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도서관 ♣/- 역사, 정치

[우리 역사]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정치를 할까/이정철

Bawoo 2017. 4. 13. 09:21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내용에서 책 제목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조선 선조시대 임진왜란 발발 이전 15년간 있었던, 당시 집권층들의 다툼을 기록한 책. 

처음엔 동인들이 권력을 잡았다가 정여립 모반 사건인 기축옥사 이후로 몰락하고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서술이 너무 평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권이 바뀌게 되는 대사건인데 특정인물-정개청, 최영경-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정작 역모 당사자인 정여립에 대한 이야기는 비중이 크지 않은 것도 의아하다.

책에는 역사에 관심이 있어 책을 좀 읽은 사람들일지라도 깊이 읽는 이들-주로 전문학자들(?)-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후대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한가락했을 쟁쟁한 인물들. 때문에 내용이 깊은 데 그러면서도 얕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깊다는 면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까지 망라한 내용이나, 일부만 인용하는 형식이지만 사건의 근거가 되는 상소문등을  수록한 면에서 그렇고, 얕다는 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깊이 남는 내용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랬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나열해 놓은 장도라는 느낌.


선조 당시 3년간 벼슬을 하고 세상을 뜬  퇴계 선생과 선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이이 선생, 당쟁을 예고했던 이준경 선생이 선조에게 배향되었다는 사실. 내가 무능, 비겁, 교활한 왕으로 인식하고 있는 선조 시대의 두 정치인인 퇴계, 율곡 선생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화폐에 초상이 실려있는 것은 좀 아이러니하다.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까지 포함하면 다 당쟁의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7년 임진왜란을 겪어 민생이 초토화 된 선조대에 사셨던 분들 아닌가? 이순신 장군 빼고는 다 임란 발생 이전에 세상을 뜨신 분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나라에 이 분들 빼고는 화폐에 실릴만한 인물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흑막이 있어 이 분들이 실려 있는 것인가?


이이 선생이 선조의 각별한 신임은 받았으나 다른 관료들에게는 왕따 비슷하게 당했다는 것도 좀 그렇다. 지금도 좀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들은 정치판에서 왕따당할 가능성이 많은 것을  과거의 입증 사례로 보여주는 것인가.^^


[ 아래는 출판, 언론사의 이 책 소개 글]

 

[책 소개]조선 당쟁의 사실을 엄밀하게 밝히며 현재적 의미를 탐구한 역작!

선조 집권 이후, 사림의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조선시대 통틀어 이 시대만큼 도덕적 확신과 정치적 이상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도 드물었다. 그러나 선조 8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림 내부의 갈등, 이른바 ‘동서분당’이 발생했다. 왜 도덕적·정치적 이상에 대한 사림의 오랜 집단적 열망이 그들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대한 파국으로 귀결되었을까? 훌륭한 개인의 인격과 무관하게, 그들의 진정성에 독립하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는 그 물음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저자는 동서분당 사태 이후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움직임이 만든 당쟁의 사실을 엄밀하고도 깨알같이 적시해간다. 그 결과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이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고 분열을 정당화 하는 기제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도덕적 확신에 찬 사림은 결국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는 것이다

 

저자 이정철

저서(총 4권)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UCLA에서 머물며 다른 나라 역사에 대한 수업도 듣고, 한국사 연구성과를 영역화하는 작업을 했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2013, 역사비평),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2010, 역사비평)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전사前史

1부 사림의 분열 _ 사림의 정치화
리더십
1장 선조 8년~10년 : 분열의 시작
인순왕후 사망
애도의 정치성ㅣ선조, 정치를 시작하다ㅣ“낭천을 폐지하라”
‘동서분당’
미해결 살인사건ㅣ피혐과 처치ㅣ살인사건의 정치적 변주ㅣ이이의 처치ㅣ허봉과 박근원의 결합ㅣ박근원이란 인물ㅣ개성 유수, 경흥 부사ㅣ사건 배후의 구조
2장 선조 11년~13년 : 대립 구도의 성립
이수의 옥사
서인의 짧은 권세ㅣ선조 11년ㅣ같은 사건, 다른 처리ㅣ동인의 새 파트너, 구신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
시비에서 정사로ㅣ시비와 정사의 여러 거리ㅣ“유자가 도를 행함이 이 정도뿐인가ㅣ이이에 대한 동인의 첫 공격ㅣ김우옹이란 인물

