는 갈등하였다.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성과 물성의 동이에 대한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의 문인 이간한원진 사이에 호락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한원진의 설을 지지하여 호락분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유계, 송시열, 송준길의 문인이다.[위키백과 -권상하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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