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 日
-李㙫
春深庭院日如年(춘심정원일여년)봄 깊은 뜰 안 하루가 한 해 같더니
萬樹風花落檻前(만수풍화락함전) 바람 불어 온갖 꽃이 난간 앞에 떨어지네.
方識太平眞有象(방식태평진유상) 비로소 알겠거니 태평의 참 조짐이라,
相公終夕枕書眠(상공종석침서면) 상공도 저녁 내 책을 베고 자네.
[서예 습작]
李㙫
21세 되던 1684년(숙종 10)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1697년(숙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701년(숙종 27)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1703년(숙종 29) 세자시강원의 문학·사서(司書),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하면서 뇌변(雷變)이 있자 언로를 넓히고 상벌을 적절히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1704년(숙종 30)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1705년(숙종 31) 김재(金栽)가 이집의 통청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자 이에 대해 공의(公義)가 비난당하였다고 논척하였다. 이후 홍문관의 교리·부교리·수찬·부수찬·응교, 문학, 이조정랑 등을 연이어 역임하였다.
1707년(숙종 33)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0년(숙종 36) 언관직(言官職)을 두루 지내다가 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서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홀로 이론(異論)을 내어 최석정(崔錫鼎)에게 죄가 없음을 주장하다가 다른 사간원 관리들에게 논핵 당하였다. 1711년(숙종 37) 5월 다시 승지가 되었으며, 7월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712년(숙종 38)에는 대사간을 거쳐 흡곡 현령(歙谷縣令)을 지냈다. 1713년(숙종 39) 이조참의를 지냈고, 1714년(숙종 40) 전라도 관찰사, 1718년(숙종 44)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19년(숙종 45) 형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도승지를 지냈다.
경종이 즉위한 후 경기도 관찰사에 재직하다가 1721년(경종 1) 예조참판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소론 관리인 최석항(崔錫恒)·조태구(趙泰耉)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영조 초 한성부 판윤이 되었는데, 신축년 최석항과 조태구를 변호한 일로 처벌을 청하였으나, 영조가 탕평책으로 이를 무마해 주었다. 이후 영조의 탕평책을 잘 따라서 예조판서·이조판서·홍문관 제학·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29년(영조 5)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이후 실록청 총재관으로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을 총괄하였다.
[학문과 저술]
글씨에 뛰어났는데, 작품으로는 1728년(영조 4) 절의를 권장하기 위해 황해도 해주시에 세운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가 유명하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의 덕수 이씨 묘역에 있다. 우이 계곡에서 방학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어서면 도로 왼쪽에 천주교 공원묘지가 있는데, 덕수 이씨 묘역은 공원묘지 입구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서울특별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종합 보고서』 Ⅱ(서울 역사박물관, 2005)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시 정보-책:한국 한시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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