2부 이이의 시간 _ 사림의 이상, 정치의 현실
프레임
3장 선조 13년 말~15년 : 이이의 분투와 좌절
정치의 한복판에 선 정치적이지 않은 이이
선조가 이이를 부른 이유ㅣ이이가 돌아온 이유ㅣ이이에 대한 동인의 시선ㅣ우성전 탄핵 사건ㅣ이경중 탄핵 사건ㅣ순진한 이이, 저돌적인 정인홍, 배후 조정자 이발
심의겸, 정철 탄핵 사건
수면과 저류ㅣ“이는 이발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ㅣ이발, 정치를 하다ㅣ정철 문제에 불을 붙인 정인홍의 한마디
윤승훈 사건
정철은 외척인가ㅣ“윤승훈이 무슨 식견을 지녔겠습니까”ㅣ대신의 권위, 언관의 권위
일진일퇴
복상과 처치ㅣ이이, 선조에게 개혁을 호소하다ㅣ“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ㅣ성혼 눈에 비친 이이
4장 선조 16년 : 계미삼찬
‘이탕개의 난’이 불러온 효과
여진의 성장, 선조의 충격ㅣ이이 개혁안과 선조의 변화ㅣ경안령 이요 사건
공론은 누구에게 있는가
계속되는 북방 상황ㅣ“전천·만군의 죄”ㅣ이이의 정체성ㅣ이이가 탄핵받은 진짜 이유ㅣ“이이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이다”
좌절된 이이의 꿈
성혼의 상소ㅣ송응개의 상소ㅣ송기수라는 인물ㅣ기억의 당파성ㅣ“언관들이 간사한 것은 아닙니다ㅣ동인이 이해한 조제보합론ㅣ김우옹의 뒤늦은 상소ㅣ선조와 동인의 맞대결
대간의 말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공론ㅣ선조와 승정원의 갈등ㅣ“신들 역시 조종조 노신의 후예들입니다”ㅣ“심의겸이라는 함정”

3부 선조의 시간 _ 나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관점의 현재성
5장 선조 17년~22년 : 불안한 평화
계미삼찬 후 조정 풍경
단호한 선조ㅣ“이이를 그르다고 한 것은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ㅣ4월 14일? 4월 17일?ㅣ초조한 이이ㅣ이이의 입장은
조정의 재편
이이의 죽음ㅣ현상 유지ㅣ미묘한 변화ㅣ김우옹과 신응시ㅣ영의정 박순, 탄핵을 받다
선조의 정치
“내 뜻을 말하겠으니 사관은 기록하라”ㅣ선조의 이상한 하문ㅣ조정 밖 목소리ㅣ선조 18년 9월 2일 선조의 전교ㅣ이발의 복귀
6장 선조 22년 : 기축옥사 발발
고변에서 체포까지
고변서 접수 직후ㅣ고변서가 올라오기까지ㅣ정여립 체포에 실패하다ㅣ다복, 10월 14일 저녁에서 밤까지ㅣ온 산을 태워서라도 체포하라ㅣ죽음을 부르는 ‘적가문서’ㅣ주륙과 은택
국면의 전환
전주 생원 양천회의 상소ㅣ선조의 구언ㅣ정철의 복귀ㅣ정집의 진술, 김천일의 상소ㅣ낙안 교생 선홍복
공포의 정치
조정을 지배한 공포ㅣ선조, 사건을 일단락 짓다ㅣ이산해, 용 같은 사람ㅣ성혼의 상소

