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鍾寺
-李明漢
暮倚高樓第一層 [모의고루제일층]저녁 무렵 높은 누각 제일 높은 층에 기대보니
石壇秋葉露華凝 [석단추엽로화응]주춧돌가 가을잎엔 이슬이 맺혀있네
羣山袞袞蟠三縣 [군산곤곤반삼현]산들은 끝이 없이 이어져 세고을을 두르고 있고
大水滔滔謁二陵 [대수도도알이릉]큰 강은 두 언덕을 보며 도도히 흐르네
烟際喚船沽酒客 [연제환선고주객]나그네는 안개 낀 강가에서 배를 불러 술을 사고
月邊飛錫渡江僧 [월변비석도강승]스님은 달빛 아래 석장을 휘저으며 강을 건너네
酣來暫借蒲團睡 [감래잠차포단수]술에 취해 포단에서 잠시 잠을 자려 하는데
古壁蓮花照佛燈 [고벽연화조불등] 오래된 벽의 연꽃이 불등에 비치네
袞袞:① 많다 ② 권세가 대단한 모양 ③ 수두룩하다 ④ 끝이 없다
蟠:서릴 반 / ① 서리다 ② 쌓다 ③ 두르다 ④ 모이다
蒲團:부들로 짜서 만든 둥근 방석
佛燈:[불교] 부처 앞에 바치는 등불
[서예 습작]
이명한 (천장(天章), 백주(白洲))
1595(선조 28)∼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신. |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이다. 증 영의정 순장(順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삼등현령(三登縣令) 계(0x9940)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전적·공조좌랑에 이르렀다. 앞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교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關東)에 나가 서리들의 정치와 백성들의 폐해를 살폈다. 다시 옥당(玉堂)에서 근무하다가 이조로 옮겨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사가독서(賜暇讀書 :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했다. 이곳에서 승문원제술관(承文院製述官)·한학교수(漢學敎授)·교리·사국수찬(史局修撰) 등을 겸대하다가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李植)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사간에 승진된 뒤 검상(檢詳)·사인(舍人)·집의·이조참의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그 뒤 병조참의·우승지·형조참의·좌승지·남양부사·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9년(인조 17)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었다.
이 해 도승지로서 홍문관·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李敬輿)·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 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아버지 정구, 아들 일상(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백헌집(白軒集)』
- 『청음집(淸陰集)』
- 『백강집(白江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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