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李瀰)
1725년(영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중호(仲浩). 한성판윤 광하(光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집(㙫)이고, 아버지는 주진(周鎭)이다. 어머니 역시 옥당 출신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다. 어머니 역시 옥당 출신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다. 부인은 또한 옥당 출신 서명빈(徐命彬)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정랑(正郞)으로 재직하던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재직 중 간쟁에 충실하다 한때 영조의 미움을 샀고, 그 뒤 수찬으로 옮겼으나 1759년 일시 파직되기도 했다.
이어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중앙 관직으로 복귀한 1760년을 전후로 세자시강원의 겸찬독(兼贊讀)을 맡아 세손의 강학(講學)에 심혈을 기울여 영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아울러 홍문관교리로 있으면서 산림(山林)·처사(處士)들을 초치(招致)하여 등용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부수찬을 거쳐 응교로서 재직하던 1762년에는 응제(應製)에 수석하여 말 안장(鞍裝)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판부사 조재호(趙載浩)가 불령(不逞)한 말을 전했다는 난언(亂言) 죄인 엄홍복(嚴弘福)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삭직(削職)되었고, 이후 1764년에는 수원부사 재직 중 옥중 죄인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1765년 승지에 제수된 후 잠시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복귀하였다. 그 뒤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거쳤으며 승지로 재직하던 1767년에 수원부사 재직 당시 마병(馬兵)을 허술하게 했다는 이유로 전부사 홍지해(洪趾海)·이명식(李命植) 등과 함께 파직된 뒤 진잠현(鎭岑縣)에 충군(充軍)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봉조하 홍계희(洪啓禧)를 도와 ≪의주 儀註≫를 편찬한 공으로 곧 석방되어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1770년(영조 46)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이어 영조 말년에는 대사헌, 대사성, 부제학 등을 거쳤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찬집청(纂輯廳) 당상(堂上)을 겸하면서 이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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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는 일 때문에 글씨 한 점 쓴 걸로 오늘 일과는 끝. 예약을 안 하고 간 탓에 무려 3시간 반이나
소비. 대학병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웬 아픈 사람은 이리도 많은 것인지. 병원이 한두 곳도 아닌데
그곳마다 아픈 사람들로 꽉 차 있으니 참!. 의료보험 덕분일까? 아니면 아파도 병원 갈 돈이 없어 참아야 했던 지난날 가난했던 시절과는 달라진 가계 경제력의 향상 때문일까? 아마 둘 다겠지. 거기다가 의술이 발전하여 웬만한 병은 약으로 치유가 되는 시대가 되어 있으니 너도 나도 병원으로 몰리는 것이리라. 당장 나만해도 예전 같으면 약이 없거나 치료할 여유가 없어 병원에는 쉽사리 못갔을 터 아니겠는가.
이러니 저러니 말들 많아도 참 살기 좋은 나라다. 테러없고 내전 없고 치안 상태 좋고. 대통령 탄핵해서 새로 대통령 된 사람이 또 탄핵 대상이 되는 불행한 국가 아닌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난 듯 싶어보이는 나라 우리나라. 대한민국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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