4부 파국
책임
7장 정개청 옥사
정암수와 배명의 상소
호남의 중심, 나주ㅣ나사침 부자와 그 가문의 내력ㅣ구절의 대 배절의
투옥 과정과 심문의 쟁점들
홍여순이란 인물ㅣ고발 사유는 사라지고ㅣ「절의청담변」을 둘러싼 오해
정개청과 박순
‘배사론’ㅣ저마다의 기억ㅣ진실은?ㅣ향리 가문 출신 서원 원장
8장 최영경 옥사
기축옥사 이전의 최영경
성혼과의 만남ㅣ스승을 빼닮은 제자ㅣ『심경』이라는 책ㅣ최영경이 진주로 간 이유는ㅣ“미움이 규모를 달리하고”ㅣ“박순과 정철을 반드시 효시한 뒤에야”
‘삼봉즉경영설’의 부상
소문ㅣ알리바이
1차 수감, 정철과의 만남
두 가지 쟁점ㅣ정철의 올리지 않은 차자
2차 수감, 이이에 대한 기억
‘하늘 그물’ㅣ“말의 근거를 자세히 아뢰라”ㅣ“신이 한 말이 아닙니다”ㅣ죽음, 그 주변

에필로그
부록_1. 이조 및 삼사三司의 관직|사가독서자 일람표|연표: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까지|4. 인물정보
찾아보기

조선시대 당쟁과 인물들에 대한 깊은 성찰
“역사공부는 대의를 찾아가는 과정”

선조 8년~23년, 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까지
조선 당쟁의 사실(史實)을 엄밀하게 밝히며
현재적 의미를 탐구한 역작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이정철 박사(국학진흥원 연구원)가『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2010, 역사비평)을 낸 후 받았던 곤혹스런 질문이었다 한다.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선조 8년(1575)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림 내부의 갈등, 이른바 ‘동서분당’이 발생한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은 정치적 사건들로 끝없이 변주되다가 선조 23년 기축옥사로 파국을 맞는다. 이 책은 이 과정과 인물들에 밀착하여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드러낸다. 크게는 이이와 선조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피되, 200여명이 넘는 수많은 관련 인물들의 동선을 드러내고 그 동선 아래에 흐르는 의도까지도 밝힌다. 저자는 정치세력의 구조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을 이해하면 개인적 특성이나 가변성, 현실의 생생함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귀납적으로 도출되는 구조만이 진짜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쟁사라면 조선후기가 절정인데 저자는 왜 선조 8년 ~ 23년까지 그 15년에 주목했을까? 한 세대 앞선 퇴계 이황이 살았던 문정왕후 시대에는 물론이고, 16세기 초 등장한 이래로 사림(士林)은 정치의 주체라기보다 사화로 집약되는 탄압을 견디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선조 집권 이후 드디어 사림의 정치적 공간이 열렸던 것이다. 조선시대 통틀어 이 시대만큼 도덕적 확신과 정치적 이상(理想)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도 드물었다.
그런데 곧 ‘동서분당’ 사태를 시작으로 사림은 분열했다. 왜 도덕적, 정치적 이상에 대한 사림의 오랜 집단적 열망이 그들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대한 파국으로 귀결되었는가? 훌륭한 개인의 인격과 무관하게, 그들의 진정성에 독립하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이정철 박사는 올바른 정치적 대의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당쟁은 큰 차이를 낳는다 한다. 동서분당에 대해 “당연히 정치적 욕망을 가장 큰 동력으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의가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며 대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과거든 현재든 대의는 비록 수적인 우세를 차지하지 못해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 사회의 공적 합의를 만드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역사공부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선정작이다.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이 아닌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열렸지만


선조 5, 6년. 삼사의 청직에서 최고 요직까지 모두 사림이 차지했는데도 좋은 정치가 이뤄지지 않자 이이는 당황하고 고민했다. 그 결과가 선조 7년 1월에 나온 「만언봉사」였다.

“정치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도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수기’된 군자가 집권을 하면 ‘치인’이 된다는 믿음, 성군과 현신이 만나면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선조대 초반을 경과하면서 흔들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의도와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의도가 좋다고 반드시 좋을 결과가 온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의도가 아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이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이 아닌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즉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새로운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됐다고 생각했을 때 이이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이이가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백성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이의 그 책임 의식이 상황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게 했던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이이만이 그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이는 다음 시대에 대동법으로 귀결된 개혁의 아이디어를 사실상 처음 공론화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그들 중 국소수가 살아남아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역사를 좀더 길게 볼 때 광해군, 인조, 효종대가 대동법 등 정책 생산이 가능했던 시대라면, 선조대는 대동법을 만들어갔던 시대의 아버지 세대로 정치세력이 갈등했던 시대였다. 정책 생산은 정치세력의 형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도 개혁이 절실하고 그것을 위한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과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이이의 보합조제론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는 국정개혁과 정치세력화 둘 다 하려다가 결국 하나도 못 이룬 것이다. 저자는 기존의 당쟁론이나 붕당론이 아닌 이러한 관점에서 선조대의 정치세력의 갈등 양상을 다시 해석한다. 「만언봉사」나 나올 무렵 거의 동시적으로 발발하는 당쟁의 격랑에서 이이에게 국정개혁을 할 정치적 공간과 기회가 과연 있었을까?

사림은 왜 분열했을까?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으로 분열을 정당화하다


당쟁은 이듬해인 선조 8년에 발생했다. 1월 명종비 인순왕후가 죽자 선조는 비로소 자신의 정치를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한 미해결 살인사건에서 시작된 ‘동서분당’ 사태는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방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사림이 무리지어 공개적으로 갈등하는 양상은 이후 국면을 바뀌며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시적으로 서인이 승리한 듯했으나 동인세력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강해졌다.
선조 11년, 12년은 동서 갈등의 진정한 전환점이었다. 이른바 ‘이수의 옥사’와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을 거치면서 동인과 서인은 각각 인적 구성과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신념 혹은 대의명분을 갖추었다. 구신과 결합하기 시작한 동인은 자신들과 서인을 선과 악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조정이 ‘외척세력 서인’ 대 ‘진정한 사림 동인’으로 대립한다고 인식했다. 즉 서인 전부를 외척 심의겸의 당여라고 주장했으며 나중에는 이이까지도 심의겸의 당여로 보고 또 그렇게 공격했다. 서인을 ‘친심’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동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공격 방식이었다.
저자는 동서분당 사태 이후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움직임이 만든 당쟁의 사실(史實)을 엄밀하고도 깨알같이 적시해간다. 이이와 선조는 한순간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김효원과 심의겸은 갈등의 언설 속에 있을 뿐 현실에서는 비중이 없다. 대신에 김우옹, 이발, 성혼, 류성룡, 이산해 등이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림은 왜 분열했을까? 물론 어떤 시대의 정치에도 나타나기 마련인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이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한다. 사림의 분열은 스스로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확신에 기인했다고 한다. 사림(동인)의 강력한 힘은 그들이 가진 도덕성에 있었다. 그 도덕성은 적어도 두 세대에 걸친 사화의 시대를 이겨낸 힘이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고 분열을 정당화 하는 기제는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이었다. 젊은 사림이 가졌던 도덕적 확신은 역설적이지만 앞 시대 훈척정치가 물려준 유산이었다. 그들이 가진 도덕적 신념은 그 자체로 정당할 뿐 아니라, 불의하고 강력했던 권력을 물리친 정치적 참호이자 무기였다. 도덕적 신념은 고유한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정철과 최영경은 서로를 미워했지만, 흥미롭게도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비슷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치고, 다른 사람 의견을 구차히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단 두 사람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도덕적 확신에 찬 사림은 결국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磁場)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
이 책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역사적 사고를 하게 한다. 가장 치열했던 진정성조차 시대적 상황에 지배된다는 것, 앞 시대의 ‘정치적 올바름’이 뒷시대까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같은 신념으로 뭉쳤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인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공동체 다수의 객관적 요구가 중요하다는 것, 대의를 잊으면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등이다. 과거는 쉽게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이는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 했고,
대간들은 사회적 결과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선조 8년 인순왕후 사망이 촉발시킨 두 가지 현상, 즉 선조가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고 사림이 분열하기 시작한 가운데 이이의 입지가 좁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림이 분열할수록 선조의 주도권은 강해졌고, 사림은 권력에 대한 욕망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어갔다. 선조 8년부터 이이가 사망한 선조 17년까지, 이 구조는 몇 차례 무게중심을 옮기며 유동했지만 계속 유지되었다. 이 책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조에서 이이는 마치 덫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때 이이가 요구한 국정개혁의 핵심은 공안(貢案)개정, 수령 숫자감축, 감사 구임 등이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은 사림의 대동단결 즉 당파간 조제·보합이 필요했다. 사림이 힘을 합해도 개혁이 어려운데 분열되어서는 가망이 없다는 인식이었다. 다음은 대신이 실제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언관들을 중심으로 공론이 독점되었고, 조정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삼사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던 ‘처치’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국가경영을 할 대신들의 힘이 현저히 약화된 것이 문제라 여겼던 것이다.
이이의 국정 개혁안은 선조와 동료의 외면으로 결국 실패한다. 두 가지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동료의 외면이었다. 이이는 믿었던 이발, 류성룡, 김우옹, 이산해 등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류성룡은 “개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이가 특히 기대했던 김우옹은 계미삼찬 직후 상소에 “이이를 그르다고 한 것은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라고 썼다. 실낱 같은 개혁의 가능성은 지워졌다. 이들은 우선순위 면에서 국정개혁이 당파 간 시비(是非, 옮고 그름)와 정사(正邪, 바르고 삿된)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세력 간의 시비가 아닌 민생개혁에 대한 추구가 자신들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림은 분열했고, 그것은 선조의 독재로 이어졌다.
선조 대 조정에서 여러 정치적 행위자들은 정치적 책임을 지는 데 결국은 모두 실패했다. 이이는 개인으로는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 했고, 대간들은 사회적 결과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던 사람은 선조였다.

선조는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다


이 책에서 동과 서의 갈등과 분열의 현장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선조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조는 양 진영이 극단으로 치솟는 갈등의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자가 되었다. 특히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기축옥사 과정에서 선조는 거의 완전하게 조정을 장악하고 관료들에게 거의 제한받지 않은 독재에 가까운 권력 구축에 성공했다.
선조는 서인과 동인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이쪽저쪽으로 옮겨가며 명망 있는 인물을 정치적으로 소비했다. 이이, 박순, 이산해, 류성룡, 정철, 성혼, 이원익, 노수신 등이다. 그들은 정치적 용도가 다했다고 판단되면 버려졌다. 이이는 그렇게 되기 전에 갑자기 사망했지만, 더 오래 살았어도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선조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철에게 위관을 맡도록 강제했다. 이것이 가져올 당파적 갈등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최대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다. 그는 왕이라는 제도가 자신에게 제공한 것을 최대한 이용했고 또 누렸다. 하지만 그것을 토대로 가능한 공적 이상(理想)의 정책적 구현에 무관심했다. 선조는 정치 상황 및 그 결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선조를 통해 정치적 힘과 정치적 책임은 분리되었고, 자연스럽게도 그것은 국정의 무정부적 상태를 초래했다.

===========================================================================

선조 집권 후 사림파에 눌린 훈구파
동인에 합류하며 갈등 양상 격화
정치적 옳고 그름 떠나 선악 대결
상대 몰아 세우며 권력·사익 추구

기사 이미지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이정철 지음, 너머북스
560쪽, 2만9000원

이이·박순·이산해·류성룡·정철·성혼·이원익·노수신·심의겸·김효원·이발…. 조선왕조 500년에서 손꼽을 만한 쟁쟁한 인물들이 함께 활약했던 시대는 언제일까. 이황·이준경·기대승 같은 인사들도 넣을 수 있다. 혼군(昏君·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으로까지 비하되기도 하는 조선 14대 임금 선조 시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이 시대만큼 정치의 이상 이 드높이 외쳐진 때도 드물다. 성리학(주자학) 이론과 도덕심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정치를 주도했지만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왕권 강화에만 몰두한 선조 한 사람의 잘못으로만 돌릴 순 없다.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서양 정치학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얘기인데, 우리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선조 시대를 얘기한다고 해서 임진왜란(1592~1598)으로 나라가 파국의 위기를 맞았던 점을 다시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시기의 문제점은 이미 많이 지적돼 왔다. 신간에서 새롭게 문제로 지목한 것은 그 이전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때는 사림(士林)이라고 불리는 젊은 지식인 정치인들이 본격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들은 도덕성을 앞세워 기득권 훈구 세력을 압박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첫 ‘서자 출신’으로 정통성이 약했던 선조는 초기에 사림파를 전략적으로 지원했다. 민생을 위한 정치 개혁이 사림의 주도로 활발히 진행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선조가 집권하고 25년이 흐른 후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조선을 멍들게 한 당쟁이 시작됐다. 당쟁 그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집단이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양상이다.
기사 이미지

선조 3년(1570)에 그린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임금의 명을 받아 독서하던 문신들의 계회(契會·계 모임)를 그린 그림이다. 이이·류성룡·정철·윤근수 등 9명이 이 모임에 참여했다. [사진 너머북스]


이 책은 동서분당이 발생한 선조 8년(1575)부터 기축옥사가 일어난 선조 23년(1590)까지 15년간의 당쟁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특히 강조해 지목하는 것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벌어진 당쟁이 사림파와 훈구파 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쟁은 사림파 사이에서 전개됐다. 선조 8년에 인사권의 핵심 보직인 이조 전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동서 분당은 본격화된다. 일시적으로 서인이 승리한 듯했으나 동인 세력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강해졌다.

선조 11~12년에 들어서면서 갈등은 색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선조 집권 후 사림파의 득세에 숨죽이고 있던 훈구파들이 동인 세력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양상도 격화됐다. 당쟁이 정치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수준을 떠나 자신은 선, 상대는 악으로 규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림파들끼리 자신은 군자, 상대는 소인으로 규정했다. 시비(是非) 논쟁에서 선악(善惡) 논란으로 비화되며 돌아오기 힘든 다리를 건너간 것이다.

동인과 서인은 서로 공론(公論)을 내세우며 상대를 몰아붙였지만 결국 권력욕과 사익 추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림의 분열은 선조의 독재로 이어졌다. 율곡 이이만이 사림을 다시 하나로 묶어 개혁정치를 일관되게 추진하려했지만 동료 사림들의 외면으로 끝내 실패했다고 저자는 평가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인 저자 이정철 박사는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2010)을 펴낸 직후부터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선조 시대 당쟁사를 다루고 있지만, 현대 한국 정치에 대한 성찰로도 읽히는 책이다.
 
[S BOX] 당시 지식인들 도덕신념 투철, 정치적 책임의식 희박
선조 시대 사림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으로 저자는 ‘책임’을 제시했다. 도덕적 신념은 투철하지만 정치적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도덕적 신념은 그 시대의 고유한 인간형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정철과 최영경은 당파를 달리하며 서로를 미워했지만,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비슷했다고 한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차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대 사림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했다.

율곡은 ‘시의(時宜·시대적 과제)’와 ‘실공(實功·가시적 성과)’을 모두 중시했다는 점에서 예외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에 힘쓰지 않으면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만나도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선한 의도나 윤리가 정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교훈을 선조 시대를 통해 되새겨보게 한다.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인재 넘쳤던 선조 시대 파국 맞은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